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53화 (53/200)
  • ◈53화

    주변은 거의 생지옥과 다름없다.

    대지는 이미 검게 그을려 있었고 모든 것들은 붉은 기운을 품고 타오르고 있었다.

    회색빛 연기가 자욱하고 콧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공기가 탁하다.

    다행히 반지에 의해서 불 속성의 모든 힘들에 면역이 되어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굳건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만약 이 반지가 없었다면 라테를 만날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사실 이런 환경들보다도 더욱 문제였던 것은 이 지역이 라테에게 온전히 장악되자 몰려든 그의 하수인들이었다.

    불타오르는 돼지 떼 파이어 보어들, 크고 작은 화염 정령 집단, 라테를 추종하는 광신도 엘프들과 오크들까지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를 휩쓸고 나타나는 모든 적들을 베어 넘기며 그들은 천천히 전진했다.

    거의 대부분의 공격은 잭슨의 손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그의 암영검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환상적인 움직임으로 적들의 목을 날카롭게 잘라 내었다.

    형체가 없는 어둠의 검은 그의 손에서 압도적인 힘을 뽐냈다.

    잭슨의 신체 능력 또한 엄청나서 정혁은 마치 에스코트 받는 느낌으로 편안히 나아갈 수 있었다.

    정혁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떻게 엘라가 에고 장비가 되었는가.

    히든 스킬인 “에고 장비 제작”이 어떻게 발동 되었는가.

    일단 엘라가 죽어 갔었다.

    정확히는 죽음의 직전에 당도했었다.

    그리고 황금빛 마나에 뒤섞이면 그때부터는 그들의 시간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에고 장비가 되는 대상의 동의를 5분 안에 얻어 내야만 했다.

    엘라에게는 삶의 집착이 없었다.

    이미 오래 살았고 욕심은 버렸으며 애초에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자신이 이렇게 은행나무 군락지에서 이들을 품어 내고 지켜야만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증오가 마음 저 아래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때 일반적인 고대 엔트로서의 삶은 끝이 났었다.

    두 번째 삶을 제안한 정혁 덕분에 엘라는 지금의 과정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속박된 자유이기는 하지만 정혁과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고 더불어 만나고 싶었던 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정혁도 알고 있다.

    고집불통의 나무때기였지만 먼저 된 자신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이후에 삶을 허락받아 그녀가 에고 장비로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라테는 어떤가?

    일단 정령왕은 역사적으로 소멸된 적이 없다.

    이후의 삶은 당연히 없거니와 죽음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라테는 삶에 대한 집착으로 불타오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오랜 시간 구속된 채로 지내다가 겨우 풀려났으니 그 갈망이 오죽할까.

    이런 그에게 빈사에 가까운 데미지를 입히는 것이 과연 쉬울까?

    그렇담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히든 스킬을 발동 시킬 수 있는 방법.

    결국 상대방을 끝의 끝까지 밀어 붙여야 한다는 경험적인 방법 말고는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말이야 쉽지 정말.

    잭슨과 둘이서 가능한 일이냐고 이게.

    “허허. 모르겠다.”

    골똘히 생각하던 정혁이 허허 웃으면서 입술을 깨문다.

    옆에서 걷던 잭슨은 어느새 불타 버린 손목의 아대를 툭툭 털어 버렸다.

    출발할 때는 참 간편한 복장이었지만 전투에 임하면서 인벤토리에서 장비들을 꺼내 갖춘 그였다.

    오히려 정혁은 여전히 가죽옷 차림이다.

    잭슨이 물끄러미 정혁을 보았다.

    길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불타 버린 숲에서 벌써 몇 시간째였다.

    시간은 오후에 접어들었다.

    이곳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뭔가 고민하는 모습이었기에 쉽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또한 주변에서 시시각각 기척을 느끼게 하는 적들의 움직임에 감각이 잔뜩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말 걸기가 어려웠다.

    그가 다시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정혁은 걸음을 멈추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엘프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다시 연기를 헤치며 그가 정혁의 곁으로 돌아왔다.

    연기를 걷으며 웃는 얼굴이 먼저 보일 때면 정혁은 몇 번이고 소름이 돋아 오름을 느꼈다.

    어쩜 저렇게 즐겁게 적들을 상대할 수 있는지.

    그의 마인드가 궁금했다.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거죠?”

    잭슨이 손안에서 사라지는 암영검을 바라보며 정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정혁은 손가락을 올려 공중에 염구가 떠오르게 했다.

    염구는 가만히 공중에서 머물렀고 잭슨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염구의 색이 조금 더 붉어진 것 같았다.

    “염구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그게 라테와 가까워진다는 증겁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손에 계속 쥐고 있었는데 온도가 달라지고 있더군요. 추측컨대 그렇습니다. 당장에는 이 방법 말고는 없네요.”

    “공중에서 봤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잭슨이 아쉽다는 듯 말했지만 정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대지에서 솟구치는 불길은 그의 여흥일 뿐 그가 있는 곳이라고 판단할 수 없어요. 게다가 녹턴을 보고 아셨겠지만 기본적으로 정령왕의 변신 마법은 드래곤의 폴리모프와 거의 유사합니다. 즉, 알아채기 굉장히 힘들죠. 인간으로만 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확히 얼마나 근접했는지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잭슨은 생각보다 라테에 대해 빠삭한 그의 지식에 조금 놀랐다.

    “결국 염구의 온도가 핵심이겠군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

    잭슨이 걸음을 멈추고 정혁을 바라보았다.

    “아마 본래의 모습으로 있을 겁니다. 아직도 이 정도의 절절한 화기를 뿜고 있다면 여전히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상태인 것 같거든요. 아마 염구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놈이 있는 곳이 저기구나 하는 느낌이 들 겁니다.”

