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46화 (46/200)
  • ◈46화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팀장도 김창수도, 그 누구도 그의 단호한 의사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당장 그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의 힘 앞에 정혁의 포부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믿음이 조금씩 생겼기 때문이다.

    회의장을 나가면서 김창수와 안나가 동시에 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정혁은 일단 안나와의 대화를 우선하기로 했다.

    그녀와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논에도 꽤나 실력있는 석공과 목수들이 있는 모양이다.

    무너졌던 거대한 시계탑도 어느새 복구되어 있었고 비르파인 국왕의 흔적이 남은 왕의 집무실도 새롭게 재건축되어 있었다.

    이제 왕국이 아니라 연합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왕가에 맞는 디자인이 아닌 연합 본부 지도자 집무실에 맞게끔 심플하면서도 실용적으로 지어져 있었다.

    마치 현실속의 현대 건축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집무실 앞 광장에는 노란색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이목이 싫어서 은신 상태로 정혁을 따라다니던 엘라는 은행나무를 보더니 화색이 돋아 은신을 풀고 곧장 은행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그녀는 마치 나무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나무 근처에서 빙빙 돌면서 여기저기 가지들을 건드렸다.

    정혁은 안나와 함께 집무실 1층에 들어가 거실로 향했다.

    푸근한 소파가 그들을 반겼다.

    생각보다 정혁의 마음에 들었다.

    이제까지 과거 중세시대를 따른 것 같은 성벽들, 왕궁의 디자인들만 보다가 이런 현실과 맞는 건축물 속에서 소파를 발견하니 한결 편안했다.

    “특별 제작인가?”

    “뭐, 나도 이 편이 좋으니까.”

    “나쁘진 않네.”

    안나와 정혁은 이곳에서야 격식 없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냥 유쾌하진 않아. 너와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게.”

    “피차일반이거든.”

    정혁의 날이 선 말투에 안나 역시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그녀는 등을 소파에 완전히 기대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높은 층고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곧 눈을 감고 큰 숨을 들이쉬었다.

    ‘뭘 얘기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정혁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녀를 계속해서 주시했다.

    “그래, 인정하지.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녀석이 네게 엄청난 힘을 준 건 맞는 것 같아.”

    그녀는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너를 마지막으로 이제 다 모였어. 긴 시간을 기다려 왔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우리가 주시하고 있었던 ‘한’이라는 녀석이었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나는 전혀 못 알아먹겠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속 시원하게 전부 다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감시받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그럴 순 없어. 아마 때가 되면 우리 전부가 모이는 날이 올 거야.”

    “우리라면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들 말하는 건가?”

    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다.

    마치 조용하라는 뜻 같았다.

    그녀는 소파 앞의 테이블에 놓인 종이에 펜으로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아시스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정혁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글 위에 두 줄로 선을 그어 내고 아래에 몇 글자 더 적어 내렸다.

    ‘우리는 그들과 반드시 싸워 이겨야만 한다.’

    여전히 알 수 없다.

    오리무중이다.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사람들은 장막에 가려 숨어 있다.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칭호는 드러나지 않으며 그뿐만 아니라 정혁이 그러하듯 각자 나름대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은 단순히 부여된 힘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 있는 힘이란 말인가? 오아시스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니? 오아시스 안에 어떤 암수라도 숨어 있다는 건가? 그녀가 굳이 말이 아닌 글로 이런 이야기를 전달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아마 쓰고 있는 글조차도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위험한 건 이제 우리 쪽이야.”

    “위험이라면 성채에서의 사건을 보고 하는 말이야?”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검은 말, 이니셜이 새겨진 마스크. 그들을 조심해야 해.”

    “사냥꾼들인가?”

    “비유하자면 그렇지. 아주 오래되고 강력한 사냥꾼들.”

    그녀의 말대로라면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들이 왜 칭호를 숨길 수 있는지 설명이 가능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게 된 이후로 정혁은 늘 의문이었다.

    오아시스 전체의 시스템에서 오류라고 느낄 정도의 힘이니까 말이다.

    소위 균형이 맞지 않는 힘이다.

    만약에 정혁이 ‘한’이었을 때 지금의 자신과 같은 자를 만났다면, 혹은 정말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자를 만났다면? 전에도 했던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은 약간 마음이 바뀌었다.

    한은 여전히 랭킹 1위로서 군림했을 것이다.

    비록 패배했을지라도 어떻게든 기를 쓰고 더욱 강해져서 그를 굴복시켰을 테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이들은 랭킹이나, 힘, 권력 따위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의 생존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인다.

    어둠 뒤에 숨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강한 힘이 있지만 강한 힘을 아득히 뛰어넘는 어떤 존재를 향한 두려움이 내재된 자들인 것만 같다.

    “너는 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똑똑하다고 생각해. 그동안의 모든 전투 경험을 통해서도, 네가 이전 랭킹 1위였을 때에 나름의 법칙으로 세계를 주름 잡던 경험을 통해서도 흐름을 잡아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겠지. 내 이 짤막한 대답들을 통해서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지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안나가 종이를 집어 살짝 흔들자 불꽃이 일어 종이를 천천히 불태워 갔다.

    “너도 나도 혼자가 아닐뿐더러 그들의 공격이 시작된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그런 의미에서 네가 혼자 다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해. 너는 이미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존재니까.”

    그녀의 말에 정혁이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리곤 몸을 앞으로 당겨 손을 비비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그러니까 나는 여기 처박혀 있어야 한다?”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념과 포기의 제스처였다.

    행동의 모양새를 보니 딱 알겠다.

