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55화 (55/200)
  • ◈55화

    [정령왕의 마지막 잔해 ???]

    - 대지의 정령왕의 마지막 잔해이다.

    - 이 조각이 파괴되면 대지의 정령왕은 소멸하게 된다.

    - 재구성 가능 재료 가치 없음 파괴 가능

    정혁의 능력으로 살펴본 잔해는 무려 대지의 정령왕의 마지막 잔해였다.

    충격이다.

    이 잔해를 왜 라테가 가지고 있는가? 원소적 속성으로 따져 보면 대지와 불은 비슷한 힘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격동의 불길로 태운다 해도 드넓은 대지의 기운 전체를 없애 버릴 수는 없다.

    서로 불필요한 소모전을 할 뿐이기 때문에 대지의 정령왕과 불의 정령왕은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뭐, 이것도 고서에서 발견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정혁은 잔해를 건네받아 쥐고서 라테를 올려다보았다.

    넘실거리는 불꽃에 이전의 위용은 담겨 있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정혁은 어렴풋이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한’이 랭킹 1위가 되기 이전 너무도 당연하게 랭킹 1위라는 타이틀을 쥐고 있던 검사가 있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전 대륙의 최강자 위치에 있었고 세계 위에서 군림했다.

    제국의 황제로 우뚝 선 그는 그의 제국을 더욱 강하게 키워 냈다.

    ‘한’이 천천히 세계에 명성을 알리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를 견제하는 세력들이 달라붙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한’은 언제나 잡초처럼 다시 자랐고 절대 무릎 꿇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이르게 ‘한’은 랭킹 1위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랭킹 1위의 검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 너무나 손쉽게 그를 처리해 낼 수 있었다.

    그에게 첫 번째 죽음을 선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각자의 상황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비열하지만 ‘한’은 랭킹 1위의 검사이자 황제였던 그에게 가장 소중한 자들을 두루 잡아 묶은 뒤 그들을 랭킹 1위가 보는 앞에서 한 명씩 죽였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의 싸움과 지킬 것조차 없는 자의 싸움의 결은 이렇게나 다르다.

    랭킹 1위의 힘은 강했지만 ‘한’도 만만치 않았다.

    암살자라는 플레이어의 특성과 더불어 지금 죽더라도 랭킹 1위의 모든 지켜야 할 자들을 죽이고 죽겠다는 강력한 결의가 있었기에 세계의 최강자를 가리는 대혈투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정혁은 마치 그때의 랭킹 1위 검사를 보는 것 같았다.

    눈앞의 라테는 이렇게 비참하게 변해 버릴 존재가 아니다.

    정령왕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혁이 손에 쥐고 있는 이 잔해의 시스템 설명에 따르면 ‘소멸’이라는 단어가 절대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는 건 그들이 세계에서 소멸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데.

    라테는 그것을 막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더불어 이 잔해는 정혁의 고유 스킬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했다.

    누가 보기에는 그저 일반적인 보석 정도로 식별하겠지만 이는 위장이다.

    그렇다는 것은 확실히 이들도, 이렇게 강한 자들도, 원소의 근본이라고 여겨지는 자들도 소멸이라는 방식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증거가 된다.

    “나를 믿나?”

    정혁이 눈을 들어 라테를 보았다.

    아까보다는 작아지고 불꽃의 화기도 약해졌다.

    두근대는 검은 불꽃의 심장이 그대로 보인다.

    순간 라테가 매우 강력한 화기를 사방에 뿜어냈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불이 가장 뜨겁다는 말처럼 그의 불길은 이전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이 화염은 넓게 퍼져 정혁과 라테를 보호하는 장막을 만들어 냈고 이 장막을 뚫고 침입하려는 마스크를 쓴 두 명의 수상한 자들이 잠깐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물론 그들을 쫓는 암영검의 잭슨 역시 약간 일그러진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라테는 손을 들어 정혁의 반지를 가리켰다.