    잭슨은 정혁을 믿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잭슨의 모든 계획은 녹턴을 만나고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잭슨이 강하다 해도 화염의 정령왕을 단신으로 상대할 만큼 판단력이 흐린 사람은 아니었다.

    잭슨의 진정한 목적은 이 남자, 정혁의 진짜 힘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아스칼과 박달수의 이야기만 듣고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이야기는 전해질수록 미화되고 거대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험해 봐야만 그의 그릇을 가늠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잭슨은 애초에 처음 갈림길에서 이곳으로 향했을 때 정혁이 길을 막아서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잭슨을 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객기라고 생각했다.

    여관이 최종 목적지였다.

    그곳에서 하루 묵으면서 더 그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자유 연맹 측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싶었다.

    여관에서의 일을 통해 잭슨은 감히 자신이 그의 그릇을 판단하려 들었다는 사실에 큰 회의감을 느꼈다.

    더불어 이런 강자를 품은 제논을 논외 대상으로 두었던 자유 연맹 의회에 이 모든 사실을 전파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게 됐다.

    일개 플레이어, 아니, 일개 플레이어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120레벨의 플레이어인데도 불구하고 물의 정령왕과 인연이 있다는 점부터, 무섭도록 냉철한 판단력과 황금빛 마나의 사용, 소유하고 있는 에고 장비의 능력까지.

    그의 비호 아래 제논이 성장하게 둔다면 자유 연맹은 남북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아 파멸하고 말 것이 뻔했다.

    당장 그를 죽이려 해도 그게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고대 엔트의 후려침에도 버틴 자다.

    잭슨은 그때 정혁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선 그였다.

    사실 굉장히 꼴사납게 일어났지만 잭슨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런 고민들 속에서도 잭슨은 세 번이나 그들을 공격하는 무리에게 죽음을 선사해 주고 돌아왔다.

    그가 회색 연기를 헤치고 정혁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정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고 재빨리 몸을 낮춘 그는 정혁의 자취를 찾아 낮은 자세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 타 버린 고목의 거대한 나무 기둥 뒤에 앉아 있는 정혁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정혁은 손안에 있는 무언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조금 심각해 보이는 그에게 잭슨이 조용히 다가갔다.

    “뭔가요?”

    정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에 들린 조금 큰 돌조각을 보여 주었다.

    마치 염구와 같은 색깔로 화기를 품은 돌덩이였다.

    잭슨이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보며 다시 물었다.

    “그냥 돌 아니에요? 열기를 머금은 것 같은데.”

    아니다.

    대장장이인 정혁의 눈에 이것은 염구와 같은 속성과 재질을 지닌 광석으로 보인다.

    [정령왕의 잔해]

    - 전설급 광물로 대지의 정령왕의 조각이다.

    - 오직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 의해 채광 및 제련이 가능하다.

    정혁은 한참 이것을 바라보며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다.

    대지의 정령왕의 조각이 왜 여기서 뒹굴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것이 염구와 같은 재질과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대지의 정령왕은 역사적으로 단 한 건도 그 흔적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없다.

    왜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존재는 한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 누구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 정령왕의 잔해 역시 익숙하지 않다.

    왜 플레이어들이나 대장장이들이 염구에 대해 잘 몰랐는지도 알 것 같다.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그저 간단한 아티팩트 정도로 느껴졌을 것이다.

    일반 대장장이들에게도 쓸 수 없는 조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들은 제련도 제작도 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조각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게 된 정혁에게는 참 아리송한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라테가 있는 곳에 도대체 왜 대지의 정령왕의 조각이 있냐고.심지어 아이템 이름도 ‘정령왕의 잔해’인데.

    그냥 넘기기에는 괴엥자앙히이 꺼림직한 이름이잖아.’

    “이거 생각보다 일이 엄청 꼬일 수도 있겠어요.”

    정혁의 말에 잭슨이 고목나무 뒤를 힐끔 보고 다시 몸을 숨겼다.

    “왜죠?”

    “잘하면 정령왕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더운 곳에서 잭슨이 얼어붙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그가 다시 물었다.

    “무스, 슨 소립니까?”

    “저도 파악이 잘 안 되는 일이니 말을 좀 아끼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상황은 안 좋으니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요?”

    “그, 그렇긴 하지만.”

    잭슨이 광물을 주머니에 넣는 정혁 앞에서 우물쭈물 서 있었다.

    그 순간 엄청난 폭발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터졌다.

    고목이 순식간에 괴성을 지르며 조각조각 나 퍼졌고 조각나지 않은 거대한 줄기들은 우지끈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잭슨이 정혁을 붙들고 순식간에 고목 아래에서 대피했다.

    뿌연 연기가 아래에서부터 더욱 깊고 자욱하게 퍼져 올랐다.

    정혁은 이미 두 손에 망치를 쥐고 있었다.

    염구 하나가 그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갑자기 휙 하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이 움직임은 정혁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정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곤 두 손에 쥔 망치를 더욱 움켜쥘 뿐이었다.

    “마음 단단히 먹어요.”

    정혁의 말에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양손에 암영검이 쥐어지고 뒤편으로 네 자루의 암영검이 떠올라 머물렀다.

    자욱한 연기 속 엄청난 화기가 그들을 덮친다.

    거대하게 타오르는 두 손이 화염을 내뿜으며 거칠게 연기를 걷어 낸다.

    폭발적인 열기가 전신을 스친다.

    주변의 모든 공기가 끓어오르는 느낌이다.

    살기와 분노가 피부를 잔뜩 자극하고 연기가 가라앉으며 그가 등장한다.

    불의 정령왕, 라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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