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62화 (62/200)
  • ◈62화

    불과 한 시간.

    잭슨이 데릭과 함께 의회에 갔다가 정혁을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사택으로 돌아온 사이의 빈 시간이다.

    사택 내부는 조용했고 잭슨이 몇 차례 정혁을 불러 봤지만 그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잭슨은 긴급하게 데릭에게 전음을 보내고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어디로 간다는 그의 메모나 추측할 수 있는 흔적을 찾아볼 순 없었다.

    비상사태와 다름없는 상황에 잭슨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일단 부유성 전체를 둘러봐야 될 것 같다는 판단에 그는 히포그리프를 불렀다.

    휘파람 소리와 더불어 곧 공중에서 히포그리프 하나가 나타났다.

    맹렬한 날개에서 일어나는 하강 풍을 맞으며 히포그리프의 등 뒤에 올라탄 잭슨이 안장에 묶여진 종이를 발견하고 급하게 그것을 들어 펼쳤다.

    - 한 마리 빌립니다. JH.

    JH. 잭슨은 인상을 쓰면서 답답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빌리는 건 좋은데 어딜 간다는 이야기를……!”

    안장 옆에 하나의 종이가 더 묶여 있다.

    - 본부 털러 간 거 아니니까 빡치지 마시고, 은행나무 엘프 왕국으로 갑니다.

    잭슨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속으로 당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눈치 없는 이니셜, JH는 또 뭐람.

    정말 알 수 없는 남자다.

    그는 데릭에게 전음을 보내 급박해져 있을 의회의 상황부터 진정시켰다.

    그리고 저 멀리 북쪽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다음엔 전장에서 만나겠군요.”

    잭슨은 뒷덜미에 돋아 오르는 소름에 작게 몸서리치고서 히포그리프와 함께 날아올랐다.

    그의 주머니에 담겨 있던 브로치가 작게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

    며칠을 보냈다.

    은행나무 엘프 왕국과 자유 연맹 본부 부유성과의 거리는 꽤 됐었기 때문에 정혁은 중간중간 아직 평화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이동 중에 박달수와 계속해서 전음을 나누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아린은 모든 전쟁을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런들 당장에 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었기에 정혁은 그저 본연의 능력과 자질을 키우는 데 더 심혈을 기울이기로 다짐했다.

    라테와 엘라는 이제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정혁이 종종 대장간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정혁은 며칠 동안 꾸준히 자신의 숙련도를 숙달했다.

    숙련도에 따라 레벨도 올랐고 이제 150의 레벨을 달성했다.

    건틀릿을 착용한 상태에서 각종 제련과 제작은 더욱 빛을 발했고 완벽한 성공률과 탁월한 특성이 각인된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시에 괜찮은 무기점이나 잡화점에 이런 물건들을 팔면 수완이 꽤 좋았다.

    정혁은 안나에게 레이드 팀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보다 값진 재료들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근방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얻은 아이템들이 정혁의 능력 앞에 엄청난 장비로 둔갑하는 걸 보면서 한참 입맛을 다시던 그였다.

    조가 정혁과 함께 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면 정혁에게는 정말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진 여러 제작에 관련된 방대한 지식들은 정혁의 대장 기술의 범위를 끝없이 넓히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단순한 장비들부터 방어구, 각종 무기, 스크롤, 각인석까지 대장 기술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쌓아 갔다.

    그리고 드디어 일정 숙련도가 달성되자 정혁은 건틀릿에 “가이아의 심장”을 각인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3일의 시간을 걸쳐 결국 성공했다.

    꽤 민감하고 정교한 작업이었다.

    오른손에는 라테의 심장이, 왼손에는 가이아의 심장이.

    그의 건틀릿은 에고 장비이자 두 개의 원소의 근원적인 힘을 다스릴 수 있는 엄청난 스탯의 장비가 되어 버렸다.

    가장 기뻐한 것은 라테였다.

    라테가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심장은 가이아의 심장이 온전히 감싸 주고 있었다.

