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57화 (57/200)
  • ◈57화

    위협적인 한마디와는 다르게 정혁은 몸을 뒤로 물렸다.

    여자는 정혁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찰나를 이용해 그와 거리를 벌리려 잠행을 시도했다.

    애처로운 발버둥일 뿐.

    라테의 엄청난 불길이 그녀의 사방을 둘러싸 버렸고 여자는 졸지에 화염 감옥에 갇힌 꼴이 되어 버렸다.

    잭슨이 격한 숨을 진정시키고 정혁을 바라보았다.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일부러 그녀에게 기회를 준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스크에 I.”

    정혁이 불길 속에서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여자를 가만히 뜯어보며 중얼거린다.

    찬찬히 살펴보자 그녀의 찢어진 바지 종아리에 새겨진 검은 말 문양의 한 부분이 보였다.

    “검은 말까지.”

    일전에 정혁이 성채에서 만났던 그 재수 없는 녀석과 같은 집단 소속이다.

    그 녀석이 H였고 지금 이 여자는 I다.

    이 알파벳 이니셜이 그들 각자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인지, Z까지 이어지는지는 몰라도 어찌 되었건 의도적으로 정혁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게 입증된 셈이다.

    물론 더불어 그들이 상당히 정혁을 아래로 깔보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라테, 화염을 거둬 줘.”

    그의 말에 라테는 주변의 모든 화기를 자신의 몸으로 흡수했다.

    순식간에 주변의 온도가 떨어졌고 메케한 화염의 냄새까지 사그라들었다.

    그녀를 둘러싸던 화염 감옥도 지면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여자는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 듯 또 한 번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진 않았다.

    정혁은 주저앉아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한 손에 화염의 망치를 소환해 쥐었다.

    몸을 숙여 그녀의 눈높이에 맞게 앉는다.

    겁을 먹은 눈동자? 아니다.

    뭐랄까, 의도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에 침전한 눈이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곤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살려 보내 주지.”

    여자의 눈에 동요는 없다.

    “꼭 가서 너희 어르신들에게 전해 줘. 적당히 까불고 진심으로 덤비라고.”

    정혁의 말과 함께 여자의 전신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모욕적이었을까? ‘그럼 한 수 더 해 주지.’ 하는 생각으로 정혁은 검은 말 문양이 새겨져 있는 다리의 발목을 잡고 당겼다.

    별다른 반항은 없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검은 말의 거침없는 기상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는 그 문양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화염 망치를 한 바퀴 돌려 뜨겁게 가열 시키고는 그대로 종아리에 대고 지져 버렸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경멸의 시선이 맹렬하게 정혁의 얼굴로 내리꽂혔다.

    살이 지져지는 동시에 연기가 작게 피어오른다.

    망치를 떼자 검은 말은 온데간데없고 심한 화상 자국만 남아 있었다.

    잭슨은 그 광경에 인상을 찌푸리며 정혁의 행동을 살폈다.

    정혁은 그녀의 종아리를 지질 때와 다름없이 계속해서 그녀의 두 눈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고야. 다음엔 아니.”

    정혁은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망치는 사라져 있었다.

    “다음은 없어.”

    그의 말과 동시에 여자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사라지는 기척이 작게 느껴진다.

    라테도 잭슨도 동일하게 느꼈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여자와 동행했던 두 명의 다른 괴한들의 시체 또한 사라지고 없다.

    정혁은 잭슨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찌 되었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네요.”

    잭슨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허허 웃으면서 그가 건넨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시간제 아이템이었던 녹턴의 반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정혁에게야 이제는 필요가 없어진 반지이지만 잭슨 입장에서는 참 아까운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라테는 이제 따뜻한 수준의 불길을 전신에 두르고 정혁의 키의 반만큼 작아져 그의 뒤에서 둥둥 떠 있었다.

    정령왕에게 쓰기는 뭐한 표현이지만 작아지니 한편으로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눌 대화가 참 많네요.”

