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황금빛 마나가 그의 양 손에서 퍼져 나온다.
라테의 화기와는 다른 따뜻함이 그들을 감싸고 공간을 나누기 시작한다.
일전에 경험한 적 있었던 이 제한된 공간에서 그는 라테와의 마지막 5분을 가졌다.
라테는 이제 정혁보다도 작아졌다.
그의 심장 박동은 눈에 띄게 옅어졌고 호흡도 불길도 잦아든다.
애초에 더 이상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태라면 더욱 안전히 그와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어찌 되었건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일.
그러나 정혁은 계속해서 망설여졌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라테는 주변에 펼쳐진 황금빛 마나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정혁을 바라보았다.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
그의 말에 라테는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더욱 불꽃이 작아진다.
“이유가… 없네. 그 조각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버텼으니 되었어.”
라테의 목소리에서 회한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멈추고 싶은 그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더불어 이제까지 그가 느꼈던 외로움과 고통, 상실감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엘라 때도 정혁은 마치 그녀의 마음과 동기화되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더욱 심했다.
“죽고 싶나?”
정혁이 이빨을 꽉 깨물고 터지는 감정을 참아 내며 담담히 물었다.
라테는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마음을 라테도 동일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산다는 것에 의미를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네.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갔지만 오히려 모욕과 비난 속에서 삶의 길을 걸어야 했지. 사막의 오아시스가 그렇게 달콤하다고 인간들이 이야기하더군. 마치 그처럼 나에게도 그녀라는 쉼터가 생겼었지만 그마저도 빼앗긴 지금은.”
라테가 숨을 한번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네.”
시간이 얼마 없다.
선택은 정혁의 몫이었다.
정혁이 손에 쥐고 있던 정령왕의 마지막 잔해를 바라본다.
“만약에 내가 너의 삶의 이유를 다시 만들어 준다면 어때.”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던 라테가 물끄러미 정혁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곤 그의 손에 붙들려 있는 마지막 잔해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그의 불꽃이 되살아났다가 사그라든다.
“희망은 헛된 바람일 뿐이지.”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 모든 것을 걸어 볼 수 있는 거야.”
정혁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정령왕은 모든 원소의 기본이자 지존.
사라지지 않는 전설.
마지막 잔해만 없어지지 않는다면 대지의 정령왕은 죽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도 반드시 있다는 뜻이 된다.
방법이야 찾으면 그만이다.
가능하다면 질질 물고 늘어지는 것이 그의 특기다.
“다 죽어 가는 의욕 없는 하수인 따위 필요 없거든. 그게 아무리 강한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정혁이 라테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그는 어느새 쪼그려 앉아 있는 어린 불꽃이 되어 있었다.
마치 강한 바람이 불면 꺼질 것만 같다.
이 어린 불꽃은 정혁을 올려다보고 있다.
“나를 오아시스의 랭킹 1위로 만든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 어때?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너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거야”
정혁이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정혁의 손에 황금빛 마나가 넘실거린다.
라테는 이 특별한 마나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일렁이는 화염이 단순한 뜨거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따뜻함도 내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난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선택은 너에게 맡긴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싶거든 나와 함께 가자.”
“희망…….”
라테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작은 오두막에 몸을 숨기고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신의 모습에 씌워진 망나니 쓰레기라는 프레임에도 거리낄 것 없이 분노하고 폭발하는 자신을 진정시켰던 유일한 존재.
희망.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포기했던 희망.
희망이 절망이 되는 순간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왔지만 과연 걸어 봐도 되는 걸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라테는 가만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네모 박스를 바라본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정혁과의 계약을 승낙하겠냐는 시스템 창이었다.
정혁은 여전히 라테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참 따뜻했다.
이어진 감정 속에서 라테는 정혁의 마음속에 있는 알 수 없는 당당함을 깊이 느낀다.
그라면.
지금의 그라면 그녀를.
“불의 정령왕 라테의 머리를 만진 인간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순간 폭발적인 화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동시에 작아졌던 라테의 덩치가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듯 불꽃이 분사되었으며 사방에 떨어져 있던 정령왕의 잔해들이 그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이는 곧 위용 넘치는 그의 갑옷들로 변해 전신을 휘감았다.
끓어오르는 용암 덩어리가 라테의 전신을 감싼 검붉은 갑옷 사이사이로 흐르며 붉게 번쩍인다.
그의 양손은 다시 불길로 타오르고 화염 소용돌이가 다섯 갈래로 용솟음쳤다.
라테는 다시 정혁의 한참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타오르는 눈빛으로 정혁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할 거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이 분리된 공간을 울렸다.
정혁은 씨익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야 말로. 쉽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되겠지만 지금 선택에 후회는 없어야 할 거야.”
“흥. 비록 비참한 몰골을 보게 만들었지만 내가 이 세계의 불이다. 누가 감히 나의 선택에 후회라는 단어를 들이댈 수 있는가!”
라테가 당당히 승낙 버튼을 활성화하자마자 정혁이 밟고 있던 대지가 끓어오르더니 아래서부터 불길이 지면을 뚫고 터져 나왔다.
정혁이 황금빛 마나와 더불어 라테의 화염에 휩싸여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는 공중에서 라테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라테의 눈빛은 이전과 다른 정령왕 본연의 기세로 변해 있었고 정혁은 잠시 그와 눈을 마주치고서 다시 대지로 천천히 내려왔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
그의 고함과 함께 황금빛 마나로 감싸졌던 이공간이 해제되고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화염이 폭발하듯 터져 올랐다.
