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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44화 (44/200)
  • ◈44화

    “수월하지는 않았나 보죠?”

    한산한 도성의 중심부를 지나며 정혁이 드웨이크에게 물었다.

    이미 도성의 주민들은 모두 집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이후여서 길거리에 사람들은 없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혁의 마음속에 물음표가 생겼다.

    하긴 어떻게 보면 왕국의 전체 전력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단이 반기를 들었는데 집권층을 무너트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비르파인 국왕의 과거가 김창수만큼 화려할지라도 현역과 은퇴자 사이엔 분명히 갭이 존재한다.

    그럼 드웨이크가 다급하게 정혁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말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정혁의 머릿속에 뭔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 그래.’

    “혹시 김창수 마스터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암묵적인 인정이라도 봐도 무방한 반응이었다.

    그래, 김창수는 그러고도 남을 양반이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

    도성 점령은 순식간이었다.

    유혈 사태를 바라지 않았던 그가 비르파인과의 독대를 위해 도성을 찾았지만 국왕의 책사 도리에르의 완고한 거절 앞에 무산이 되어 버렸다.

    비르파인 국왕이 그를 만나기를 한사코 거절했노라 도리에르는 그렇게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미 모든 전투 준비를 끝내고 마음을 굳게 먹은 김창수였기에 더 지체할 일은 없었다.

    왕궁의 벽을 박살 내며 외부의 길드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성채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긴 했다만 안나는 계획대로 움직이기를 조언했다.

    김창수는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다.

    비르파인 국왕 곁에서 정세에 대한 조언을 해 주던 간신 도리에르 책사가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왕궁 제 1 수비대를 불러 김창수와 안나를 막아섰지만 수비대 전 병력도 김창수의 분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도리에르는 금방 붙잡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도망치지 않았고 떳떳하게 두 사람 앞에 서서 온갖 모욕적인 말을 쏟아 냈다.

    왕의 집무실 앞까지 질질 끌려온 그는 특유의 괴팍한 목소리로 비르파인 국왕의 이름을 고래고래 소리쳐 부르며 김창수와 안나를 능멸하는 말들을 이어 갔다.

    문이 열리고 비르파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비르파인은 수려한 자였다.

    긴 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고 파란 비단 재질의 옷이 발아래까지 늘어져 있었으며 제논의 상징인 포효하는 사자의 용맹한 모습이 새겨진 두꺼운 허리띠를 차 옷의 중간에서 무게를 잡아 주었다.

    그의 걸음에는 당황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나의 친우여.”

    “국왕 비르파인.”

    둘은 작게 고개를 숙이며 서로에게 예를 표했다.

    “정녕 이것이 자네의 결정인가?”

    비르파인의 목소리는 마치 옥이 굴러가는 듯 갸날프고도 아름다웠다.

    안나는 그가 과연 한 손 검을 쥐고 대전쟁의 화마 속에서 김창수의 등을 지켰던 자인지 궁금했다.

    외향적으로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는 샌님 같은 자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못 본 사이 많이 무뎌졌구나.”

    그의 말에 비르파인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항상 그런 식이었지.”

    그가 돌계단을 하나씩 내려왔다.

    “독선적이고.”

    또 한걸음이 내딛어진다.

    “위선적이며.”

    마지막 걸음이 지면에 닿는다.

    “허물에 싸여 있어.”

    비르파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네, 나의 친우여.”

    김창수가 양날 도끼를 고쳐 쥐었다.

    여전히 욕설만 뱉던 도리에르가 시끄러웠는지 안나가 침묵 마법을 그의 입에 걸어 버렸다.

    “무엇을 안다는 거지?”

    비르파인의 목소리에 비해 김창수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자네는 나를 죽이지 못해.”

    비르파인의 눈동자에는 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뒷짐을 지고 있는 손을 펴자 오른손에 붉은색 검집의 한 손 검이 보였다.

    “아니, 그는 당신을 죽일 겁니다.”

    안나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비르파인은 오히려 차가운 미소로 안나를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나는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양날 도끼를 쥔 손이 작게 떨리고 있다.

    좋지 않은 신호다.

    김창수는 의를 중요시하는 자다.

    이미 비르파인은 김창수가 굉장히 괴로웠던 순간에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자로 이를 큰 빚으로 여기고 있다.

