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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42화 (42/200)

◈42화

그 수상한 자가 발을 한 번 아래로 차자 주변의 일렁이던 모든 흙먼지가 한순간에 흩어져 가라앉았다.

그의 손에는 길드에 소속된 건물 관리인의 시체가 아래로 축 처진 채 들려 있었다.

시체는 이내 그의 손길에 따라 저 멀리로 내동댕이쳐졌다.

남자는 손을 툭툭 털었다.

그러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시선이 여기 저기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정확히 정혁과 하늬안이 있는 건물 쪽에서 멈췄다.

얼핏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상한 자의 덩치는 꽤 컸다.

김창수만큼은 아니어도 180 센티미터의 장신에 다무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락부락하진 않았지만 뭐랄까 외형만으로 상당한 위압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자주색 바지에 민소매 후드를 입고 있다.

그렇다고 후드를 깊게 눌러 써 얼굴을 가리진 않았다.

얼굴에 입을 제외하고 눈과 코를 가리는 안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양손 손등에 무언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문신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곧 손가락을 손바닥에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붉은 색 발광하는 구슬 같은 것이 튀어나와 그의 주변을 보호하듯 회전하기 시작했다.

무너진 잔해 사이로 살아남은 몇몇의 건물 관리자들과 석공들이 정신을 차리고 뛰쳐나왔다.

그들이 수상한 자를 발견하고 즉시 무기를 꺼내 들어 달려들었으나 붉은 구슬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순간 모두 송장이 되어 쓰러졌다.

하늬안도, 정혁도, 그리고 엘라도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하늬안의 얼굴이 달라 올라서 당장에라도 뛰쳐나가려는 것을 정혁이 붙잡아 말렸다.

엘라는 아랑곳 않고 수상한 자를 응시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염구잖아.”

“염구?”

엘라의 말에 정혁이 물었다.

물론 정혁도 알고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동시에 생소한 단어이기도 하다.

염구.

불타는 구슬이라는 뜻을 가진 이 아이템은 상당히 귀하다.

그뿐만 아니라 염구 본연의 능력은 적어도 5개 이상을 보유했을 때만 무기로서의 세트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굉장한 희소성을 가지고 있는 이 아이템을 구태여 찾으려는 시도가 없었다고 기억한다.

염구가 세상에 퍼진 것은 불의 정령왕 덕분이었다.

염구의 주인은 본래 불의 정령왕이다.

맞다.

정혁이 ‘한’이었을 때 정복했던 그 라테 말이다.

그가 라테를 처리했을 때 염구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라테는 이미 오아시스 곳곳으로 염구를 퍼트려 놓은 뒤였고 한은 아쉽게 입맛만 다셔야 했다.

‘그랬던 염구가 도대체.아니, 어떻게? 그것도 7개나 저자의 곁을 지키고 있다니.’

“염구라면 하….”

엘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정혁을 바라보았다.

“알아 나도.”

정혁 역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천하의 엘라가 이런 장면에 당황하고 있을 리가 없다.

저자가 누구든 간에 엘라가 본래의 힘을 펼친다면 전투에서 밀릴 일은 없다.

다만, 염구는 눈이 쫓아가지 못할 속도로 움직이며 소유자의 숙련도에 따라 활용 범주의 차이가 명확히 갈린다.

방금 장면을 통해서 봤듯 저자는 확실한 숙련자다.

엘라가 걱정하는 것은 정혁이다.

아무리 엘라라고 해도 정혁을 완전히 보호하면서 싸울 수 없다.

염구를 저 정도로 다룰 수 있다면 전투 능력도 상당할 텐데 그에 반해 무언가를 지키는 입장인 그녀에게 이번 싸움은 불리할 것이 뻔하다.

“어이어이!”

바깥의 남자가 소리친다.

“니가 올래, 내가 갈까?”

그의 목소리에는 당당함이 가득했다.

얇지도 굵지도 않았지만 패기가 넘친다.

그는 이곳에 그저, 놀러 온 것만 같다.

심심한 차에 소소한 목적을 가지고 마실 온 느낌이랄까? 정혁은 왠지 안나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정혁에게 모두 공개하지 않았다.

물론 당장에 제논을 공격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정혁의 입장에서 보면 안나가 숨기고 있는 정보들이 그에겐 훨씬 더 중요했다.