    잭슨의 말에 정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화도 많고 저 스스로 정리해야 할 일들도 많습니다. 바로 이동하실 건가요?”

    “그럴까요? 피곤하실 텐데 히포그리프를 부르겠습니다.”

    “아, 그러려면.”

    [라테,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굉장히 불쾌한 순간이 지금 펼쳐질 거야. 준비됐어?]

    정혁이 라테에게 전음을 보냈다.

    라테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도도하게 대답했다.

    [불쾌라니. 어떤 것도 나를 불쾌하게 만들 수 없다. 태워 버리면 그뿐.]

    ‘자식, 이건 진짜 불쾌할 텐데.’

    정혁이 실소를 남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건틀릿”

    그러자 라테가 빠르게 정혁의 양손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의 괴랄한 비명과 함께 말이다.

    따뜻한 온기를 지닌 한 쌍의 타오르는 건틀릿이 정혁의 손에 완전히 안착했다.

    엘라가 스태프로 변할 때는 공중에서 누군가가 잡아 주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부유하며 서 있었는데 라테는 그에게 귀속된 건틀릿답게 장비화가 되면 그의 두 손에 자연스럽게 장착되는 모양이었다.

    말이 건틀릿이지만 그렇게 크게 타격에 맞춰져 있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탄탄한 판금 재질의 장갑이었는데 두껍지도 않아서 오히려 대장간에서 실질적인 작업을 할 때 더욱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붉은 색상에 옅은 화기가 맴돌고 오른손 손등에는 라테의 심장의 타오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왼손 손등에는 검고 동그랗게 구멍 난 빈 공간이 있었다.

    정혁은 그곳에 무엇을 각인해 줘야 할지 단박에 감이 왔다.

    그리고 곧이어 라테의 노발대발 고함과 욕지거리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으나 이미 엘라는 통해 노하우가 가득 쌓인 정혁은 전음 차단이라는 아름답고도 완벽한 스킬을 사용하며 조용히 라테의 착용감을 즐길 수 있었다.

    “이제 아마 히포그리프들이 완전히 우리에게 올 수 있을 겁니다.”

    정혁의 말에 다시 한번 정신 줄을 놓았던 잭슨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휘파람 소리가 창공을 가르고 퍼졌다.

    그리고 수분 내로 히포그리프 두 마리가 상공에 나타나더니 이내 재빨리 그들의 곁으로 착륙했다.

    정혁은 능숙하게 히포그리프의 등 뒤에 올랐다.

    “자유 연맹 본부로 갑니까?”

    정혁의 물음에 잭슨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일단 부유성 외곽에 마련된 제 사택에 먼저 모시겠습니다.”

    ‘그렇지.’

    잭슨 입장에서는 최선의 수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자유 연맹의 주력 병력이 전부 북쪽으로 빠져 있는 지금 부유성의 본부 중심에 정혁과 같은 피아 식별이 불가능한 인물을 데려다 놓는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판단이다.

    그들은 의회의 결정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의회의 핵심 인물들과 먼저 이 모든 사건들에게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물론 정혁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히포그리프 두 마리가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바람을 맞으면서 그는 또 한 번 휘몰아친 일련의 사건들과 더불어 조금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라테 덕분에 정혁은 자신을 마주했다.

    그렇게도 그리웠던 자신 ‘한’ 말이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왜곡되었다 해도 생각보다 더 잔인하고 자비가 없는 모습이었다고 느껴졌다.

    더불어 자신의 힘이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 느껴질수록 그 ‘한’의 성격이 자꾸만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 기분은 정혁을 상당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방금 전투에서도, 마스크를 쓴 ‘I’라는 여자를 경고차 살려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까지 해야만 했을까? 모르겠다.

    강한 놈만이 살아남는 이 당연한 게임 속 섭리를 늘 지키며 살아온 ‘한’과 지금 직업에 갇혀 대장장이로서 살아야만 하는 삶의 괴리에서 정혁은 자꾸만 어느 쪽이 정답인지 고민하게 된다.

