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51화 (51/200)
  • ◈51화

    황급한 그의 몸놀림에 장내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비상이다.정말 비상이야!’

    잭슨은 그의 돌발행동에 사색이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정말 물의 정령왕이라면 그의 행동은 상당한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실례를 벗어나서 바로 로그아웃이 되어도 모자랄 자살행위다.

    녹턴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막혀 정혁을 쳐다보고만 있었고 정혁은 잭슨과 다른 의미의 사색이 되어서 녹턴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행히 녹턴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엘라를 힐끔 보고서 뭔가 알겠다는 눈빛으로 그의 돌발행동을 이해해 주었다.

    오히려 화가 난 쪽은 엘라였다.

    엘라는 품에서 벗어나 다시 차가운 도시 여자 모드로 돌아왔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경멸의 눈빛으로 정혁을 노려보았다.

    “가아아암히!”

    감히의 발음이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발음이 길어질수록 마치 그녀가 기를 모으는 것 같은 느낌이 강렬히 들었다.

    정혁은 자기도 모르게 채광 모드를 활성화했고 두 손에 망치가 생성되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엘라의 손이 그의 뺨을 관통할 기세로 날아들었다.

    정혁은 그대로 튕겨져 나가 여관 벽에 처박혔다.

    만약 짐승과 같은 본능으로 채광 모드를 활성화하지 못했다면 정혁은 자신의 에고 무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플레이어가 되었을 것이다.

    녹턴이 다시 그에게 돌진하려는 엘라를 뜯어말리고 잭슨은 이 황당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뿐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먼지를 걷으며 정혁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망치는 사라져 있었지만 데미지는 심각한 것 같았다.

    목이 이 정도의 각도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오아시스를 플레이하며 처음 느껴 보았다.

    이 정도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겠다고 생각했다.

    “이분이 누군지 알고도 그런 결례를 범해?!”

    엘라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듯이 호통쳤다.

    녹턴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녀를 막느라 고생이었다.

    정혁이 고개를 몇 번 돌리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내가 저 나무때기를 괜히 에고 무기로 만들어서 이 빌어먹을 고역을 다 겪고 말이야.’

    인생에 후회는 없을 거라고 믿으며 살아온 삶에 큰 오점이 박혀 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곳에서 정혁이 ‘한’이었다고 밝혀졌다간 자유 연맹이 적으로 돌아설 것은 물론 제논 역시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고 아니, 그 전에 저 나무때기가 자신이 소멸되든 말든 그를 죽이려 들 것이 뻔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혁의 행동이 마냥 무례한 것은 아니었다.

    녹턴이 그를 새로운 인물이 아니라 ‘한’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와 자신의 신뢰 관계는 정혁의 몸으로도 유지되고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녹턴과 그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녹턴의 입장에서 ‘한’은 대자연에 해가 되고 개망나니처럼 날뛰던 라테를 잠재워 준 인물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철저히 이득을 취한 ‘한’이었다고 해도 신세 진 쪽은 오히려 녹턴이었다.

    “미안, 미안합니다.”

    녹턴의 눈짓에 정혁은 손을 들며 녹턴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엘라의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지.잠깐만.’

    순간 정혁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돋아 오른다.

    그는 재빨리 엘라의 무기화를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그녀가 악에 받쳐 욕이란 욕을 전부 뱉어 내면서 천천히 나무 스태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찬란한 빛과 함께 스태프가 영롱히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정혁은 그녀와의 모든 전음을 차단한 뒤 스태프를 저 멀리로 던져 버렸다.

    ‘어휴, 이제야 조용하다.’

    정혁은 녹턴과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아마 그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녹턴과 잠시 눈으로 웃으며 정식 인사를 나누고 옆을 보니 여러 감정이 섞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잭슨이 보인다.

