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60화 (60/200)
  • ◈60화

    대지의 정령왕 가이아는 모든 존재들의 발아래에 있었기에 겸손했고 모든 생명을 품었기에 자애로웠으며 오아시스의 심장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단단했고 세계의 모든 소식을 들었기에 총명했다.

    그녀는 이 지시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미 물과 바람, 두 정령왕은 이 지시에 화답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느껴 불의 정령왕인 라테를 찾아온 것이었다.

    라테에게도 이 불쾌한 지시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신밖에 없다.

    그에게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그렇다면 신의 의지일 터.

    그럼에도 라테는 이 옳지 못한 명령에 도의적으로 따를 수 없어 자동적으로 반응하려는 의지를 꾹꾹 누르며 참고 있었다.

    가이아는 불안해하는 라테를 마주하고 그를 안아 주었다.

    불타오르는 라테를 안을 수 있는 존재는 그녀가 유일했다.

    곧 그녀는 라테에게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을 건넸다.

    “가이아는 나를 찾아와서 목소리에 대해 물었다네. 이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야. 나는 불쾌하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네. 그리고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지. 바람과 물의 정령왕이 파멸의 길을 걷기 전에 내가 홀로 그 길을 감당해 줄 수 있겠냐고 말이야.”

    엘라의 표정이 살짝 불쾌해졌다.

    “그 말은 녹턴 님께서 이 세계의 파괴를 지시하는 목소리에 동의하셨다는 말이야?”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라테는 여전히 동일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는 그랬다네. 그들에게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시간, 고요했던 그 긴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강하면 강할수록 항상 공허함과 싸워야만 한다네. 인간으로 따지면 산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찬바람을 맞으며 계속해서 서 있어야 하는 것과 같지. 존재에 의미를 찾고 싶으며 더 올라가고 싶어지지만 이는 곧 다른 집단과의 전쟁을 뜻하기 때문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뿐.”

    정혁은 잠시 자신이 랭킹 1위였을 때 했던 무수히 많은 악행들을 떠올렸다.

    과거 어른들에게 들었던 소위 온라인 RPG 게임에서는 만렙이라는 것을 찍고 나면 할 것이 더이상 없어서 부캐릭터 같은 것들을 키우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오아시스는 시스템상 부캐릭터를 키울 수가 없다.

    정혁은 결국 세상을 헤집고 다니며 자신의 흥미를 북돋아 줄 요소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 방향이 이상하게 꼬여서 자신의 내면에 진정한 목적이었던 게임다움의 실현을 괴이하게 반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미 두 정령왕이 이에 동의해서 실천에 옮겼다면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오아시스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말았겠지. 그들이라도 막아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가이아의 부탁을 받아들여 스스로 파괴의 신이 되기로 했다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태우고 파괴하고 망가트렸지. 인간들과 다른 종족들은 나를 증오하기 시작했고 이는 다른 존재들에게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해 주기 시작했어. 그 과정에서 나는 종종 이 과정의 본질을 잊을 때도 있었지. 말 그대로 파괴 행위에 취한 잔혹한 나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는 말이야.”

    그 이후로 대지의 정령왕은 모든 사태에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바람과 물의 정령왕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특히 극상성이었던 물의 정령왕은 주변의 도움을 구하며 불의 정령왕의 만행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존재의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 이후로 종종 그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을 때 가이아가 그를 찾아왔다.

    잠시의 시간 동안 가이아를 통해서 안정을 찾으면 그는 다시 세계가 증오하는 파괴의 존재가 되어 대륙의 이곳저곳을 공격했다.

    인간들도 다른 종족들도 그를 없애기 위해 혈안이었고 이는 그들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그 사이에 목소리는 잦아들었지. 우리는 자유로워졌지만 나는 나의 과업을 이어 가야만 했네. 혹여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릴까 봐 말이야.”

    잠시 라테의 긴 호흡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금은 침체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놈이 나타났네.”

    ‘아차.’

    정혁은 그가 누구를 이야기 할지 알고 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며 인상을 구겼다.

    “어느 날 가이아가 내게 말했다네. 우리의 긴 여정을 끝내 줄 존재가 나타났다고 말이야. 그리고 우리의 여정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며 이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될 거라고 강조했네. 더불어 슬프지만 이 여정에서 자신의 역할은 조만간 마무리될 거라고 했지.”

    가이아는 항상 아리송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라테에게 어떤 인간이 그들을 찾아올 것이며 그들은 그 앞에 굴복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것이 옳은 길이며 진정한 신의 계획이라고 말이다.

    상세한 설명은 없었고 왜 그래야만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라테는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라테는 어둠 깊은 곳으로 가이아의 심장을 안은 채 봉인당했다.

    싸울 의지는 없었다.

    애초에 가이아가 그를 말렸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분위기에 맞춰 주며 치명적인 공격들은 펼치지 않았다.

    그녀의 계획대로 라테는 그곳에서 기약 없는 결말을 맞이했다.

    물의 정령왕의 힘이 깃든 각인석은 라테의 힘을 완전히 봉인했고 만약 봉인된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그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잠시의 순간 그에게 전달된 대지의 정령왕의 심장이 각인석의 모든 힘을 흡수하며 그를 보호했기에 라테는 자신의 힘을 잃지 않은 채 각인석에서 잠들 수 있었다.

    더불어 라테의 심장도 가이아의 보이지 않는 잔해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그간에 있었던 모든 파괴적인 행보는 어쩔 수 없는 자기희생의 결과였다?”

    엘라가 콧방귀를 뀌면서 한마디 던졌다.

    라테는 그녀의 말에 뭐라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침묵하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혁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인벤토리에서 초록빛으로 영롱히 빛나는 광물 조각 하나를 꺼냈다.