    더불어 대전쟁 속에서도 함께였던 자다.

    물론 힘도 능력도 김창수보다는 아래였지만 친구 사이에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강한지가 아니라 서로의 어깨에 기댐이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갈등을 정리하고 이제 겸허히 현재의 모든 분란들을 진정시켜 제논의 본모습을 찾겠다 다짐했지만 비르파인의 얼굴을 앞에 두고 보고 있으니 쉽사리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사실 이런 사람이네, 친우여.”

    비르파인이 김창수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말을 이었다.

    “자네에 곁에 있었던 이유? 어쩌면 이런 앞날을 미리 예견해서일지도 모르지. 이 비정한 세상에서 나를 보호해 줄 든든한 방패막이가 있는 삶. 즐길 것들을 충분히 즐기면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삶. 재밌고 즐겁더군. 자네와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즐기던 게임보다야 지금의 오아시스가, 이 제논이 훨씬 재밌고 좋아.”

    뒷짐을 진다.

    붉은 검집이 등 뒤로 숨겨진다.

    “사람들은 말이야. 가끔 이 오아시스가 현실인 줄 알지. 잠을 자지 않아도 가수면 상태에서 즐기는 게임이니. 배고픔도 느끼지 않아. 이곳에서 먹는 음식이 실제로 우리 몸에 공급되는 놀라운 기술력을 지닌 캡슐 속에 있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본래 모습도 잊고 이곳에서 아등바등하는 거 아니겠어.”

    그가 몇 걸음 더 다가온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죽으면 언제든 다시 접속할 수 있는 이런 게임 따위에 현실보다 더 몰입해서 기를 쓰고 뭔가를 해 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야.”

    안나도 김창수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 뭐라는 답변을 달지 못했다.

    “나야, 그동안 참 즐거운 삶을 누렸네만 친우, 그대는 여전히 그런 삶을 견디고 있군.”

    어느새 비르파인은 김창수의 두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게임에 필요 없는 의리, 정 같은 것에 스스로를 묶어서 말이야.”

    “지랄 염병하네.”

    그 순간 도리에르의 무언 속 발버둥도, 비르파인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김창수의 오른쪽 귀를 스치듯 지나간 동그란 어떤 것이 비르파인의 머리에 구멍을 냈다.

    도리에르의 머리에도 동일한 구멍이 나 있었다.

    비르파인의 동공이 천천히 확장되면서 쥐고 있던 검집이 땅에 먼저 떨어졌다.

    힘을 잃은 신체는 다리부터 무너져 내렸다가 온전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양날 도끼를 쥐고 있는 김창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나는 직감적으로 뒤를 돌아 당당히 걸어오는 정혁을 향해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기 거북하긴 하네.”

    안나의 경고를 간단히 무시한 정혁이 김창수의 곁을 지나 비르파인의 시체를 발로 툭툭 밀며 그 자리에 섰다.

    “어때? 새로운 왕을 맞이할 준비는 됐어?”

    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정혁을 쳐다보았다.

    그를 데리고 온 드웨이크도 그리고 주변의 팀장들과 길드원들도 동시에 당황해서 제각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엘라만큼은 약간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는 항상 이런 식이었지.”

    살기.

    엘라가 손가락을 들어 김창수를 가리키며 경고했다.

    “적당히 해.”

    “적당히?”

    엘라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창수가 그의 몸을 기대듯 세워 놓았던 양날 도끼를 치켜들며 정혁을 노려보았다.

    “그 버릇 단단히 고쳐 줘야겠어.”

    김창수의 양날 도끼가 곧바로 정혁에게 향했다.

    정혁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염구 일곱 개를 동시에 김창수에게 날려 보낸다.

    엘라는 자신의 경고를 가뿐히 무시한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기세로 초록빛 마나를 사방에 개방하며 순식간에 주변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염구가 그의 양날 도끼에 부딪쳐 찬란히 분산된다.

    [내가 알아서 할게]

    정혁의 전음에 엘라가 정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손에는 일전의 망치가 쥐어져 있었다.

    크게 회전하며 공중을 가르는 거대한 양날 도끼가 정혁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으나 그의 망치에 의해 간단하게 막혔다.

