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50화 (50/200)
  • ◈50화

    테이블이 허공을 날아가는 그 순간 여덟 명의 모든 이방인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각자의 칭호 스킬들을 발동하려다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정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혁은 똑똑히 보았다.

    잭슨의 등 뒤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얇고 긴 암영검을.

    이자는 진짜 자신의 검을 숨기고 있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 검이 암영검일 줄은 몰랐다.

    이제야 ‘쾌검’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정혁도 잭슨도 어리둥절하고 있는 상황의 본질.

    이들을 얼린 자들은 누구인가.

    모두 꽁꽁 얼어붙어서 굳은 채로 눈동자만 굴러가고 있다.

    상당한 상급 마법이다.

    물이 없는 곳에서 공중에 포함된 물기만으로 정혁과 잭슨의 능력으로도 해제할 수 없는 고급 원소 마법을 보이지도 않는 순간에 해냈다.

    “예의가 없구먼.”

    목소리의 주인은 이 여관의 주인장이었다.

    눈썹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그는 여전히 유리잔을 닦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정혁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랄까.

    정혁은 잭슨에게 손바닥을 보여 진정하라는 표시를 했다.

    느낌과 직감을 믿으며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벗어나 주인장에게로 걸어갔다.

    “우리는 안 얼릴 거죠?”

    정혁의 말에 주인장은 그를 힐끔 보고는 묵묵히 잔을 닦아 냈다.

    그리고 여러 번 돌려 보더니 곧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잔을 닦던 천으로 손을 닦아 내고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살짝 앞으로 기울여서는 정혁을 바라본다.

    정혁은 양손을 들어 적의가 없다는 표시를 했다.

    여전히 걸음은 천천히 주인장을 향할 뿐이었다.

    낡은 앞치마에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얼룩들이 군데군데 가득하다.

    회백색 머리는 단발로 꼬불거렸고 적당한 주름이 이마에 져 있으며 머리카락부터 턱수염까지 같은 색의 털이 덥수룩하게 이어져 있다.

    눈은 약간 퀭했지만 그렇다고 총명함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정확히 정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혁은 속으로 대단하다 느꼈다.

    역시 그들의 변장 능력은 특이하고 또 감쪽같다.

    ‘그래, 평범한 여관 주인이었다면 이렇게 배짱 있게 라테의 화마를 느끼고도 지척에서 영업을 하진 않겠지.’

    조금 더 가까이까지 걸어간 정혁은 양손을 내리고 가만히 그를 보았다.

    주인장은 불편함을 느꼈는지 어깨를 으쓱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노인네 오래 본다고 뭐 나오는 줄 아쇼?”

    그의 말에 정혁이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노인네라고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긴 하다 그죠?”

    그의 말에 주인장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고개를 갸웃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비틀어 올리며 정혁을 보았다.

    눈이 살짝 찌푸려지며 그를 관찰한다.

    “날 아쇼?”

    주인장의 말에 정혁은 잠시 고민했다.

    80%? 정도는 확신한다.

    라테가 깨어났다는 말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존재.

    이 정도의 화마에도 굴복하지 않을 존재.

    이만한 고위 마법으로 상대를 순식간에 압도할 수 있는 존재.

    변신의 귀재.

    그가 분명하다.

    정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잭슨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글쎄요. 알 것 같기도.”

    “호오?”

    주인장의 얼굴빛이 살짝 바뀌었다.

    흥미가 돋는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격식을 좋아하는 양반은 아니니까 인사는 생략하고 오랜만에 보니 반갑긴 하네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단정 지은 듯한 정혁의 말투에 주인장은 계속 떠들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이렇게 다시 세계에 관여하면 됩니까, 라테도 아니고.”

    라테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주인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나를 저 염병할 놈과 비교하는 것이오?”

    “하핫, 그놈의 염병이란 단어를 당신한테 듣는 게 참,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라.”

    주인장은 앞치마를 천천히 벗었다.

    그리고 몸을 옮겨 바 테이블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쪽문을 열고 정혁에게 걸어 나왔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의 앞에 선 주인장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자칫 잭슨이 먼저 달려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에 힐끗 잭슨을 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경계하는 얼굴로 상황을 주시할 뿐.

    그와 동시에 갑자기 정혁의 옆에서 대장간의 차원 문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황금빛 마나에 놀란 건 잭슨도, 정혁도, 주인장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얼어붙은 자들도 놀랐을 것이다.

    정혁이야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타이밍에 갑자기 차원 문이 활성화되어 놀랐고 잭슨은 익숙지 않은 마나에, 그리고 주인장은 그것이 시간의 조율자에게 속한 마나라는 사실에 놀랐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대장간에서 튀어나온 건 엘라였다.

    엘라는 굉장히 반가운, 그리고 상기된 얼굴로 차원 문에서 달음박질쳐 나와 주인장에게 두 팔을 벌려 안겼다.

    그리고는 고대 엔트어로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기쁜 마음을 토해 냈다.

    주인장은 엘라를 보며 얼떨떨하게 섰다.