    조각이 눈앞에 보이자마자 라테도 엘라도 동시에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정혁 앞으로 총알같이 달려 나왔다.

    “그, 그걸 어떻게!”

    엘라가 탄성을 지르며 외쳤다.

    라테가 손을 뻗어 광물 조각을 만지려 하자, 엘라는 격노하며 라테를 밀쳐 냈다.

    다행히 그의 열기는 주변을 따뜻하게 만들 정도여서 엘라의 피부에 어떤 손상도 입히지 못했다.

    그녀가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할 만큼 정혁의 손에 있는 이 조각은 그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엘라가 라테를 경계하며 당장에라도 정혁의 손에서 그 조각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러나 정혁은 어림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조각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뒤쪽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아 달라는 시늉을 했다.

    라테는 순순히 그의 의지대로 따랐으나 엘라는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라테의 곁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잘 들어.”

    정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라테에게는 라테만의 사연이 있었어.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엘라, 네게 맡기겠지만 적어도 나는 믿음이 간다고 생각해.”

    돌이켜보니 그랬다.

    당시 정혁은 스스로의 강함에 도취되어 있어 착각했던 것 같다.

    라테는 정혁과 계약을 하며 에고 장비로 변하는 순간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금의 그의 기운으로 비춰 보면 그날의 일은 말이 안 된다.

    아무리 물의 정령왕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그의 힘을 빌렸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쉽게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라테가 그를 완전히 봐주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어. 우리의 힘을 노리는 자들이 있고 또 지켜야 할 자들도 있으며 나 역시 아직 남은 여정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분란을 안고 계속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

    정혁의 말에 엘라의 눈썹에 성남이 다시 깃드는 듯 했다.

    “넌 몰라. 저 자식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엘라의 말에 정혁이 라테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조그마한 라테가 그 작은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저 엔트의 고향을 묵사발 냈었네.”

    ‘아.이건, 좀. 야 그리고, 단어 표현을 잘 하지, 좀. 묵사발이 뭐냐, 묵사발이…… 지금 이 상황에…….’

    엘라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이젠 정혁에게도 얼굴을 돌린 상태였다.

    “아무리 저자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자연의 어머니 가이아께서 저자와 그런 관계였다고 해도. 내 가족과 내 전부를 파괴한 저자를 나는 용서할 수가 없어.”

    “엔트여, 비록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가 자주 있었지만, 그날의 파괴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네.”

    라테의 대답에 엘라가 의자를 집어 던지며 일어섰다.

    그녀는 라테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섰다.

    충분한 위협을 느꼈을 그였지만 라테의 온도는 더 올라가지 않았다.

    그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가이아는 총명했다네. 그녀의 계획에는 빈틈이 없었고 이는 곧 우리가 모셨던 신의 의지와 맞닿아 있었네. 지금 우리의 여정 역시 계획 안에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있어. 만약 그날의 사건이 없었다면 자신의 군락지를 사력을 다해 지키며 만 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 낸 고대 은행나무 엔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겠지.”

    엘라는 여전히 증오 섞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뭐라 대꾸하진 않았다.

    모든 나무가 엔트가 되지는 않는다.

    나무는 나무들끼리 대화가 가능하지만 나무가 엔트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의 문제다.

    내면에 열망과 의지가 담겨야 하고 그것이 스스로 마나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한 단계 더 변화시키는 뼈아픈 과정을 겪어 내야 한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나무들은 그저 조용히 그 땅에서 살아간다.

    엘라는 과거 가족을 잃었기에 군락지에 집착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많은 은행나무들과 그들을 섬기는 엘프들을 지키기 위해서 열망은 한층 강해져 그녀를 엔트로 변화시켰다.

    열망의 깊이는 더욱 깊어졌고 그만큼 강해졌으며 그만큼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대지의 정령왕 가이아의 심장이 요동칩니다!]

    순간 정혁은 자신의 눈앞을 가리는 상태 창에 놀라 그것을 걷어 냈다.

    일전에 물음표로 확인되었던 아이템의 이름이 “가이아의 심장”이라고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넣어 둔 광물 조각을 꺼냈다.

    아까와 확연히 다른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정혁이 손을 놓자 공중에 붕 떠올라 천천히 엘라에게 다가갔다.

    빛은 엘라를 감쌌다.

    마치 그 빛이 엘라는 위로하는 것 같았다.

    엘라의 주위를 광물 조각이, 아니 가이아의 심장이 물 흐르듯 천천히 돌았다.

    엘라의 시선은 그녀의 심장을 따라 움직였고 자신을 감싸는 빛 속에서 묘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라테 역시 그리움을 띤 얼굴로 그녀의 심장을 바라보았다.

    엘라는 일전처럼 그것을 쥐려는 시도를 하진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심장은 다시 정혁의 손으로 돌아왔고 엘라는 고개를 숙이며 라테의 앞에서 물러났다.

    마치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전부 해결된 것만 같은 기분으로 정혁은 심장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엘라는 정혁에게 자신을 장비화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스스로 원해 스태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라테는 조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했고 조는 긴장된 표정으로 라테를 따라 대장간의 대화로로 향했다.

    마치 동네 건달에게 끌려가는 불쌍한 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저 건장한 덩치가 저렇게 긴장할 수 있다니 그것도 그것대로 신기했다.

    정혁은 그의 대장간에서 다시 세계로 돌아왔다.

    바깥은 어느새 밤기운이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제 한숨 돌리려는 그에게 마치 그가 이공간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급박한 전음이 머리를 울렸다.

    [정혁 님! 저 박달숩니다!]

    ‘제기랄, 쉴 틈을 안주는 군.’

    정혁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그의 전음에 응답했다.

    [제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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