    쿠웅- 하는 소리가 지면을 가르고 정혁이 서 있던 땅에 작은 균열들이 퍼져 갔다.

    엄청난 무게감이 양팔에 전달된다.

    그러나 막을 만했다.

    엘라는 은행잎들을 넓게 펼쳐 그들의 전투를 다른 이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안나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엘라의 차가운 눈빛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새 또, 말도 안 되게 강해졌군.”

    오른쪽 하단.

    머리 위에서 사라진 양날 도끼가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그어진다.

    정혁은 왼쪽으로 몸을 비틀며 쳐올려지는 도끼날에 망치를 이용해 강한 충격을 준다.

    낙뢰가 공중에서 떨어졌지만 김창수를 그것을 그대로 맞고도 멀쩡하게 서 있었다.

    정혁은 전신에 돋아 오르는 전율을 느끼며 희열감에 고취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측면을 향해 도끼날이 저돌적으로 돌진한다.

    정혁이 그것을 튕겨 막자 김창수의 목소리가 따라 들어온다.

    “안나에게 듣고 이해하려 했다. 너의 불쾌한 말들의 당위성을. 제논의 현재 상황과 국왕의 문제,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납득하기 힘들었다.”

    연이은 공격에도 물 흐르듯 피해 내는 정혁에게 김창수의 도끼날은 더욱 서슬 퍼런빛을 뿜어냈다.

    그 순간 그의 도끼에 푸른빛이 낙하하고 그의 뒤로 거대한 형상이 천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김창수의 고유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투사의 결의.

    그의 힘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등 뒤의 투사가 전투에 가담한다.

    이에 엘라가 불리해 진 것 같은 전황에 다급히 자연의 마나를 응집했으나 정혁이 이를 느끼고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투사의 힘과 김창수 본연의 힘 앞에서 각기 다른 공격들에 정혁은 천천히 응수하기 시작했다.

    염구의 화려한 움직임과 두 망치의 열기, 전력이 도끼날과 부딪치고 산화한다.

    거대한 투사의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에도 정혁은 주눅 들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솟아오른다.

    다시 한번 김창수의 도끼날을 공중에서 막아 냈을 때 더 큰 균열이 대지를 박살 냈다.

    정혁의 입에서 옅게 피가 배어 나왔다.

    “납득하기 힘들어서 그래서 납득하려고 이곳에 왔다. 그리고 그래… 그래.”

    김창수의 낮은 목소리.

    그의 공격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혁은 그의 도끼날을 쳐 올렸다.

    도끼날이 사라진 곳에 투사의 방패가 빠른 속도로 그를 짓뭉개기 위해 날아옴을 보고 옆으로 몸을 날려 재빨리 육중한 방패를 피해 냈다.

    김창수가 도끼를 들어 정혁의 머리를 겨누었다.

    “그래, 네놈의 말이 맞다. 나는!”

    김창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왕의 집무실 앞 광장을 울린다.

    “나는! 후회한다! 지금의 나의 모습을 후회한다! 이 왕국에 귀속된 것을 후회한다! 애초에 길드 마스터가 된 것도 후회한다!”

    김창수가 말을 마치고 양날 도끼를 떨어트렸다.

    동시에 등 뒤에 있던 투사가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나는 단지 나의 친우와 즐거운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김창수는 힘 빠진 걸음으로 쓰러진 비르파인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 팽개쳐진 그의 검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기엔 너무, 너무 멀리도 와 버렸구나.”

    김창수는 붉은 검을 집어 들고 멍하니 검 손잡이를 쳐다보았다.

    깔끔하게 말린 손잡이의 천을 천천히 걷어 내자 낡고 찢어진, 꽤 오래전 감아져 긴 세월을 보냈을, 천들이 드러났다.

    비르파인도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하며 지냈을까.

    엘라가 은행잎들을 거뒀다.

    광장에 모인 제논의 기사단 모든 길드원들은 그저 묵묵히 마스터의 무거운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혁은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황금빛 마나와 함께 두 망치가 손에서 사라졌다.

    김창수가 뒤를 돌아 정혁을 바라보았다.

    정혁 역시 김창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김창수는 곧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는 주변을 바라보며 정혁에게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특유의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를 갖춰라. 제논과 우리 길드의 새로운 주인이시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모든 길드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마스터를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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