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48화 (48/200)
  • ◈48화

    가벼운 복장의 남자였다.

    푸른색 파스텔 톤으로 아름답게 염색된 린넨 재질의 상의와 청바지 차림이 인상적이었다.

    신발도 특별할 것 없는 운동화였다.

    그래도 무기는 챙겨 매고 있었는데 저급 무기 상점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양날 대검이었다.

    대검도 하늬안의 검만큼 크지는 않았다.

    남자는 멀리서도 보일 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흔히 ‘실눈캐’라고 부를 정도로 눈이 작아서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하회탈 같았다.

    그래도 적의는 하나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 선해 보였다.

    그러나 정혁은 알고 있다.

    저 남자의 직위를 말이다.

    저자는 자유 연맹의 총사령관 잭슨이다.

    환한 웃음으로 유명한 자이며 전장에서는 웃는 살인마로 불린다.

    백색의 머리카락이 특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윤기 나는 머릿결은 항상 잘 정돈되어 있다.

    분명 박달수가 온다고 했었는데 왜 저자가 온 것인지 정혁은 또 한 번 머리를 굴려 봐야 했다.

    관계에는 항상 목적이 따른다.

    특히나 움직이기 힘든 어떤 것이 기어코 움직였다면 분명히 요구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늘 웃는 표정을 유지하는 저자의 속은 누구도 쉽게 알 수가 없다.

    정혁은 한창 아크 제국 때문에 골치 아픈 이때에 왜 총사령관이 자신을 마중하러 나왔는지 궁금했다.

    그의 모습이 가까이 올 때까지 정혁은 바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거의 다 마신 물병을 조그맣게 돌리면서 다가오는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잭슨 쪽이었다.

    “이야, 이렇게 뵙네요!”

    목소리 톤부터가 정상적이지 않다.

    텐션이 가득 담겨 있다.

    그는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이 손을 좌우로 마구 흔들어 댔다.

    그러고는 정혁이 바위에서 내려와 서자 한달음에 달려와 악수를 청했다.

    악수도 평범하지 않았다.

    정혁이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자 그는 곧 두 손으로 정혁의 손을 감싸 쥐고는 마구 위아래로 흔들며 특유의 웃음으로 활기차게 말했다.

    “귀하신 분이 직접 이렇게 와 주시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어이구, 누가 할말을.’

    정혁이 물병을 인벤토리에 넣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잭슨의 격한 악수에 몸이 휘청거렸다.

    “사령관께서 직접 오실 필욘 없었을텐데, 자리를 비우셔도 되는 겁니까?”

    약간 차가운 정혁의 말투에도 잭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휴, 아휴 와야죠 와야죠, 제가 직접 와야죠! 제가 없다고 뭐 안 굴러갑니까? 다 잘 굴러갑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악수한 손을 놓았다.

    오히려 묵직하지만 겉으로 감정이 전부 드러나는 김창수 쪽이 상대하기 훨씬 편한데 이 남자는 정말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잭슨은 자유 연맹이 결성되기도 전부터 연맹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수차례 대전쟁에서 세계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에 대항하며 플레이어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게임이지만 너무도 실제 세상과 닮아 있는 오아시스에는 현실에서처럼 사상과 이념의 대립이 존재했다.

    소수의 강자가 힘과 권력을 독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늘 경계하는 세력이 필요했고 카탈 대륙에서 이런 일에 앞장섰던 집단이 잭슨이 몸담았던 집단이었다.

    그들이 성장해서 곧 자유 연맹이 되었다.

    카탈의 노른자 땅을 전부 흡수해 중심부에 넓은 영토를 차지한 그들은 진정한 플레이어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지금도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한’이 있었을 때엔 사상도 이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못했다.

    ‘한’은 권력보다는 힘을 독식한 거대한 존재이자 방관자였기 때문에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게임을 즐기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서로가 서로를 삼키려는 욕심만 강해지고 있다.

    역사가 기록하는 세계 대전쟁 중 1차부터 3차까지는 소규모의 산발적 전투의 연속이었다면 ‘한’이 사라진 뒤 발발했던 4차와 5차 대전쟁은 정말 거대한 불길이었다.

    두 대륙의 모든 세력들이 피를 흘렸다.

    이때 자유 연맹이 본격적으로 결성되었고 플레이어들을 규합하고 오아시스의 비폭력주의 세력들과 동맹을 맺으며 세를 불려 갔다.

