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54화 (54/200)
  • ◈54화

    잭슨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침을 한 번 삼켰다.

    손에 쥔 암영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앞에 선 존재 앞에 그는 전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한 번도 미소를 잃어 본 적 없는 그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그리고 천천히 곁에 서 있는 정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혁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저 서 있었다.

    아무런 동요도 없이 말이다.

    ‘저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아니, 정말 떠돌던 이야기처럼 오아시스 프로그램의 관리자인가? 120레벨의 플레이어라면 아직 오아시스의 반도 경험해 보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고?’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라테를 올려다보았다.

    얼굴로 추측되는 곳에는 푸른 불덩어리가 있다.

    그 안에 붉은 눈과 굳게 다물어진 입이 있다.

    입 사이로 붉은 용암이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진다.

    키는 3m가 훌쩍 넘어 보였다.

    이것도 사실 작다고 봐야 하겠다.

    라테의 실제 크기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원한다면 그 크기를 제한 없이 키울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불타오르고 있는 신체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몸이 있고 팔 다리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불덩어리다.

    거대한 두 손이 앞으로 튀어나와 위협적으로 불타고 있을 뿐.

    다만 특이한 것은 푸른빛과 붉은빛이 공존하는 그의 몸 안에 조각난 암석 덩어리들의 대류하듯 회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가운데에 있는 무언가를 보호하려 하고 있었다.

    정혁은 단박에 그 암석 덩어리들이 무엇을 보호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정혁이 과거에 한 번 적출해 내었던 심장.

    그렇다면 이전에 발견한 [정령왕의 잔해]는 그의 몸 안에서 무슨 연유에서인지 튀어나온 것이 되는데…….

    그렇지만 왜 그의 몸 안에 대지의 정령왕의 조각들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뿐만 아니라 라테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 위용 넘치던 모습이 아니다.

    전신을 감싸던 타오르는 작열갑옷도 없고 평소에 숨기고 싶어 했던 본래의 모습을 이렇게 전부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피나 다름없는 라테의 에너지 덩어리다.

    용암과 비슷한 열기와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 그의 에너지다.

    순간 잭슨이 정혁을 밀쳤다.

    정혁이 멍하니 서 있다가 왼쪽으로 상당히 밀려났고 잭슨은 네 개의 암영검을 사방으로 펼치며 후방에 날려 보낸 뒤 모습을 감추었다.

    라테는 귀찮다는 듯이 쓰러진 정혁을 힐끗 보고 거친 호흡과 함께 잭슨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불청객이네?”

    정혁의 목으로 날카롭고 소름 돋게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손을 쓸 새도 없었다.

    익숙한 전투 방법.

    암살자.

    얇은 칼날 끝의 감촉이 목젖까지 닿는다.

    누군지 확인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라테가 포효하며 불덩이를 정혁이 있던 쪽으로 내던졌다.

    목에 닿았던 칼날의 촉감이 사라지자마자 눈앞에 엄청난 화기와 함께 불덩이가 다가오고 있었고 정혁은 가까스로 채광을 활성화하여 비약적으로 증가한 신체 능력으로 겨우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방금까지 정혁이 있었던 곳은 불덩이가 떨어지자마자 폭발하듯 열기가 터져 올랐고 화염을 포함한 기운이 전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

    불길은 대지를 휩쓸며 타올랐고 사방이 붉게 물들어 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다.

    라테가 이미 공격을 받고 있었다니.

    변수 이상의 변수다.

    불안정해 보이던 그의 모습을 보면 이미 꽤 오랜 시간 시달린 모양이었다.

    ‘불쌍도 하지.깨어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런 일들에 휘말리다니. 상대는 누굴까.’

    기척도 없이 접근해서 뒤를 밟아 냈다.

    정혁에게는 ‘한’이었을 때의 경험이 있기에 전투 감각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기척이나 기세들을 잘 파악하고 최대한 대비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전혀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다르지.놈이 무엇이 되었든.’

    정혁은 두 망치를 단단히 쥐었다.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모습을 감췄던 잭슨이 전광석화처럼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잭슨의 볼에 얕은 선이 그어져 있고 그곳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상처 난 손을 검을 쥔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라테도 라테지만 놈들이 문젭니다.”

