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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52화 (52/200)
  • ◈52화

    생각만 해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물론 불가능한 부분은 아니다.

    기억을 돌려 볼 때 에고 장비를 만들 수 있는 한계치가 있었고 다행히 네 자리는 남아 있다.

    다만 이 세상 누가 들어도 절대 반대할 말을 녹턴이 하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뿐.

    그래, 맞다.

    당장에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다.

    마구잡이로 파괴를 일삼는 라테를 잠재우려면 최고의 방법은 손아귀에 그를 쥐는 것이다.

    즉, 그를 에고 장비로 귀속시키는 것인데…….

    할 수 있다고 해도 에고 장비를 만들어 내는 발동 조건을 아직 잘 모를뿐더러 엘라가 노발대발할 것이 뻔하다.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친다.

    ‘아니, 그리고 애초에 나무와 불은 상극인데 가히 세계관 최강자라고 불릴 만한 존재 둘을 같이 데리고 다녀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되나.’

    그러나 녹턴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잔잔히 띄워진 미소 앞에서 정혁은 다시 주판을 굴려 보기로 했다.

    물론 라테가 에고 장비가 된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그가 어떻게 구현될지, 어떤 개별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원소 속성의 최강자이며 더불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정령의 모습으로 정혁의 곁에 서 있다면 그만큼 든든한 아군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고 장비를 만들어서 활용하는 게 몬스터 볼 던져서 잡아 테이밍을 했다던 과거에 유행한 게임처럼 뚝딱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의 인격체 앞에서 그를 납득시킴은 물론 추후에 유지 관리까지 더불어 들어가야 한다.

    누가 그랬다.

    차라리 몇 대 맞고 말지 몇 시간 동안 훈계 듣는 것만큼 곤욕이 없다고.

    그렇다.

    육체적인 고통이야 시간이 지나면 그만이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끝이 없다.

    지금도 엘라 덕분에 이미 한계치인데 여기에 고춧가루를 더 뿌릴 자신이 없다.

    ‘아니, 야.그런 눈으로 날 그만 보라고!’

    이렇게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정혁이었다.

    아무리 남는 장사여도.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 될 예정이라도.

    그 망나니가 내 새끼가 된다는 것이라면 입장이 달라지는 문제란 말이다.

    “그래, 자네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나도 잘 아네.”

    녹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곤 몇 보 앞으로 걸어 정혁의 곁에 와서는 의자를 당기고 앉았다.

    정혁 역시 여러 감정이 부딪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의 곁에 앉았다.

    “엘라가 에고 장비가 되었던 날을 기억해 보게. 내가 알기로 저만큼 고집 센 엔트는 없었네. 그래서 엘라가 은행나무 군락지를 떠나 있다는 것에 놀라고 게다가 자네에게 귀속되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쳤다네. 그러나 그런 고집불통을 손에 쥔 사람은 자네일세.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네.”

    “엘라를 에고 장비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상황 때문이었고 지금은 완전히 다르잖아. 물론 난 지지 않을 생각이야. 네가 날 전처럼 도와 줄 거라 믿으니까. 하지만 녀석과 싸워 이기는 것과 녀석을 동료로 만든다는 것은 결이 다른 문제라는 걸 너도 알잖아. 가능할 거라고? 진심이야?”

    녹턴이 허허 웃어 보였다.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군.”

    ‘그래, 이 자식아.그만큼 이 상황 자체가 어처구니없다는 거 아냐!’

    “내가 아는 ‘한’은 이런 사내는 아니었는데.”

    빠직-

    이마에 핏줄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정혁은 여유로워 보이는 녹턴의 얼굴에 진하게 한방 먹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잔뜩 들었다.

    어차피 행해야 할 사람은 정혁이니까.

    ‘네가 알아서 잘 해 주겠지’라는 심산으로 도발하는 것 같다.

    “기억하나? 자네가 나와 처음 만났던 날. 우연이었지. 자네는 내가 제일 아끼던 노테란의 호수에 직접 만든 독약을 풀어 호수 안의 생물들이 얼마나 빨리 죽는지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어. 난 참, 자네의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네. 이런 식으로 도발을 했던 자는 처음이었거든.”

    뜬금없는 과거 회상에 정혁이 분을 조금 삭였다.

    맞다.

    노테란의 호수.

    당시만 해도 신성시 여겨지던 호수로 반대쪽 대륙에 있던 작은 호수다.

    카더라 통신에 의해 이 호수에 종종 물의 정령왕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고 마침 강철 망치의 성장을 위해서 라테를 잡으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정혁이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테란의 호수를 오염시키기로 작정하고 찾았던 것이다.

    만약 물의 정령왕이 이 호수를 좋아해서 종종 모습을 정말 나타냈다면 이 호수의 생물을 모두 죽일 수도 있는 이 행동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나타날 테니 말이다.

    이 행동은 일반 플레이어들이 따라 할 수도 없는 ‘짓거리’였다.

    정중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행위.

    정령왕은 정말 고귀한 존재여서 라테 말고는 플레이어들도 굳이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애초에 파괴를 일삼는 인간들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기에 더욱 만남을 기피하던 때였다.

    즉, ‘한’의 행동은 신종 자살 행위였다.

    사실 그런 자살 행위를 늘 즐기던 그였다.

    “더불어 혈관까지 얼려 버리는 내 진노 앞에서 그렇게 당당한 자도 처음이었지. 난 아직도 내 앞에 선 자네의 첫 마디를 똑똑히 기억하네. ‘낯짝 한번 보기 힘드네.’였어. 낯짝이라니, 낯짝.”