    여기에서도 잭슨은 핵심적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모두 그 스스로의 굳건한 의지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강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광석화의 칼날 잭슨]

    그의 칭호다.

    빛보다 빠른 검이라는 또 다른 호칭을 지닌 그는 웃는 얼굴의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속도의 쾌검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더 위험한 자다.

    웃음 속에 언제 검을 꺼내 목을 벨지 모르는 자이기 때문이다.

    ‘웃는 살인마.왜 이건 칭호가 안 되는 거야. 이게 더 솔직하고 좋은데.’

    “소문은 들었습니다! 제논이 무너졌다죠?”

    정혁은 잭슨과 함께 천천히 부유성을 향해 걸어갔다.

    잭슨의 격양된 목소리가 또박또박 귀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네, 네. 국왕이 죽고 왕정에서 연합으로 바뀌었습니다.”

    소식이야 이미 대륙 곳곳으로 퍼졌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 퍼졌느냐인데.뭐, 알게 뭐람.’

    떠벌려 봐야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좋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위축되어 숨어 다닐 성격은 아니기에 정혁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김창수 씨는 잘 계시나요? 마음이 좀 쓰일 텐데 말입니다.”

    “김창수를 아시나요?”

    정혁의 물음에 잭슨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이! 그럼요, 그럼요! 김창수 씨와는 이전에 전쟁에서 몇 번 등을 맞댔던 적이 있습니다. 아니, 아시겠지만 그 양반 오죽 올곧습니까. 서로 마음이 맞아서 다행히 같은 진영에 있었지 아니었으면 상당히 고생할 뻔했죠. 그의 양날도끼 앞에 오금을 지리지 않을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곤 살짝 다가와 귓속말을 하듯 소곤거린다.

    “그, 그 얼굴도 사실 좀 먹고 들어가죠? 워낙 험악하게 생겼잖아요?”

    그렇게 말한 뒤 잭슨은 살짝 윙크를 했는데,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놈이었다.

    부유성 앞에 성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군중 속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정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떠든 쪽은 오히려 잭슨 이었다.

    귀마개가 있었다면 진작 착용했을 텐데.

    생각해 보니 참 다행이었다.

    엘라가 뒤에서 은신하고 있었으면 이미 어느 한쪽은 작살이 났을 수도 있다.

    사실 다 알고 있는 자유 연맹에 대한 소개가 이어지던 참이었다.

    정혁이 무심코 군중 속으로 들어가려 하자 잭슨이 그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혁을 향해 잭슨이 밝게 말했다.

    “오늘은 자유 연맹에 가지 않습니다.”

    “예?”

    “우리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어딜… 말입니까?”

    “엔토리아에 가야 합니다!”

    “엔토리아요?”

    엔토리아라면 강철 망치 본점이 있었던 중립 지역이다.

    지금은 라테가 집어삼켰을 곳이기도 하다.

    “다 아시면서 모르는 척은. 그곳 출신이라면서요?”

    잭슨이 정혁의 등을 떠밀면서 말했다.

    “아, 아니 그렇긴 한데. 지금 그곳 상황 알면서 하는 말이죠?”

    “알지 알지요. 그래서 지금 거기 토벌하러 갑니다.”

    “예?”

    정혁은 다시 걸음을 멈춰서 잭슨의 차림새를 뜯어보고는 납득이 안 된다는 듯이 반문했다.

    “농담이죠?”

    “그럴 리가요.”

    해맑은 저 표정에 주먹을 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혁의 일정에도 엔토리아 방문이 껴 있긴 했다.

    염구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기도 했고 나름대로 조 패더럴의 복수도 해 주고 싶었다.

    라테는 불의 정령왕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성질 역시 불같다.

    오아시스에는 총 네 명의 정령왕이 존재한다.

    불, 바람, 대지, 물이 바로 그들이다.

    대지의 정령왕은 아직 만나 본 자가 없다.

    바람의 정령왕은 주로 엘프들이나 자연의 존재들에게 가끔 모습을 비춘다고 했고 물의 정령왕은 대양을 오가는 자들이 종종 마주친다고 했다.

    이들 중에 플레이어들과 가장 큰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정령왕은 불의 정령왕 라테였다.

    까도 까도 계속 욕만 나오는 존재인 라테는 심심하면 마을이나 도시를 침범하고 불을 지르고 황폐화시켰다.

    정도가 점점 심해지자 평소 썩 사이가 좋지 않았던 물의 정령왕이 그와 한바탕했다고 한다.