    “놈들…입니까?”

    “예, 정확히는 셋입니다.”

    잭슨이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상한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놈들이라는 말에 머리를 굴리고 있던 정혁의 귀에 잭슨의 마스크라는 단어가 꽂혔다.

    “잘됐네.”

    정혁이 씨익 웃으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일단, 염구가 필요하다.

    이 난전의 상황에서 잭슨이 자신을 보호해 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엘라를 부를 수도 없다.

    엘라는 이 정도의 화기 앞에서 본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뭐라도 하나 더 쥐고 있는 편이 낫다.

    잠시 감각을 집중하자 허공에서 떠돌고 있는 염구가 느껴졌다.

    정혁은 재빨리 염구를 향해 자신의 마나 일부를 주입했고 곧 염구와 라테를 잇던 마나를 끊어 낼 수 있었다.

    염구는 다시 정혁에게로 돌아왔다.

    라테가 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에겐 하나하나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정혁은 재빨리 화염의 중심부로 향했다.

    염구는 그의 주변을 호위하듯 돌고 있었고 간간히 잭슨의 암영검과 무엇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기다리던 기척이 그에게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혁은 재빨리 망치를 주변에 내려찍어 수많은 낙뢰를 지면으로 떨어트렸다.

    뿌연 연기 사이로 내리꽂아진 낙뢰는 일전보다 더 두껍고 강렬했다.

    연기를 둥글게 뚫어 내면서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음과 함께 번개 줄기가 강하게 번쩍였다.

    이는 라테의 이목을 끌었고 그에게 다가오던 기척을 다시 사라지게 만들었다.

    뒤를 내주는 건 방금뿐.

    지금 그의 상태로는 어림도 없다.

    그 순간 화기가 정면으로 날아든다.

    말 다섯 마리가 그의 얼굴 앞으로 달려들고 있었는데 모두 불타오르고 있었다.

    정혁은 화염 속성의 망치를 들어 빠른 몸놀림으로 다섯 마리 말 사이에 스쳐 들어가 말의 머리 측면을 모두 부숴 버렸다.

    망치에 부딪치는 순간 말들은 그 형상 그대로 모두 망치에 흡수되어 버렸다.

    화기를 흡수한 망치가 붉게 번쩍거렸다.

    정혁은 본능적으로 이 힘을 방출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며 말이 달려왔던 곳을 향해 망치를 집어던졌다.

    망치는 날아가다가 중간에서 우뚝 멈추더니 흡수했던 모든 화기를 사방으로 일제히 분출했다.

    마치 파도처럼 화염이 들이닥쳤다.

    정혁이 손을 들어 올려 밝은 빛을 잠시 가렸다.

    제 할 일을 마친 망치는 정혁의 손으로 다시 날아와 안착했다.

    정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망치가 라테의 화염까지도 흡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다.

    최상위급 화마를 집어삼킬 수 있다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전신은 화염에 온전히 면역된 상태.

    그렇다면 이미 상당히 지쳐 있는 라테를 상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지금.

    정혁은 목으로 날아드는 비수 두 자루를 망치로 재빨리 쳐내고 그 방향을 향해 몸을 튕기듯 나아갔다.

    그러자 비수를 던지고 자리를 옮기려는 마스크를 쓴 여성을 마주칠 수 있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 안으로 그녀의 동공이 삽시간에 커지는 것을 느꼈다.

    마스크에는 ‘I’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녀의 발아래부터 검은 어둠이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잠입이나 암살에 특화된 플레이어들이 자주 사용하는 ‘점멸’계 스킬의 하나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겨 필요할 때 바깥으로 나와 적을 죽이는 나름 상위의 스킬인데 암살자의 정점에 있었던 정혁에게 이런 스킬을 파쇄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의 상태로는 더욱 식은 죽 먹기.

    정혁의 염구가 연기를 가르고 여자의 발목을 관통한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그러자 발아래 어둠이 삽시간에 사라지며 여자가 측면으로 고꾸라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정혁이 전격의 망치를 들어 여자의 머리를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나 여자는 자취를 감추었고 망치는 애꿎은 지면만 내리쳐 거대한 구덩이만 만들어 내었다.

    “괜찮으십니까?”