    “음. 일단 제가 녹턴 님과 대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정혁의 말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잭슨이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여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도청이나 잔영, 은신 같은 스킬로 이곳을 관찰하려는 불손한 행위는 부디 시도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정혁이 약간의 경고를 보냈다.

    잭슨은 그를 돌아보고 허탈하게 웃으면서 완전히 밖으로 나갔다.

    녹턴이 불안해하는 정혁의 마음을 알았는지 작은 공간 마법을 펼쳤고 온전히 외부와 차단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차단된 공간을 바라보던 정혁이 다시 녹턴을 보자 녹턴의 모습이 변해 있었다.

    푸른색 눈동자와 창백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입술까지 푸른색인 남자.

    물결무늬가 강렬하게 새겨진 비단결의 옷은 그가 상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길고 푸른 머리카락은 한 번 묶여서 아래로 내려져 있고 그의 발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가 고여 있다.

    “진짜 반갑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지금 반가운 게 문제가 아니잖나, 그 몸이, 그게 무슨 꼴인가?”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녹턴을 보며 정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황당하지? 나도 겁나 황당하긴 했어.’

    “여차저차 여러 일들이 있었다고 생각해 줘.”

    그간의 ‘여러 일들’이 함축된 듯한 정혁의 표정에 녹턴은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놀라운 인간이라는 사실은 여전한 것 같구만.”

    “그나저나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 의도는 또 뭐고.”

    단도직입적인 정혁의 물음에 녹턴은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 망나니가 깨어나자마자 이곳으로 왔네. 너와, 그러니까 ‘한’과는 연락도 되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니까 당장에 다가갈 수는 없었어. 여기 여관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기고 화마를 막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일세.”

    “하긴 나머지 정령왕들은 관심도 없을 거고.”

    그의 말에 녹턴은 고개를 끄덕했다.

    분노에 가득 찬 라테의 이성은 이미 상식선을 넘어섰을 것이다.

    얼마나 빡쳐 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돋다가도 더불어 통쾌하기도 하다.

    라테는 사실 잠들어 있다기보다는 봉인되어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상황이었기에 조 패더럴의 이빨 안에서의 기억까지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라테가 잠들어 있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봉인이 되어 있었다는 표현이 맞기 때문에 심장이 뛰고 있는 강철 망치에서의 기억과 조 패더럴의 이빨 안에서의 기억 역시 함께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오아시스의 대장간에서 조에게 각인석의 위치를 들었을 때 정혁은 한참 자지러지게 웃었었다.

    ‘어유, 인간의 이빨에 끼어서 스스로가 봉인되어 있었으니 얼마나 열 받았을까.’

    “저만큼의 대지가 이렇게 빠른 시간에 황폐화된 적은 처음일세. 아니, 애초에 저 정도로 분노한 라테를 본 적도 없네. 도대체 잠들어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의 말에 정혁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뭐, 자업자득이라고 봐야지.”

    라테를 사냥하기 전을 기억해 보면 라테는 참 제멋대로의 쓰레기였다.

    민가를 습격하고 불태우고 정령왕의 능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자연을 파괴하고 폭발을 일삼았다.

    생명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그에게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자가 바로 녹턴이었다.

    원소의 기초가 되는 그들은 세계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가벼이 무시한 라테를 녹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녹턴은 오아시스에서 살아가는 자연의 존재들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라테의 행동을 더욱 간과할 수 없었다.

    어쩌면 결이 비슷한 망나니 ‘한’을 우연히 만나게 된 그는 만남 속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서로 간에 신뢰를 쌓게 된다.

    더불어 ‘한’은 상당히 강했다.

    녹턴은 그가 오아시스의 존재들 중에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라테의 생지옥 확장 작업을 막아 줄 수 있을 거라 믿게 되었다.

    마침 ‘한’의 입에서 라테의 이야기가 나온 순간 녹턴은 그에게 라테의 위치와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 봉인석까지 건네주게 된다.