    솔직히 지금의 힘으로는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더불어 어쩌면 앞으로 나머지 3개의 에고 장비를 완전히 가지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에 최고 등급의 랭커들과 겨뤄봐도 손색 없을 정도가 될지 모른다.

    랭킹 1위? 이제는 가능성이 충분히 보일 정도니 말이다.

    칭호를 하나밖에 가질 수 없는 시스템의 제약을 깨고 에고 장비가 생길 때마다 칭호가 추가 부여.

    심지어 사라졌다는 에고 장비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고유 스킬, 오아시스의 대장장이라는 칭호 아래 숨겨진 ‘오아시스’의 의미, 또한 그것을 숨기고 있는 자들의 정체.

    왜일까?

    ‘한’이었던 정혁이 단순히 신에게 도전했기에 절대적 패널티를 먹었다면 왜 신은 실제로 패널티가 아닌 더 효율적인 어드밴티지를 그에게 주었을까.

    직감적으로 이면에 아직 밝혀내지 못한 목적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자꾸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혁은 다시 다짐한다.

    이번만큼은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정혁은 자신이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절대 힘으로 찍어 누르며 지켰던 평화가 공백의 3년간 어떻게 뭉개졌는지 느끼고 있다.

    게임 속 세상조차 추종자들을 만들고 정신적으로 지배하려 드는 세력들의 난동, 끊임없는 분쟁과 영토 전쟁, 소수 부족들의 파멸과 분열.

    이제는 정말 하나의 거대하고 순수한 힘의 고리를 이어서 오아시스라는 게임이 게임다울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그 속에서 정혁은 당당히 랭킹 1위가 될 것이고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씻어 낼 것이다.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정혁의 옆에 갑자기 황금빛 마나가 일더니 이공간의 포탈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깜박하고 있었던 존재의 주먹이 맹렬하게 뻗어 나왔다.

    정혁은 가뿐히 그 주먹을 피하고는 팔을 잡으려다가 빠르게 뒤로 뺐다.

    엘라가 ‘어쭈’ 하는 표정으로 이 공간에서 튀어나왔다.

    갑자기 뿜어져 나오는 자연의 기운에 히포그리프가 즐거운지 작게 소리를 냈다.

    그러나 정혁의 입장에서는 가히 지옥과 가까운 순간이었다.

    엘라는 팔짱을 끼고 어디 지껄여 보라는 듯 정혁을 노려보았다.

    정혁은 건틀릿을 찬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면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뭐, 그, 그렇게 돼, 됐어.”

    “그렇게 됐어어어?!”

    그의 말과 함께 공중에서 수차례 엘라의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들었으나 정혁은 놀라운 속도로 그녀의 몸이 건틀릿에 닿지 않게 주의하며 팔과 팔꿈치로 모두 방어해 냈다.

    표정에 완연히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엘라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이거, 칭호 효과가 기가 막히네.’

    정혁은 속으로 감탄하며 잠시 고삐를 놓고 두 손을 들어 올려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지금 엘라가 이 정도의 성깔로 덤벼들고 있다면 혹시.’

    정혁은 전음 차단을 풀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쇄도하는 라테의 한층 더 성숙하고 농익은 욕설에 정혁은 재빨리 전음을 다시 차단했다.

    ‘어휴, 이제 이걸 어떻게 풀어낸다.’

    정혁이 한숨을 쉬는 사이 저 멀리서 부유성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번보다는 훨씬 빠르게 도착한 느낌이었다.

    앞서서 비행하던 잭슨이 흘깃 뒤를 돌아보고는 더욱 빠르게 속도를 올렸다.

    자신을 두들겨 패기 위해 달려드는 엘라의 공격을 수차례 다시 막아내면서 정혁은 최대한 빨리 그의 사택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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