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47화 (47/200)
  • ◈47화

    “떠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김창수였다.

    그의 표정에서 다양한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용 넘치는 용장의 모습이 조금은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짧은 시간 임팩트 있었던 그의 모습은 어디 가고 지금의 김창수는 고민 속에 휩싸인 중년의 남성처럼 초췌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그는 정혁을 향해서 목례를 했다.

    한참 동안 그의 고개는 올라오지 않았다.

    정혁은 그저 묵묵히 그의 인사를 받고 서 있을 뿐이었다.

    무게가 느껴지는 인사였다.

    “대외적으로는 강하고 힘 있는 길드 마스터이자 인정받는 실력자였을지 모르지만 그 내면엔 사실 친구에게 더 나은 길을 안내해 주지 못했던 연약한 내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었네. 끝까지 망설였던 일을 자네가 결국 해 주었어.”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에 정혁이 짧은 대답을 건넸다.

    오히려 그 대답에 더 속이 후련해졌다는 듯 김창수의 표정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계속해서 준비해 놓겠네. 자네가 부르면 언제든 모두들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내 최선을 다하지. 휘하의 팀장들도 사력을 다할 거네. 이미 그렇게 지시해 놓았으니.”

    “그렇게만 계속해서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자유 연맹이에요. 아시죠?”

    작은 정적이 흘렀다.

    굳은 김창수의 얼굴에는 의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정혁은 그를 보면서 주먹을 건넸다.

    그러자 김창수가 주먹을 뻗어 그의 주먹과 주먹을 맞댔다.

    그 충격에 정혁이 휘청이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닿은 주먹이 아렸다.

    그의 모습을 보자 김창수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이 아저씨야. 약한 모습은 이제 보이지 말고 당신이 그렇게나 원하는 게임이 게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음, 우리 마스터께서는 조금 더 스스로를 단련할 필요가 있겠고.”

    분위기를 풀고자 건넨 농담에 오히려 정혁만 데미지를 입은 느낌이었다.

    ‘역시 채광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여전히 쓰레기나 다름없는 몸뚱이란 말이야.’

    정혁은 김창수를 지나 계속해서 도성의 북문을 향해 걸어갔다.

    새로운 시대의 바람이 제논에 불어온다.

    왕국의 모든 상징들은 무너지고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규칙들이 새겨진다.

    더 많은 플레이어들과 종족들, 거래상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주변의 다른 도시들도 확장되어 건축될 것이고 연합의 힘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충분히 그럴 힘이 있는 길드다.

    제논의 기사단 길드의 지휘 아래 제논 연합은 분명히 카탈의 남부 끝자락에서 끊임없이 북상해 갈 것이다.

    그 걸음을 당기기 위해서 지금 정혁이 먼저 북쪽을 향해 나아간다.

    중간에 상인 지구 쪽에서 거대한 마구간에 들렀다.

    아스칼이 빌려줬던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은행나무 군락지 근처였던 것 같은데, 그 말이 참 튼튼하고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점 주인이 정혁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가게에서 가장 명마라고 하는 말 한 필을 그에게 내어 주었다.

    정혁은 말의 값을 치르고 등에 멨던 짐을 말에 건 뒤 말 위에 올라타려고 했다.

    “가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마구간 한쪽에 기대에 선 하늬안이 있었다.

    “가는 거야? 말이 짧다?”

    정혁의 말에 하늬안이 인상을 잔뜩 구겼다.

    “…요.”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네.’

    정혁이 속으로 낄낄거리면서 화가 잔뜩 난 하늬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마냥 미워할 수는 없다.

    처음이야 어땠든, 저 여자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답이 없던 길에 어쩌다 보니 답을 찾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인정하기 싫지만 고마운 사람이다.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막상 존대를 들으니 이것도 오글거리긴 하네.’

    정혁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원래대로 하자, 원래대로.”

    하늬안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고는 그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정혁은 말을 잠시 마구간에 다시 묶어 둔 채로 조금 으슥한 골목에 따라 들어갔고 하늬안은 조심스럽게 정혁을 향해 말했다.

    “그때 성채에서 만난 마스크 쓴 인간 말이야. 손에 문신 있었지? 검은 말 문신.”

    ‘그래, 생각해 보니 있긴 했다.’

    “그 검은 말 문신과 비슷한 걸 본적이 있어.”

    “어디서?”

    “너는 기억이 안 나겠지만 도돈치아에 도착하기 전에 기억을 잃었던 날 있었지? 그때 네가 있었던 야영지에 플레이어들이 모두 전멸하고 그곳에서 아크 제국의 흑마법사와 어떤 검은 정장의 남자, 그 무리가 싸움을 벌였었거든.”

    ‘아.흑역사.’

    압도적으로 강력했던 마나의 흐름에 의해서 기절까지 했던.

    “그때 검은 정장의 남자가 매고 있던 넥타이에 검은 말 문양이 그 마스크 남자 문신처럼 똑같이 그려져 있었어. 아마 기억으로 엄청 긴 장검을 다루는 남자였던 것 같아.”

    “그래서 뭐, 조심하라는 거지?”

    약간은 퉁명스러운 정혁의 말에 하늬안이 김이 샜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너 그러다 큰일 나. 내가 보기엔 그들이 한둘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려구 그래.”

    “어이구, 이제 걱정까지 다 해 주고, 우리 사이 많이 좋아졌네?”

    하늬안의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입이 오밀조밀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욕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이 풀리더니 혀를 살짝 차며 시선을 다른 데로 옮기고 마지못해 한마디 던졌다.

    “…죽지 말라고.”

    ‘응?’

    오히려 정혁이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란 눈으로 하늬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늬안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지더니 그녀의 손이 갑작스럽게 눈앞에 다가와 정혁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한번 쓸었다.