    “그 반지는 그 자식을 만났다는 증거겠지.”

    라테의 말에 정혁이 반지를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는 건 자네는 세계의 순리 속에 끼워 맞춰질 퍼즐 조각 중 하나라는 뜻일 테고.”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나 역시 조각 중의 하나로서 자네에게 정중히 부탁하는 걸세.”

    정중이라니.

    정혁은 잠시 이 앞에 있는 거대한 불의 정령이 그가 알고 있던 망나니 라테가 맞는지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 보았다.

    “대지의 정령왕을 알고 있나?”

    정혁의 물음에 라테가 큰 숨을 들이 쉬고 내쉬었다.

    화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가이아… 그녀는… 내 유일한 친구였네.”

    라테의 타오르는 눈빛에 서글픔이 어렸다.

    “태생적으로 모든 것을 태우고야 마는 나에게 유일하게 다가올 수 있는 존재였지. 나는 언제나 고립되어 있었다네. 다른 정령왕들도, 다른 존재들도, 나를 비난했지. 그럴 수밖에 없었음에도,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도 외톨이는 쉽지 않은 역할이었네.”

    라테의 손 위로 불길이 타오른다.

    그동안 라테가 받았던 증오와 경멸의 시간들이 불길 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마지막에는 그를 쓰러트리는 한 남자가 모습을 나타낸다.

    ‘한’이었다.

    “그러나 그녀만큼은 늘 내 이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자였어.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파괴와 폭발을 잠시 멈추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네. 이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자 내 삶에 유일한 낙이었지. 영원할 거라 믿었네. 저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의 손 안에 있던 ‘한’의 형상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그 장면이 회상된다.

    ***

    물의 정령왕의 부탁과 더불어 강철 망치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불의 정령왕 라테를 찾아다니던 ‘한’.

    한동안 잠잠해 모습을 숨긴 라테를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웠던 차였다.

    그러나 그는 의외의 공간에서 라테를 발견하게 된다.

    숲속 깊숙이 자리한 오두막.

    장작을 패고 있던 덩치 큰 남자.

    그에게서 각인석이 힘을 발현하기 시작했고 ‘한’은 손안에 깃드는 각인석의 힘을 통해 그가 인간으로 변한 정령왕 라테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은 속전속결 검을 빼어 들고 어둠 속으로 잠입했다.

    천천히 그의 뒤를 잡아 도끼날이 장착을 패는 순간 그의 뒷덜미를 깊게 베었다.

    그러나 베인 곳으로 터져 나오는 엄청난 화기에 그는 재빨리 한참의 거리를 두고 후퇴해야 했다.

    평화로웠던 숲속은 순식간에 엄청난 화염으로 휩싸였고 거대한 불의 정령왕 라테가 현신했다.

    그의 포효가 사방에 미치자 불길이 더욱 거세게 일대를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타올랐다.

    ‘한’은 그를 보면서 피식 웃고는 악몽의 비수에 최상급 마법 스크롤인 [물의 가호]와 [빙하의 숨결]을 입혀 다시 한번 전투에 나섰다.

    눈으로 제대로 따라가기도 벅찼던 ‘한’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라테를 괴롭혔다.

    악몽의 비수의 날카로운 검날이 몸에 닿을 때면 라테의 전신은 이제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고통에 몸부림쳤고 사방을 태우고 또 태우며 파괴하고 또 파괴해도 징글징글하게 달라붙는 이 말도 안 되는 적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은 신출귀몰이었다.

    검은 안개와 함께 바깥으로 튕겨지듯 뛰쳐나와 라테의 곳곳을 베고 또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얼음처럼 차가운 검기와 베일 때마다 일렁이는 물결은 그의 화기를 지속적으로 잠재워 갔다.

    또한 알 수 없는 힘이 라테를 유약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한이 가지고 있던 각인석의 힘이었다.

    라테의 크기는 점점 작아져 갔고 더불어 마치 태양과 같던 화기 역시 줄어들었다.