공중에 흩뿌려진 라테의 화염은 곳곳에서 대폭발을 일으켰고 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화염이 되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아예 존재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버리는 듯했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 두 번째 에고 장비 ‘불의 정령왕 라테’ 건틀릿이 귀속됩니다.]
[두 번째 세계 퀘스트 ‘비밀의 조각’이 완료됩니다. 남은 에고 장비 25]
[칭호 ‘염제’가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 부여됩니다.]
정혁의 눈앞으로 이전과 같은 시스템 창이 알림음과 함께 동시에 활성화되었다.
라테가 건틀릿 장비라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어마어마한 칭호에 또 한 번 놀랐다.
[칭호 : 염제]
- 당신은 불의 정령왕 라테의 수호를 받습니다.
- 모든 화염 속성의 공격에 면역 상태가 됩니다.
- 모든 화염 속성의 공격에 추가 데미지 추가 치명타 효과가 100% 상승합니다.
- 언제나 전신에 타오르는 불꽃 보호막 상태가 유지되며 물리, 마법 공격에 상당한 내성이 생깁니다.
이건, 일전에 엘라와의 계약을 통해 얻었던 ‘자연의 수호자’라는 칭호와는 가히 클라스가 다른 칭호다.
온전히 전투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제 일격 필살에 넉 다운될 확률도 적어졌고 그의 채광 활성화 스킬에서 휘두르는 화염 속성의 망치에 엄청난 이득이 되는 버프가 따라온다.
칭호 ‘자연의 수호자’를 통해서 확인했던 자연의 어머니가 자신을 주시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아직 이해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불의 정령왕 라테가 자신을 수호한다는 명확한 주종관계의 시스템 계약은 이전의 천방지축 엘라와는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온전히 정혁을 위해 싸울 것이다.
[불의 정령왕 라테 – 에고 장비 ‘건틀릿’]
- 원소의 근원이라고 불리는 정령왕 중 특히나 호전적인 불의 정령왕 라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와 계약했습니다.
이제 그는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의 친우이자 벗이 되어 자신을 불사를 것입니다.
마지막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정혁의 훌륭한 작품입니다.
- ‘비밀의 조각’ 세계 퀘스트가 완료 되었습니다.
-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 ‘염제’라는 칭호가 부가적으로 적용됩니다.
-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 귀속됩니다.
- ‘오아시스의 대장장이’만 사용할 수 있는 장비이며 대여가 불가능합니다.
-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의 대장 기술과 제련 기술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전투 기술이 발전하며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정혁은 눈앞에 펼쳐진 이 모든 알림 창에 무릎 꿇고 고개를 파묻어 울고만 싶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비루한 나의 과거여.’
불의 정령왕을 등에 업었으니 제 앞가림쯤은 능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정혁의 뒤에 고함을 내지르며 서 있는 라테를 바라본다.
정혁은 반지를 빼 보았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
라테의 불길은 정혁의 신체에 어떤 상해도 입히지 않는다.
이전까지 극악의 컨디션이었던 라테는 계약으로 단숨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했다.
모든 상태 이상과 누적 데미지가 없어졌으며 마치 정혁이 ‘한’이었을 때 만났던 모습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버티고 섰다.
정혁이 모습을 감췄던 때에 재빠른 암살자 두 놈과 상대하고 있던 잭슨은 생각보다 빠르고 강한 이들 덕분에 꽤 애를 먹고 있었다.
애초에 라테와 그들 사이에 있었던 경계가 라테의 부재로 허물어지자 이들의 모든 공격은 잭슨에게 퍼부어졌고 꽤 오랫동안 합을 맞춰 온 듯한 그들의 연계기에 자유 연맹의 총사령관인 잭슨조차도 힘에 겨워하고 있었다.
암살자는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아무리 잭슨 자신이 쾌검이라 하며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적의 목을 베고 다녔어도 자신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며 특유의 스킬로 몸을 숨기고 급소를 노려 나타나는 상대 앞에서는 한 동작 한 동작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그러다가 갑자기 사방에서 터진 폭발에 나가떨어진 잭슨은 뿌옇게 변한 시야와 강렬한 이명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온전한 컨디션으로 돌아온 듯 압도적인 기세를 보이며 눈앞에 등장한 라테 때문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어이.”
잭슨의 옆에서 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잭슨의 복부에 날카로운 검날이 파고들기 일보 직전의 순간이었다.
‘I’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마스크를 쓴 여자였다.
폭발의 충격으로 아직 정확히 사리 분별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라테의 엄청난 포효 앞에 아연실색한 그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파고든 이 괴한의 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정혁의 손에 단단히 틀어 막혔다.
여자의 시야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정혁의 뒤로 순식간에 다른 괴한이 달려들었다.
그의 두 자루 단검에는 치명적인 독이 잔뜩 배어 있었다.
정혁은 히죽 웃으면서 다른 손을 뻗어 뒤로 후려쳤고 그때 마침 손안에 나타난 화염 망치가 괴한의 머리 측면을 정확히 때렸다.
그가 공중에 붕 떠서 날아가 떨어진 곳에 라테의 작은(?) 메테오가 그대로 낙하했다.
폭발과 동시에 거대한 불길이 그곳에서 터져 올랐다.
정혁은 검을 쥔 그녀의 손을 그대로 비틀어 재꼈고 그와 동시에 염구가 그녀의 양 어깨를 관통했다.
짧은 비명이 새어 나오고 마스크 안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그대로 보이는 듯했다.
정혁은 그녀를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치며 양손에 망치를 소환했다.
그러곤 그것을 휙휙 돌리면서 잔혹하게 조롱한다.
“튀겨 줄까, 구워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