    덕분에 그의 애매한 표정이 다시 돌아왔다.

    “기를 쓰고 아득바득 살아 돌아올 걸 알기 때문에 걱정 없긴 하지만 몸조심해. 지금은 우리 모두가 기대고 있는 길드 마스터이자 연합의 지도자잖아. 옛날의 싸가지가 아니니까.”

    그녀의 말에 정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달라진 건 없습니다. 저는 늘 강했구요, 앞으로도 더 강해질 거구요.”

    정혁의 말에 하늬안이 재빨리 말을 끊고 조롱의 어투로 한마디 던졌다.

    “어이구 늘 강하셔서 대도 한 자루 못 드셨나?”

    ‘아이씨.아픈 과거를 자꾸만 떠올리게 하네.’

    “언제까지 꽁냥꽁냥할건데? 적당히 좀 하지?”

    그 순간 은신해 있던 엘라가 팔짱을 끼고 정혁의 뒤에서 등장했다.

    하늬안이 소스라치게 놀랐고 정혁은 역겹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꽁냥꽁냐앙?!”

    정혁이 억양을 높이며 엘라에게 눈으로 욕을 던졌다.

    엘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허공으로 사라졌다.

    눈에는 장난이 한가득이었다.

    한 방 먹었다.

    기분이 상당히 나빠졌다.

    정혁은 소름이 돋았는지 몸을 한 차례 떨고는 골목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유익한 정보이긴 하다.

    안나의 말처럼 이들은 이미 정혁에 대한 냄새를 맡고 움직이고 있었다는 거니까.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정혁이 이곳을 이렇게 급히 떠나는 이유도 뒤가 많이 켕겨서이다.

    자신만만하게 모습을 드러낸 H라는 녀석은 기세 좋은 등장에 비해서 처참한 몰골로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정혁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채에서 녀석에게 옆구리를 가격당했을 때 엘라가 그 짧은 순간에 신체에 둘러 준 은행잎 방벽이 없었다면 오아시스 대장장이 칭호의 특성상 일격에 사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깨를 관통당했을 때도 다행히 지속 출혈이 없었고 곧 채광 활성화를 할 수 있어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제는 염구 덕분에 몸을 간수할 수 있는 정도까지 가능해졌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숙련도를 더 올렸으니 채광 모드도 더욱 강해졌겠지만 하지만 왠지 저번 그 녀석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자꾸만 든다.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완전한 강함으로 압도할 때까지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정혁은 그렇게 다짐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마. 집무실의 은행나무에 내 씨앗 하나를 심어 두었어. 위협이 느껴진다면 반응할 테고 나만이라도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엘라의 전음이 정혁에게 또 하나의 안정을 찾아 주었다.

    이 정도면 제논 보호책은 충분하다.

    앞으로 제 앞가림만 잘해 나가면 된다.

    정혁은 말에 올랐다.

    하늬안은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에 올라 앞을 향해 다각다각 걸어가는 정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법 리더다워지긴 했지.”

    그녀는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몸을 돌려 연합 본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자유 연맹의 영토까지는 제논에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크 부족의 영토를 우회하고 여러 중립 구역을 지나면 서서히 자유 연맹의 깃발이 걸린 작은 마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유 연맹의 비호를 받고 있는 마을들과 도시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면 자유 연맹의 본부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듣기로 자유 연맹의 병력은 대부분 아크의 남하를 막기 위해 모두 북쪽의 연맹 영토 경계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지나치던 마을과 도시에서도 무장한 연맹원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남쪽의 제논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혁은 계속해서 자유 연맹 본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 사이 염구를 이용해서 오아시스 대장간을 들락거리며 중간중간 여러 몬스터들을 사냥하여 얻은 아이템으로 무기나 장비보다는 필요한 스크롤을 제작하고 숙련도를 올렸다.

    엘라가 대장간을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엘라는 필요할 때까지 대장간에서 쉬기로 했다.

    정혁의 숙련도에 따라 점점 확장되고 있는 대장간에 엘라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늘 심심했던 조 패더럴이 대화 상대가 생겼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어서 엘라가 굉장히 귀찮아한다는 것 빼고는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정혁 스스로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나지막이 언덕을 지나자 저 앞에 거대한 도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래에 거대한 호수가 자리하고 있고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암석 위에 세워진 커다란 도시는 암석 외곽을 중심으로 높은 돌벽이 든든히 방어하고 있으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노출형 엘리베이터가 눈에 띈다.

    공중으로 접근하는 몇몇의 상인들이나 전투 요원들이 보인다.

    아래 지상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길에서 자유 연맹의 본부 부유성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봐도 멋진 광경이다.

    자유 연맹의 부유성은 이곳의 자랑이자 자유 연맹의 상징이다.

    자유 연맹의 영토 내에서만큼은 이름 그대로 모두의 자유가 지켜진다.

    개인의 안전도 보장이 되었고 자유 연맹의 증명서만 들고 있다면 어디서든 거래나 보호가 가능했다.

    이는 자유 연맹이 그만큼 카탈 대륙에서 힘 있는 연맹이라는 증거이자 핵심 상권 보호 지역으로서 부흥의 길을 걷고 있다는 근거이기도 했다.

    “이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정혁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그는 박달수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이미 정혁에게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정혁은 그를 통해 자유 연맹 지도부와의 안면을 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논에서 이곳까지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은행나무 왕국도 안정기에 들었을 것이다.

    아스칼이 와도 괜찮았지만 박달수 본인이 한사코 오겠다고 했다.

    곧 근처에서 인기척이 났다.

    정혁을 고개를 돌려 언덕 아래의 길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정혁이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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