    든든한 대지의 정령왕의 갑옷 안에 또 한 겹의 보호막이 생긴 것이다.

    감히 어떤 마법도 쉽게 그의 심장을 노릴 수 없으리라.

    설사 그런 일이 닥친다 해도 라테가 사력을 다해 막아 낼 것이다.

    엘라는 못마땅하다는 듯 라테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제 라테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가 기분이 좋을 때마다 올라가는 대장간의 온도에 불쾌함을 가끔 표할 뿐이었다.

    얼마 전 각인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때의 정혁에게 엘라가 다가와 이런 물음을 던졌다.

    “혹시…… 아니, 혹시 말이야. 녹턴 님도 네가 이렇게 에고 장비로 만들 수 있어?”

    그녀의 물음에 정혁은 그만 화염 망치로 자신의 엄지를 내려칠 뻔 했다.

    집중이 흐트러진 정혁의 손길을 느끼고 조가 가까스로 그의 망치를 막아 줬기에 사고를 면했다.

    정혁이 일그러진 얼굴로 엘라를 돌아보았고 엘라는 그의 시선에서 살기를 느껴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 망치질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날카로운 척은.”

    민망함을 느낀 엘라가 툴툴거리듯 말하자 정혁이 더욱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네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자연의 어머님의 심장을 각인 중인데 막 해? 그럼 막 어? 막 집어던져? 그냥 막 다 깨 부술까? 어?”

    정혁은 모루 위에 놓인 가이아의 심장이 반쯤 안착된 건틀릿을 집어 들고 다소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고 그의 급발진에 엘라가 더욱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조 역시 놀라서 행여나 건틀릿에서 심장이 떨어질까 아래에 손을 대고 정혁의 거친 손길을 따라다녔다.

    “아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닥칠게! 아! 닥치면 되잖아!”

    울상이 된 엘라가 소스라치며 소리치자 정혁은 한쪽 눈썹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다시 등을 돌려 작업에 착수했고 엘라는 거의 쭈구리가 되어서 대장간 한쪽으로 사라졌다.

    수도 없이 입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엄청난 욕을 쏟아 내고 있으리라

    뭐, 욕하고 있는 것은 엘라뿐 아니라 자신을 거칠게 다룬 데다, 가이아의 심장마저 위험하게 만들 뻔한 정혁의 행동을 본 라테도 마찬가지였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라테와의 전음을 차단했다.

    조는 큰 숨을 내쉬며 다시 그와 작업을 이어갔다.

    오아시스에 더는 나타나지 않을 엄청난 장비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은행나무 엘프 왕국까지 하루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고된 몸을 재정비하기 위해서 어떤 작은 도시의 여관을 찾은 정혁은 바깥에 히포그리프를 묶어 두고 고생한 녀석에게 근처에서 잡은 작은 짐승들을 던져 주었다.

    여관은 조용하고 깔끔했다.

    도착할 때가 이미 해질녘이어서 정혁이 짐을 풀고 씻은 뒤 침대에 눕자 하늘은 밤과 저녁노을의 경계 사이에 걸려 있었다.

    정혁은 누워서 엘라가 물었던 물음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에게 가장 핵심 스킬은 히든 스킬인 에고 장비 제작일 것이다.

    제한된 횟수가 있고 대상의 승낙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말고는 사실 제대로 알고 있는 것도 없는 스킬이다.

    스킬 창을 열어 봐도 식별할 수 없다.

    그의 스킬 창엔 전투 스킬이라곤 하나도 없다.

    다 제련과 제작에 관련된 스킬들뿐이다.

    다만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칭호가 세 개나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해당 칭호마다 각자의 특별한 능력들이 부가되어 있다는 것.

    더불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대장장이’라는 칭호만 식별된다는 것.

    그의 전투 방식은 모두 채광 작업의 일환으로 부여되는 특수한 능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와 연계된 ‘염제’ 칭호를 통해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전투를 벌일 수 있다.