    한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악몽의 비수를 라테의 심장에 내리꽂았고 그와 동시에 각인석을 심장의 위치에 박아 넣었다.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불의 정령왕 라테가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불에 타 사라져 가는 나무 뒤에 한 여자가 몸을 숨기고 서 있었다.

    그녀는 라테가 쓰러지는 순간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한’도 몰랐던 장면이었다.

    라테는 각인석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의 심장은 ‘한’의 손에서 두근거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각인석에 빨려 들어가고 있던 라테의 고통에 찬 비명도 멈췄고 한의 손에 있던 심장도 멈췄으며 한과 타오르는 불길도 순간 멈췄다.

    여자가 나타났다.

    수려한 외모의 여자는 초록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에는 붉은색 동백꽃 장식이 꽂혀 있었고 복장은 낡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어딘지 모를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사라져 가는 라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한’을 바라본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흐름 안에 갇힌 자들.”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뱉는다.

    ‘한’의 손에 있던 라테의 심장에 그녀가 손을 가져다 대자 전신에서부터 어떤 힘이 심장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옅어진다.

    조금 휘청거리며 그녀는 각인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찬가지로 전신에서부터 어떤 힘이 각인석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완전히 창백해진 여자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각인석으로 사라지는 라테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기를.”

    마지막 말과 함께 그녀는 빛무리가 되어 찬란히 공중으로 흩어져 갔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한’은 라테가 온전히 빨려 들어간 각인석을 회수한다.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악몽의 비수에 깃들었던 스크롤 버프를 해제하고 완전히 파괴된 대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한다.

    그는 각인석을 인벤토리에 넣고 따뜻한 심장을 강하게 쥐며 표독스럽게 웃더니 그것 역시 던지듯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곤 차원 문을 열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정혁은 라테의 불길 속에서 과거의 장면들을 바라보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거 완전히 악마 새끼 아냐.’

    그것이 과거의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비운의 연인에게 비참한 이별을 안겨 준 쓰레기 같은 새끼다.

    ‘게다가 왜 마지막에 심장을 움켜쥐어? 그딴 표정으로?’

    정혁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왜지? 왜 그때는 그것이 당연했지만 지금은 또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어차피 같은 사람, 같은 플레이어였는데. 지금과 그때는 왜 이렇게 달랐던 걸까.’

    라테는 그 불길을 끝으로 조금 더 연약해졌다.

    “그녀가 각인석에 봉인되어 가던 나에게 한 말이 있네.”

    정혁은 다시 라테에게 집중했다.

    “내가 다시 깨어나는 날 나를 찾아올 대장장이가 있을 것이며 그가 바로 우리를 갈라놓고 이 만행을 저지른 자의 미래 모습일거라고 했지. 그땐 분노에 이성을 잃지 말고 부디 진정하여 미래의 그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겨 보라더군. 그날의 데미지가 온전히 남아 있는 나를 잡기 위해 강한 자들이 많이도 찾아왔었네. 이제는 자네에게 그날의 화를 낼 마음조차 없이…… 지쳤어.”

    라테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조각이 내 전부일세. 그녀가 자네를 믿으라 했으니 내 억겁의 시간 동안 지켜 왔던 나의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자네에게 부탁하네. 방법이 있겠나.”

    예상외의 전개.

    그러나 이 또한 완벽한 기회.

    [오아시스 대장장이에게 탐이 나는 재료가 등장합니다. 히든 스킬을 활성화합니까? YN]

    정혁은 타이밍 좋게 활성화된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자꾸만 ‘한’이었을 때의 기억과 장면이 머리를 스친다.

    “시간이…… 얼마 없네.”

    그들을 보호하던 불의 결계가 옅어진다.

    마스크를 쓴 자의 칼날이 결계를 뚫고 들어오지만 이를 잭슨이 재빠르게 달려 나가 막아선다.

    정혁은 라테를 보며 한숨을 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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