    녹턴이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오히려 궁금했네. 자네가 어떤 자인지. 도대체 배짱이 얼마나 되기에 나라는 존재에게 이런 위협까지 가하는지 말이야. 그리고 그 덕에 지금의 관계까지 이어진 것 아닌가.”

    정혁은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단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수많은 종족들 사이에서 긴 시간 역사를 걸어왔던 내가 이제껏 만나 보지 못한 최고의 혹은 최악의 이단아.”

    녹턴이 한 손을 올려 정혁의 어깨에 얹었다.

    그는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았고 정혁은 애써 고개를 바닥에 떨구며 그 진솔한 눈빛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걸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까지 왔겠지. 물론 당시만큼 강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뭐랄까, 더욱 내면으로부터의 단단함이 느껴지네. 그때보다 더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녹턴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믿게 친구여. 언제나 당당했던 그때의 모습으로 그를 만나게. 그리고 언제나 번뜩이던 그 기지로 그를 상대하고 굴복시키게. 라테는 생각보다 연약한 자일세. 자신이 연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외적으로 강함을 표출하려는 어린아이와 같지. 우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하세.”

    녹턴의 발아래 있던 깊은 물웅덩이가 서서히 그를 감싸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네.”

    정혁이 이를 꽉 깨물고 그를 노려보듯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 호수를 죄다 오염시켰어야 했어.”

    그러자 녹턴이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정혁이 사라지는 그를 보며 번뜩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급히 말했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

    녹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지. 그럴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야.”

    “어디서? 어떻게 만나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다시 만나게 될 걸세.”

    마지막 말을 끝으로 녹턴은 완전히 물속에 잠겨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그곳에 작은 반지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공간을 막아 두던 장막이 걷어졌다.

    정혁이 반지를 집어 들었다.

    [녹턴의 가호가 깃든 반지]

    - 물의 정령왕 녹턴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 완전한 불 속성 저항.

    - 반지는 착용 후 1시간 이후에 자연 소멸됩니다.

    잠시 반시에 한눈 팔린 사이 어느새 엘라가 그의 곁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왜인지 스태프였어야 할 엘라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혁은 재빨리 한 손가락을 들어 단호하게 외쳤다.

    “엘라, 안 돼!”

    “내가 개냐!”

    그것은 오히려 엘라의 화를 돋우는 격이 되어 버렸고 정혁은 다시 한번 사력을 다해 그녀의 주먹으로부터 도망 다녀야 했다.

    아직 이전의 데미지가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은 터라 한 방 더 맞았다간 진짜 사망으로 인한 로그아웃이 될 것이다.

    그사이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 잭슨이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엘라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그녀의 주먹이 정혁의 입안으로 거의 들어간 장면에서 또 사색이 되어 굳어 버렸다.

    정혁은 그녀의 주먹을 물어 버리고 겨우 마수에서 빠져나와 옷을 털고 잭슨에게 다가갔다.

    엘라는 물린 손을 붙잡고 여전히 씩씩거리기만 했다.

    “생각보다 다이나믹하죠?”

    정혁의 말에 잭슨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차리고 계속 갑시다.”

    “어디를 말입니까?”

    “어디긴요, 라테 안 잡을 겁니까?”

    침은 한번 삼킨 잭슨이 문 밖으로 나가려는 정혁을 붙잡았다.

    “그래도 오늘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차, 내 정신 좀 봐. 쉬려고 위에 짐도 다 풀어 놨는데.’

    정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엘라는 뚱하게 바라보다가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잭슨 역시 행여나 불똥이 튈까 재빨리 정혁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

    밤은 그렇게 편안하게 흘러갔다.

    대장간을 다시 열어 겨우 어르고 달랜 엘라를 그곳으로 돌려보냈다.

    숙련도에 따라서 성장해 온 대장간의 규모는 이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장비도 탄탄해졌다.

    조는 엘라의 등쌀에 못 이겨 그녀만의 휴식 공간을 따로 만들어 줘야 했다며 정혁에게 푸념을 해 댔다.

    정혁은 그의 푸념을 들어 주면서 필요한 몇몇의 스크롤과 강화 도구들을 꺼냈다.

    답답한 건 두 망치의 활용이었다.

    전보다 강해지긴 했지만 애써 스크롤을 만들고 강화 도구를 챙겨 봐야 그의 망치에는 사용할 수가 없다.

    조건부 발동 스킬에 첨가된 장비이기 때문에 평소에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걸 스킬 활용이라고 해야 할지, 장비라고 불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숙련도를 올리는 것이 최선일 뿐.

    이런 사실들을 다시 깨닫고 나서 여전히 참 어려운 직업이자 칭호라고 되새김질하는 정혁이었다.

    그는 스크롤과 강화 도구를 잭슨에게 넘겨주었다.

    더불어 반지까지도 말이다.

    그들은 아침 일찍 여관을 나왔다.

    여관에 도착했을 때보다 주변의 온도가 조금 더 올라간 것 같다.

    더불어 저 앞의 불덩이들이 가까워진 느낌이다.

    정혁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여기서는 아마 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도움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다행히 녹턴의 힘에 의해 화염 속성 공격에 대한 완벽한 보호가 이루어지겠지만 물리적 타격에 대해서는 철저히 알아서 극복해야 한다.

    가지고 있는 염구 하나와 두 개의 망치, 폼이 올라온 움직임과 전투 센스.

    그리고 아직 제대로 파악해 보지 못한 잭슨이라는 플레이어의 힘.

    이 정도로 라테를 굴복시킬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지만 정혁은 화마 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녹턴의 말을 되새겨 본다.

    최고이자 최악의 이단아.

    그래, 그런 플레이어였다.

    그릇이 작아졌다면 넘치게 부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들은 결의에 찬 모습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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