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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59화 (59/200)
  • ◈59화

    정혁은 손을 탁탁 털었고 데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존심이 상당히 구겨진 모양.

    그러나 어쩔 수 있나.

    힘의 세계에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정혁에게 무례했던 만큼 갚아 주는 수밖에.

    민망한 정적이 흘렀다.

    잠깐의 만남이지만 상당히 임팩트 있는 순간이리라.

    자유 연맹에는 공식 지도자가 없다.

    말 그대로 모두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일념 아래 세워진 연맹이기 때문에 여러 세력들이 하나의 깃발로 규합되어 있으며 각 세력의 대표가 연맹의 의회원이 되어서 중요한 사안들이 있을 때 모여 토의하고 합리적인 대책을 강구한다.

    그래도 권력이라는 것은 어디든 존재하는 법.

    데릭은 어떤 세력의 대표도 아닐 뿐 아니라 순수하게 자유 연맹의 본부 성채에서 자유 연맹 전체를 아울러 보는 의회장의 역할을 감수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자유 연맹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위치에 있는 남자가 제논 연합의 지도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카탈 대륙에 대서특필이 날 만큼 엄청난 사건임은 틀림이 없다.

    정적을 깨고 입을 먼저 연 것은 정혁이었다.

    “일단 돕겠습니다. 나름 자극적인 미끼를 던지셨으니 물어봐야 피가 날지 안 날지 알 것 같거든요.”

    정혁은 아린이 걱정되었다.

    아린이 국왕이 되고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다.

    전란의 불길은 어디서든 같은 종족과 국가를 단결시키는 법이다.

    잠깐이지만 예언의 모습을 보여 준 아엘프 아린에게 국왕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은행나무 엘프들이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강력한 힘과 능력은 더불어 이 불안한 시기에 큰 방패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국왕이야말로 백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비춰질 것이고 편견과 색안경을 걷어 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병력을 물린다는 것은 어떤 큰 이유가 있을 진데.

    문득 정혁은 아린과 함께했던 기억 중에 약간은 불편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혹시나 그것이 이유라면.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리 긴 시간을 살지 않은 아직은 어린 아린에게 정혁이 짐작하는 일이 펼쳐졌다면 아린의 입장에서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논의 병력들도 합류합니까?”

    정혁의 생각을 뚫고 데릭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데릭은 안경을 살짝 올렸지만 시선을 그와 마주치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 혼자 갑니다.”

    데릭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신뢰가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정혁이 다시 말하자 데릭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좀 쉬고 싶습니다. 양해해 주시겠습니까?”

    통보에 가까운 정혁의 부탁에 데릭이 무언으로 승낙했고 정혁은 뚜벅뚜벅 잭슨의 사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데릭은 큰 숨으로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다양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불쾌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그러다가 공포심이 밀려와서 몸서리도 쳤다.

    왜 잭슨이 사택으로 향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정말 이들이 정령왕을 잡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아무리 날고 긴다는 잭슨이지만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론 ‘정혁’이라는 남자와 함께 라테를 쓰러트릴 수는 없을 거라 판단했다.

    잭슨에게 맡긴 임무는 ‘정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실질적인 사실 확인 정도였는데.

    충격적인 결과를 직접 눈앞에서 보고 나니 숨이 계속 턱 막혀 사고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만약 그때 무릎을 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자신의 눈앞에 급소를 정확히 노리고 떠 있는 타오르는 염구와 금방이라도 사방을 파괴시킬 것만 같았던 두 거대한 존재의 모습이 생생하다.

    데릭이 잠시 휘청거렸고 잭슨은 그를 재빨리 부축했다.

    “저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두 빠짐없이 보고하셔야 할 겁니다.”

    데릭의 말에 잭슨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부축해 걸으며 사택을 빠져나왔다.

    ***

    정혁은 손에서 건틀릿을 벗어 바닥에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전음은 모두 차단된 상태.

    엘라는 스태프로 변해 일단 대장간에 처박혀 있는 상태일 것이다.

    좌우측에서 일어난 무지막지한 두 존재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정혁은 막막했다.

    그는 간단히 짐을 풀고 양반다리를 하며 바닥에 놓인 건틀릿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테야 그를 호출했을 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 당연했지만 엘라의 경우는 예상 밖이었다.

    이는 정혁의 입장에선 그녀가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는데 아마 더 이상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까지 도달한 듯했다.

    정확히는 라테와 한바탕해 보려는 심산으로 거대 엔트의 모습을 갖췄으리라.

    ‘하긴, 그런 덕분에 자유 연맹에게 확실히 눈도장 찍어 줄 수 있긴 했지.자, 그럼 누구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정혁은 대장간을 열어 일단 그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조 패더럴이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조의 손에는 엘라가 쥐어져 있었다.

    “이거 막 던지고 그럴 만한 물건은 아니지 않나?”

    정혁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스태프를 받아 들었다.

    이만큼 차가워졌던 적이 없었는데 유난히 손 안에 들린 스태프는 낯설 정도로 차가웠다.

    정혁은 조심스럽게 엘라와의 전음을 개방했다.

    아무런 말이 없다.

    오히려 이게 더 정혁의 마음을 어렵게 만들었다.

    [저기여.]

    정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어떻게 할까.

    만약에 여기서 장비화를 해제했다가 엔트 상태로 거대해지기라도 하면 낭패다.

    [엔트의 모습 말고 친숙한 그 모습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란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정혁은 조에게 조금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한 뒤 엘라의 장비화를 해제했다.