    정혁 역시 인상을 구기며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녀의 엔트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이제는 주인장의 본래 정체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물의 정령왕 녹턴이다.

    “아니, 엘라야.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이냐?”

    “녹턴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주인장 역시 고대 엔트어로 엘라를 반겨 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에 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정혁은 감히 자신이 엘라의 머리를 쓰다듬는 상상을 하다가 머리가 몸과 분리되는 모습까지 그려 보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가 돼서야 잭슨이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왔다.

    모든 상황을 처음 겪는 잭슨에게는 의문점과 황당함투성이였을 것이다.

    녹턴은 엘라를 진정시키면서도 동시에 정혁을 노려보았다.

    엘라는 평소보다 조금 더 작아져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녹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정말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동안에 보았던 차가운 도시 여자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마치 부모를 만난 아이처럼 그녀는 상당히 행복해 보였다.

    “정체가 뭐요, 당신.”

    불쾌함과 궁금증이 담긴 목소리였다.

    정혁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귀가 많으니 일단 이들을 정리하시죠.”

    그의 말에 주인장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얼음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며 얼어붙어 있던 모든 이들이 모두 조각나 부서져 사라졌다.

    잭슨은 압도적인 힘 앞에서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정혁은 익숙하다는 듯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엘라를 끌어안은 채로 자리를 옮겨 테이블에 쓰러진 의자들을 정리하고 앉았다.

    그 곁으로 정혁이 따라 앉았고 잭슨은 본래 있던 테이블에 다시 자리해 앉았다.

    “엘라가 당신에게 귀속되어 있는 것 같구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주인장이 엘라의 등을 토닥이면서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정혁을 보았다.

    정혁은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세상에서는 종종 이해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의 말에 주인장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엘라를 힐끔 보고서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마치 내가 누군지 알겠다는 얼굴이오.”

    “그럼요. 당연히 알고 있죠.”

    “허허.”

    주인장의 웃음을 끝으로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다.

    정혁은 이 긴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재빨리 입을 열었다.

    “도와주시죠. 저희는 라테를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당신도 라테가 다시 깨어난 것이 불편해서 이곳에 있는 거 아닙니까. 기회를 보고 저 미치광이를 잠재우려고 말입니다. 물의 정령왕 녹턴 님.”

    잭슨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칫 소리를 냈다간 지금 이 알 수 없는 상황의 균형이 깨어질 것 같아서였다.

    잭슨은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해 보려고 수도 없이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정혁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정혁과 자신 사이에서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고 느꼈었다.

    제논이 혁명을 통해 연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왕국과 연합은 엄연히 다른 체제이다.

    그러나 연합은 연맹과 비슷하다.

    가능하다면 제논을 자유 연맹 산하에 두고 싶었다.

    그랬기에 전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유 연맹에서 총사령관을 정체불명의 연합 지도자에게 보낸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김창수가 지도자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혜성처럼 등장한 루키가 김창수를 굴복시켜 버렸다.

    잭슨은 흥미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박달수가 징징거리며 자신이 꼭 그를 만나겠노라 우겨댔지만 잭슨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제거할 마음도 있었다.

    품에 안을 수 없다면 집어삼켜야 한다.

    너무나 탁월한 기회가 아닌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곳에 올 때까지 고작 120레벨에 불과한 대장장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가 이상했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런 자가 제논의 연합 지도자라? 어째서지?’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알겠다.

    그는 자신이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확실하다.

    그는 이미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에 있다.

    힘이나 전투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런 느낌이다.

    ‘물의 정령왕을 알아볼 수 있다고? 물의 정령왕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당연히 허풍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말도 안 되는 스킬이나 능력들이 전부 사실이라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자유 연맹이 아크만을 신경 쓰고 있는 지금 아주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저자가 있는 제논이라면 위험하다!’

    마음속에 경고가 마구 울린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 물론 그의 능력으로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대처 역시 문제가 된다.

    암담하게 됐다.

    결국 위아래의 압박에 병력이 분산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 연맹은 지금보다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물러설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더 저 남자와 많은 것들을 알아 가야 하는 것뿐이다.

    잭슨은 자기도 모르게 일으켰던 몸을 다시 앉혔다.

    폭발하듯 움직이던 심장을 심호흡을 통해 진정시켰다.

    차가운 마음, 차가운 사고가 더욱 필요할 때다.

    그는 정혁을 만나러 출발할 때에 연맹 의회의 의장 데릭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사령관을 믿는 만큼 결과를 보여 주세요.”

    의장은 그에게 자유 연맹의 미래 한 조각을 맡긴 것이다.

    되도록 부정적인 결과보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쥐고 가야만 한다.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앉는 잭슨을 힐끗 보면서 정혁은 속으로 키득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식, 당황했겠지.’

    알고 있었다.

    잭슨이 그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부분에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려는 의도의 몸짓과 행동들을 통해서 그가 철저히 자신을 아래로 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 봐야 하찮은 발버둥이다.너희 자유 연맹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집어 삼키는 쪽은 우리 제논이 될 거야.’

    녹턴은 엘라를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알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혹시 자네 하….”

    정혁이 총알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 녹턴의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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