    잭슨이 다시 옆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그의 손에는 어떤 브로치가 쥐어져 있었다.

    “이제 둘입니다.”

    정혁이 놀라는 얼굴로 잭슨을 보았다.

    잭슨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웃는 살인마.이름값 하네.’

    “가장 강한 자가 하나 있습니다. 나머지는 그의 하수인인 것 같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긴 하나 ‘I’라는 이니셜을 가진 자가 리더입니다.”

    “만났었어요.”

    “…그자를 조심하십시오.”

    잭슨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정혁을 향해 잠시 침묵을 하다 떨떠름한 말투로 경고했다.

    정혁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는 아닐 겁니다. 발목에 구멍이 났거든요.”

    잭슨은 가만히 정혁의 두 망치를 보았다.

    그의 상태 창을 보고 싶었지만 락이 걸려 보이지 않는다.

    이 기운과 이 기세는 120레벨의 플레이어 것이 아니다.

    잭슨보다도 더 강한 최상위급 랭커에 준하는 힘이다.

    일전에 잠깐 보았지만 이 정도의 신체 능력이라면 정혁의 말대로 이곳의 불청객들 정도는 거리낄 것 없게 된다.

    게다가 저 망치들은 못해도 전설급, 그 이상이다.

    번개를 떨어트리고 라테의 화염을 집어 삼켜 방출하다니.

    파직거리는 번개를 품고 불길에 온전히 사로잡힌 망치를 쥐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이 남자.

    잭슨은 점점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어엿한 총사령관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분쟁 속에서 마침표를 찍어 내던 자였다.

    의회에서 인정한 플레이어이자 자유 연맹의 자유를 수호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신출귀몰.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적을 베어 넘기는 위험한 플레이어이자 자유 연맹의 보호자.

    자신감이 넘쳤던 정혁과의 첫 만남에 비해 지금은 한없이 초라하다.

    갑자기 잭슨은 억울한 감정이 일었다.

    상대는 120의 쪼렙 플레이어였다.

    무슨 능력이 있다 한들 오아시스의 시스템상 경험이 우선되는 세계에서 120레벨의 플레이어가 뭘 더 할 수 있었겠는가.

    요행이 있거나 김창수와 인연이 있었겠거니 싶어서 깔보았던 자신이 이제는 한없이 부끄럽다.

    ‘그래,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자유 연맹의 최대 위기 상황에서 어쩌면 편을 정해야 할 수도 있겠다.그 편을 정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념에 잡혀 있는 사이 정혁이 순식간에 옆에서 사라졌다.

    잭슨이 혀를 한 번 차며 다른 방향으로 몸을 숨긴다.

    정혁은 다시 한번 화기의 중심부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의 앞으로 무수히 많은 화염구가 날아들었지만 정혁은 화염의 망치 끝단에 매인 끈을 쥐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앞으로 전진 하자 염구는 모두 망치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마주한 라테의 몰골은 끔찍했다.

    재차 불청객들에 의해 이어진 공격 때문에 그는 아까보다 더 작아지고 불길도 옅어졌다.

    주변으로 정령왕의 잔해들이 나뒹굴고 가려져 있던 흐려진 불꽃 안으로 심장이 조금씩 보였다.

    라테는 다소 거친 숨을 쉬며 정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꽃이 일렁이는 그의 눈빛 속에는 알 수 없는 애처로움이 담겨 있었다.

    명색이 망나니였던 세계의 강자 중 하나라 여겨지는 그가 왜 이 정도로 추락했을까.

    정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더 강한 힘으로 집단을 규합하고 대지를 점령해 가면 되었을 텐데 엔토리아에 국한되어 세력을 더욱 불리지 않고 마치 스스로를 이곳에 가둔 것 같은 행동을 했는지.

    “대장장이여.”

    순간 라테의 목소리가 정혁을 불렀다.

    정혁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도와다오.”

    그의 말과 함께 라테가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 꺼낸 것은 심장을 감싸고 있던 정령왕의 잔해였다.

    다만 다른 잔해와는 다르게 마치 보석처럼 영롱한 초록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행동에 의해 라테의 심장은 이제 온전히 드러났지만 라테는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제발…….”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혁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모습의 정령왕 라테를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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