    ‘한’은 녹턴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가차 없이 라테를 밀어붙여 결국 봉인에 성공하고 더불어 심장까지 쟁취해 원하는 바를 달성했다.

    “어찌 되었건 이번에도 도움을 좀 받아야겠는데? 봉인석 혹시 다시 받을 수 있어?”

    정혁의 물음에 녹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네. 정령왕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봉인석은 하나밖에 없어. 라테를 말리기 위해서 내가 사력을 다해 찾아낸 마지막 하나의 조각일 뿐이네. 그가 깨어났다면 봉인석은 깨졌겠지?”

    “아니, 그럼 어떻게 하려고 여기에 계속 있었던 거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그저, 아니 어쩌면 나는 자네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무슨 소리야 또?”

    알 수 없는 녹턴의 말에 정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세계는 점점 이상해져 가고 있네. 느끼고 있는가?”

    녹턴이 손을 들자 몇 개의 물방울이 그의 발아래에서 올라왔다.

    물방울 안에서 무언가가 점점 보이기 시작했는데 전쟁과 싸움, 대륙 외곽의 붕괴, 오크 부족의 응집과 악마의 침공 등등 불길하고 위험한 장면들이 마치 동영상이 재생되듯 펼쳐졌다.

    “용 군단이 잠적하고 고대룡이 묵인하며 정령들이 외면하는 시대. 인간들이 활개를 치고 파괴와 공포가 만연하며 악마들이 공허를 뚫고 오아시스를 넘보지.”

    그의 말에 따라 장면들이 변화한다.

    용들이 산과 돌로 변한다.

    정령들이 모습을 감추고 거대한 울음과 함께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고대룡 젠트라의 검은 얼굴 윤곽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일전에 만난 적 있었던 제로니막스와 그 외의 악마 군주 군단이 침공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웅장한 그들의 군세에 소름이 돋는다.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만 같지.”

    물방울들이 하나둘씩 터져 없어지고 푸른 마나가 사라진 곳에서 반짝이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자네가.”

    그러다 갑자기 거대한 물방울이 녹턴 앞에서 생겨나더니 익숙한 얼굴이 등장한다.

    물방울 안에 있는 남자는 쓰고 있던 보라색 두건을 벗는다.

    날렵한 턱선과 매서운 눈매,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소름끼치는 웃음까지.

    ‘한’이다.

    “어쩌면 자네가 세계의 붕괴를 막았던 마지막 보루였을지도 모르겠군.”

    정혁은 오랜만에 마주한 본래의 자신 앞에 다시금 초라한 지금을 떠올리며 쓴 침을 삼켰다.

    압도적인 힘의 지배와 균형.

    그것이 정말 세계를 지탱했던 것일까.

    “우리와 같은 존재들은 세계와 항상 교감한다네. 물론 저 불덩이 꼴통은 지 생각밖에 안 하겠지만 말이야.”

    물방울이 사라진다.

    방금까지 그의 앞에 있던 ‘한’이 산산조각 나 먼지가 된다.

    “자네가 사라졌던 그날이 어쩌면 세계가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던 순간일 수도 있겠군. 그리고 잠잠했던 세계의 심장이 요동치던 날.”

    녹턴의 손이 정혁의 어깨를 붙들었다.

    “자네가 지금 이 몸으로 깨어났을 때였을 수도 있고.”

    그는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았다.

    녹턴의 눈을 통해서 마치 청명한 바다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정혁이 잠시 그의 눈동자에 취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녹턴의 손에 힘이 천천히 들어갔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방법?”

    “그래, 봉인석이 없다고 해도 자네가 있으니 할 수 있는 방법.”

    정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녹턴이 다른 손으로 공간 마법 바깥의 엘라를 가리켰다.

    정혁의 인상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리곤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의 목이 부러질 정도였다.

    “아니야, 절대 안 돼! 지금도 충분히 괴롭거든!”

    녹턴은 그의 과도한 부정 앞에 잠잠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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