    그래도 라테는 여전히 파괴를 일삼았다.

    결국 ‘한’과 물의 정령왕과의 거래로 인해 그는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라테는 긴 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보상 심리로 더 신나게 날뛰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정혁은 약간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상대가 열 받았을 땐 한 보 물러서는 것이 좋을 수 있다.

    굳이 지금이 타이밍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첫 번째 목적지를 엔토리아보다는 자유 연맹 본부로 정한 것인데 여기서 이런 사람을 만나 이렇게 노선이 꺾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가 가서 뭘 해요?”

    이미 군중들에게서 한참 멀어졌다.

    방향은 엔토리아 쪽으로 잡혔다.

    이상하게도 그를 따라 걸으면서 정혁은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산뜻한 대답이 따라왔다.

    “잡아야죠? 그 정령왕 머시기 말입니다.”

    “둘이서?”

    정혁이 손가락으로 그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고 잭슨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네 번이나 끄덕였다.

    ‘아오, 씨.’

    정혁의 인상이 삽시간에 굳어지자 잭슨이 싱글거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궁금해서요.”

    톤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말투에 약간의 무게가 잡혔다는 느낌이 들었다.

    “궁금?”

    “당신 말입니다. 그 능력이 궁금해서.”

    다시 시선을 마주한다.

    웃고 있는 얼굴이지만 냉소적이다.

    “은행나무 엘프의 왕에게 자격을 찾아 주고 신생 왕국이긴 했지만 그래도 남부 대륙의 끝자락에서 성장하고 있던 왕국을 초토화시키며 정권에 개벽을 일으키더니 이제는 유명한 네임드인 김창수를 휘하에 둔 자. 이 희안한 자의 능력이 궁금해서 말입니다.”

    정혁은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잭슨 역시 몇 걸음 앞에 가서 멈추고 섰다.

    “알 만한 것은 다 알고 있나 보네요?”

    “우리도 나쁘지 않은 귀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네요.”

    잭슨은 정혁의 물음에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봐도 좋겠죠?”

    “글쎄요. 대부분이 어디까지인지는 말씀해 주셔야 알 것 같은데요?”

    ‘능구렁이다.저 속에 구렁이가 한 마리 들어 있는 것 같구나.’

    “궁금하시면 지금 보여 드릴 수도 있는데?”

    정혁이 이빨을 살짝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쾌검.얼마나 빠를까. 눈에 보일까?’

    주머니에 넣은 손에서 염구의 매끈한 면이 만져진다.

    활성화되고 전투태세에 돌입할 때까지 시전 딜레이 1.25초.

    그보다 잭슨의 쾌검이 빠르다면 지금 당장에 승산은 없다.

    그럼에도 정혁은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더불어 전투력 측정 따위에 이용될 생각도 없다.

    “이런, 이런 이런. 제가 실례를 범했네요. 용서하세요! 용서!”

    순간 잭슨이 몸을 돌려 두 손 바닥을 맞대 가슴 앞에 내밀고는 손을 위아래로 비볐다.

    정혁은 작게 한껏 들이켰던 숨을 밖으로 뱉으며 알겠다는 듯이 손짓을 했다.

    “사실은 답례 같은 겁니다. 대장장이시잖아요? 강철 망치를 무너트린 라테도 잡고 라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로 또 수완도 얻으시면 저희가 은행나무 엘프와 동맹을 맺을 수 있게 해준 은혜를 갚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가는 겁니다!”

    “아, 은혜.”

    정혁의 말투에 믿기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섞여 있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또 한없이 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잭슨.

    “뭐, 그래요. 좋습니다. 가시죠.”

    그의 말에 잭슨이 휘파람을 불자 곧 공중에서 백색의 히포그리프 두 마리가 날아 내려왔다.

    이미 정혁의 말은 전 마을에서 기력을 다해 팔아 버렸기에 천생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멋들어지고 편안한 안장이 달린 히포그리프라니 호강이다.

    그는 잽싸게 히포그리프 한 마리에 올라탔다.

    둘은 곧 비행을 시작했다.

    정혁은 앞서 날아가는 잭슨의 뒷모습을 보면서 헛웃음을 들이켰다.

    정말 웃긴 것은 그가 스스로 라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정도로 강할 리 없다.

    그럴 수 없다.

    정혁은 마음 가득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당장은 따라갈 수밖에, 그들은 빠른 속도로 엔토리아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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