    스태프가 빛을 발하다가 천천히 모습을 바꾸고 엘라는 어느새 저편에 있던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라도 집어 던지거나 혹은 주먹이라도 날아올까 싶어서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던 정혁은 더욱 소름이 돋아 그녀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몇 대 맞는 편이 속 편한데 이렇게 뚱한 모습으로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하는지.

    그 순간 정혁의 손에 갑작스럽게 건틀릿이 형상화되기 시작하더니 온전히 양손에 안착했다.

    그리곤 뜨거운 열기가 손에 가득 쥐어졌는데 이는 마치 자신도 장비화를 해제해 달라는 요구 같았다.

    정혁은 그와의 전음을 개방했고 라테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왔다.

    [난동 피우지 않을 테니 풀어 주게.]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방법이 있나.

    정혁이 장비화를 마찬가지로 해제하자 엘라와 비슷한 크기로 변한 조그마한 화염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그맣게 변하니 오히려 귀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난데없는 라테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조였다.

    조는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정혁을 쳐다보았고 정혁은 가만히 손가락을 치켜들어 입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조에게는 이미 당부했다.

    정혁의 본래 모습을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의 정체를 함구해 달라고 말이다.

    라테는 엘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그 빌어처먹을 대장장이군.”

    라테에게도 강철 망치의 기억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조에게 조용히 다가가 한 바퀴 휙 돌고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죽은 자인데 신기하게도 이곳에서는 마치 산 자 행세를 하고 있네.”

    조는 라테가 다가올 때 참았던 숨을 겨우 뱉었다.

    그리곤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라테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엘라에게 다가갔다.

    엘라는 그의 기척을 느끼고 불쾌하다는 느낌의 마나를 사방에 뿌려 댔다.

    그러자 라테가 움직임을 멈추고 팔짱을 끼며 엘라를 바라본다.

    ‘무슨 애들 싸움을 지켜보는 느낌이냐.’

    정혁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 둘의 행동을 살필 뿐이었다.

    문득 라테가 정혁을 돌아보았고 정혁은 갑자기 마주친 눈에 실없는 미소를 보냈다.

    “한솥밥을 먹을 사이가 될 줄은 몰랐지.”

    라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엔트와는 나름 사연이 있기 때문에.”

    흥미진진.

    “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자네도 알아야 되는 일일세. 이는 이 세계의 어두운 비밀과 연관이 있는 일이니 말이야.”

    라테의 이야기는 이랬다.

    오아시스의 신은 오아시스를 창조했다.

    본디 하나의 대륙이었다가 대지진으로 인해 대륙 한 조각이 분리되어 나왔는데 이 분리된 조각이 조금 더 커져 지금의 카탈 대륙이 되었다.

    두 개의 대륙에는 여러 종족들이 번영을 이루었는데 제일은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오아시스의 생명에 유익이 되고자 신은 그들 위에서 그들의 삶을 도와줄 여러 강력한 존재들을 만들었는데 이 존재들이 정령왕들과 태초의 용, 그를 통해 뻗어 나간 용 군단이었다.

    더불어 선과 악의 분배를 위하여 천계와 마계를 만들고 각각 대천사장과 악마왕을 세워 천계와 마계의 법칙과 규율을 제정했다.

    이 시기에 창조된 라테는 다른 정령왕들과 협력하여 원소들의 힘을 더욱 발전시켰고 인간들에게 불은 강력한 힘이 되고 때로는 방패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 가치를 부여했던 신의 목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기간이 오래되자 천계도 마계도 용 군단과 정령왕들도 서서히 대가 없는 봉사에 지쳐 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들이 다스리던 오아시스 땅 아래 작은 생명들의 교만과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태초의 용은 모습을 감추었고 이와 함께 용 군단의 다섯 지도자 역시 자신들의 군단을 이끌고 세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알게 모르게 인간들이나 다른 종족들의 역사에 관여하며 살아갔다.

    그러다 스스로 생을 포기하며 산이 되고 거대한 바위가 되었다.

    천계와 마계에서는 끊임없는 대립과 전쟁이 벌어졌고 무수히 많은 악마들과 천사들이 죽어 나갔다.

    정령왕들은 침묵했다.

    그저 억겁의 시간 동안 오아시스의 신이 다시 이 땅에 도래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이들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신의 목소리와는 달랐던 이 불쾌한 목소리는 용 군단의 지도자, 대천사장, 악마왕에게 괴이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정령왕들에게도 동일했다.

    목소리는 세계의 분열과 파괴, 증오와 욕망을 가중시켰다.

    악마왕은 두 팔 벌려 이 지시에 순응했다.

    그는 신이 드디어 제정신을 차리고 돌아왔노라 외치며 마계에서 환호했다.

    대천사장은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목소리의 지시를 실천하지 않았으며 천계에서 더 이상 오아시스의 존재에게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용 군단에서는 이 지시 앞에 격렬한 내전이 벌어졌다.

    이는 곧 용 군단의 파멸을 불러 일으켰다.

    정령왕들 역시 이 지시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에게도 움직임의 낌새가 느껴질 때 쯤 대지의 정령왕이 라테를 찾아오게 된다.

    “그녀는.”

    정혁은 묵묵히 라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끊긴 부분에서 고개를 들어 라테를 보았다.

    어느새 엘라도 라테를 보고 있었다.

    라테의 얼굴에서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늘 총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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