    만약 이것도 이전의 ‘한’이었을 때 경험이 없었다면 빛 좋은 개살구였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두 제련 망치를 잘 사용할 수 있는지, 채광 활성화를 통해 비약적으로 증가한 신체 능력을 효율적으로 전투에 적용할 수 있는지, ‘염제’라는 칭호 능력을 빠르게 분석하고 적시적지에서 더욱 파괴적인 힘을 뽑아낼 수 있는지.

    이 모든 과정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빠르고 자연스럽게 정혁의 몸에 녹아들었다.

    일개 대장장이였다면 절대 불가능할 일.

    그러나 이런 능력들이 있는 정혁도 히든 스킬만큼은 쉽게 분석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 스킬에 제일 핵심은 발동 조건이다.

    채광 활성화 역시 근처에 채광이 가능한 물질만 있다면 언제든 활성화시킬 수 있다.

    다만 해당 물질이 전설급 재료로 대장장이가 탐낼 만한 재료여야 더욱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는 대지의 정령왕의 잔해로 이루어진 염구의 특수한 조건 덕분에 상시 발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라테와 함께 지내며 염구는 총 8개로 다시 늘어났다.

    그러나 히든 스킬의 발동 조건만큼은 오리무중이다.

    직감적으로 에고 장비가 될 수 있는 대상을 정혁이 선택할 수 있다기보다도 미리 선택 되어진 대상을 정혁이 에고 장비로 만들어 가는 느낌이 강했다.

    남은 세 개의 자리도 이런 흐름으로 간다면 과연 그의 원대한 계획인 고대룡을 에고 장비로 만들어 버리는 계획 역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정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만약에, 진짜 만약에 고대룡을 에고 장비로 만들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 신놈 면상에 주먹질 한 번은 가능하지 않을까? 나머지 에고 장비들을 모두 갖추게만 된다면 주먹질 한 번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아니지, 라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신이라는 놈은 훨씬 더 강한 놈이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이 마음속의 울분이 풀어질까.

    정말 랭킹 1위가 된다면 이 몸이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될까? ‘한’은 부활할까?

    어쩌다 보니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 들어가자 정혁은 한없이 마음이 공허해짐을 느꼈다.

    정혁은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도 여건도 다르다.

    여기서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과 같다.

    이런 조건 하나만으로도 매 순간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아, 충분히 무모했다고? 성격상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고.

    그는 창밖에 하나 둘 고개를 드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안나에게 전달받은 소식에 따르면 제논 연합은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김창수의 지도 아래 많은 전사들이 양성되고 다방면에서 팀장들의 활약과 함께 힘을 키워 가고 있다.

    라테에 대한 소식은 아직 안나에게 전하지 않았기에 제논은 그의 한층 강력해진 능력을 전달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늬안은 그에게 범접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는 벌써 꽤 오래전 이야기인 그녀 앞에서의 수모를 떠올렸다.

    두 자루의 대도를 들지도 못했던 수치스러운 자신이 이제는 정령왕과 엔트를 거느린 엄청난 플레이어가 되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이 정도로 멈출 걸음은 아니다.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

    이제 다시 잠이 드려는 찰나.

    정혁은 여관 1층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바깥에서도 여러 말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피곤했지만 직감상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혁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목을 돌리고 어깨를 풀었다.

    “그래, 쉬는 것도 사치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걸어 두었던 가죽 외투를 걸쳐 입고 단단히 조였다.

    냄새가 난다.

    안티아구아.

    독특한 재료를 건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그들만의 특별한 조미료의 냄새다.

    정혁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염구를 펼쳤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다섯의 시체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크, 이 쓰레기들이.”

    정혁의 두 손에 불타는 망치와 전력의 망치가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여관 전체를 박살 내며 라테가 등장했고 열기와 화염에 터져 오르는 여관의 잔해 사이로 엘라의 은행잎이 완전히 정혁을 보호하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가자.”

    그의 말과 함께 엘라와 라테는 어둠 속에 진군한 아크의 군대 앞에 응전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