    지식과 경험이 풍부하면 뭐하나, 껍데기가 저런 모습일지라도 내면은 천둥벌거숭이 ‘한’인 것을.

    “그럼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거지?”

    그녀의 말에 정혁이 입을 삐죽 내밀고 끄덕인다.

    어둠 속에 숨는 것은 적의 뒷목을 찌르기 위한 계획의 일부일 뿐.

    나를 지키는 것? 그런 건 모른다.

    숨지 않는다.

    사냥감이 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되레 나를 쫓던 사냥꾼이 나의 사냥감이 되었을 때에 쾌감을 즐기는 편이니 말이다.

    “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고, 나는 이곳에서 반드시 랭킹 1위가 되어야만 해.”

    정혁이 몸을 일으켰다.

    거실 한쪽은 거대한 통유리로 되어 있다.

    광장이 보이고 광장 한쪽에 은행나무 아래에서 누워 있는 엘라가 보였다.

    정혁은 통유리 가까이로 다가가 뒷짐을 지고 섰다.

    광장의 땅 위에서 있었던 역사적인 순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흐려졌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도 ‘한’을 잊었으리라.

    “나에게 걸렸던 조건보다도 나는 이제 랭킹 1위가 되겠다는 목표가 확고해졌어.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동료를 모으고 세력을 키우고 기반을 다져서 언젠가 또 내가 사라지더라도 세계가 다시 혼란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몰랐거든.”

    정혁이 뒤를 돌아 안나를 바라보았다.

    “김창수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걸. 나를 그렇게 따라다녔는데도 당시에는 몰랐었어. 그가 내게도 무언가를 배워 갔고 힘의 균형에 대해서 느끼고 그것을 실현시키려 발버둥 쳐 왔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 당신네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알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 게임은 재밌고 즐거운 거여야만 해. 게임 속에서까지 괴로울 필요는 없잖아.”

    “그런 이야기하기엔 좀 낯부끄럽지 않나? 자신의 이전 행보를 생각해 보면 말이야.”

    안나의 말에 정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분위기 좋았는데 초를 치네. 뭐, 그때는 그래도 나를 때려잡으려고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았었잖아. 세력이니 대립이니 그런 거 없이 서로 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지역을 나눠 방비하고 레이드 팀을 짜고 왕국, 제국, 연합 이런 복잡한 땅따먹기 싸움 없이 그저 나라는 놈 하나 잡기 위해서 열과 성을 다했잖아. 그런 게 게임 아냐?”

    안나가 손을 두어 번 돌리며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이 인상을 썼다.

    “…나, 나도 좀 즐, 즐겼고.”

    정혁이 마지못해 말하자 안나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해 줄 이야기가 많지만 네 의지가 그렇다면 알겠어. 나는 이곳에서 우리 마스터께서 지시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해 가고 있을 테니 부디 몸조심하라고. 아, 그리고.”

    안나가 인벤토리에서 끈으로 엮어진 팔찌 하나를 꺼내 정혁에게 건넸다.

    그것이 정혁의 손에 닿자 황금빛 마나가 그 안으로 옅게 스며들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반응하는 팔찌야. 각자의 고유 마나에 호응하게 되어 있지. 너도 알다시피 너는 시간의 마나 즉 황금빛 마나를 가진 플레이어고 나는 피를 근간으로 하는 붉은빛 마나를 가진 플레이어야. 둘 다 희귀한 마나를 다루지.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팔찌에서 네 마나가 빛을 낼 거야. 물론 너만 알 수 있을 거고.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지금처럼.”

    완전히 정혁과 동기화가 된 팔찌에 붉은 마나가 안나로부터 당겨져 오기 시작했다.

    마치 안나와 연결된 끈 같았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네 존재를 알고 있으니 별 탈 없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혹 주황색으로 빛나는 마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에겐 모든 사실을 전부 들을 수 있느니 꼭 쫓아가서 만나 보도록 해.”

    [??? 팔찌]

    - 거래가 성사된 특수한 자들의 마나에 반응하는 팔찌

    - 그 외 특별한 능력 없음.

    파괴 불가능.

    ‘뭐 이런 이상한 아이템이 다 있냐.’

    정혁은 아이템의 상태 창을 치워 버리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가 팔찌를 보고 있는 정혁을 바라보다가 뭔가 번뜩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젠트라는?”

    “그것 역시 긴 여정이 되겠지. 그래도 반드시 찾을 거고 반드시 해낼 거야.”

    “내 평생에 들어본 최고이자 최악의 계획이긴 해도. 달성만 해낸다면야…….”

    휘유-

    안나가 휘파람을 불면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기다릴 것도 없고 지금 떠날 거야.”

    “지금?”

    “그래, 지금. 언제나 그랬듯 조용히 사라지고 불현듯 나타날 테니 걱정 마.”

    “아니, 그럼 다음 목표라도 좀 알아야지!”

    안나가 몸을 일으켰다.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겹쳐 있었다.

    “염구. 이 주인을 좀 다시 만나 봐야겠어.”

    마지막 남은 염구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정혁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자유 연맹도 만나 봐야겠고.”

    정혁의 말에 안나가 혀를 내두르며 큰 숨을 들이 쉬었다.

    “어쨌든, 항상 조심해. 아시겠습니까? 마스터?”

    “예이,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정혁이 맞받아쳐 주고는 집무실을 나왔다.

    엘라는 다소 아쉬운 듯이 은행나무를 바라보다가 곧 정혁의 곁으로 돌아왔다.

    광장을 지나 연합 본청 건물로 향하는 돌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김창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뒤를 따라오던 안나는 정혁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어딘가로 사라졌고 정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김창수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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