캐묻고 싶었고 그럴 수 있었다.

다만 질문을 멈추고 한 보 물러선 이유는 스스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어 봤자 유익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진실이 무엇이 되었든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다행히 정혁도 키메라 사냥 이후로 꾸준히 자신의 칭호를 숨기고 있었다.

아마도 드웨이크 말고는 그의 칭호에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반 플레이어는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창 날뛰던 때의 ‘한’도 흔적조차 알지 못했던 존재들이다.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들 말이다.

그렇다는 건 정말 꽁꽁 숨어 있었다는 뜻인데 왜일까?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안나도 김창수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것일 것이다.

“안 나갈 거야?”

하늬안의 짜증 섞인 말투에 정혁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얘가 주제 파악을 못하네.”

엘라가 혀를 차며 하늬안을 비난했지만 하늬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진퇴양난.

정혁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며 별채의 문고리를 돌렸다.

끼익 소리와 함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염구의 속도를 눈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직감적으로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있긴 하다만 했지만 그 직감에 모든 것을 걸기엔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자.

저자가 만약 자신을 죽이고자 했다면 이렇게 화려하게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애초에 이렇게 등장했다 할지라도 기다리는 시간조차 갖지 않을 것이다.

상대도 알고 있다.

이곳에 엘라가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엘라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엘라는 마계의 군주급 악마와 몇 합 정도는 겨뤄 볼 수 있는 오아시스의 정말 강한 존재 중 하나다.

일개 플레이어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이다.

그런 존재에게 비호를 받는 자신을 죽이려면 속전속결이 답이다.

게다가 기습암살에 능한 무기를 쥐고 있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도발을 했다? 그렇다면 그는 당장에 자신을 죽일 의도가 없다는 뜻이다.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가정이 참이라면, 그렇다면 상대는 탐색일 가능성이 높다.

위협과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다.

‘두 가지겠지.제논 혹은 제논의 기사단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나에게 보내는 위협의 메시지.’

정혁은 다시 마음을 붙잡고 온전히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

하늬안이 대도를 두어 번 돌리면서 손목을 풀었고 엘라 역시 고고하게 정혁의 뒤에서 부유하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번져 있다.

염구가 요란스럽지 않게 회전하며 그를 보호하고 있다.

화염의 고리 같다.

불타오르는 색깔이 작열하는 적색이었다가 더없이 차가워 보이는 푸른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정혁의 주위로 은행잎들이 천천히 생성되기 시작한다.

은행잎들은 회전하면서 정혁의 주위를 돌았다.

양은 염구보다 훨씬 많았지만 염구만큼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말이다.

“내 은행잎의 강도도 어디서 꿀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지만 상대가 염구라면 순식간에 분쇄될 수 있어. 더불어 상성이 안 좋아.”

엘라가 작게 말했다.

그렇다.

엘라는 근본적으로 나무다.

나무에게 불은 상극이다.

작은 불덩이들이야 그녀가 일으키는 자연계 마법들로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지만 염구의 불은 라테의 불이다.

자연계 정령왕의 무기나 본질적 공격은 같은 자연계의 존재들에게 치명적이다.

엄밀히 따지면 엘라보다 정령들이 더 높은 존재로 평가된다.

그들이 자연의 흐름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방법이 있을까?”

정혁이 물었지만 따라오는 엘라의 대답은 없었다.

엘라의 감각은 잔뜩 곤두서 있다.

그녀는 지금 수없이 많은 변수에 변수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정혁은 한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하필이면 저런 적이 자신의 앞에 등장하다니.

지금 이 타이밍에, 지금 이 몸뚱이로는 승산이 희박한 적이 말이다.

“우리 너무 그렇게 날카롭게 하진 말자구.”

먼저 말을 건 쪽은 상대편이었다.

남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다가오던 걸음을 멈춰 섰다.

“예상했겠지만 나는 그냥 인사차 온 거야.”

자세히 보니 남자의 안면 마스크에는 H라는 영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양손에 새겨진 문신도 눈에 들어온다.

검은 말이었다.

앞발을 들어 올린 말.

“도대체 어떤 양반이길래 E가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궁금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남자에게 하늬안이 소리쳤다.

“왕궁에서 보낸 거야? 어디서 온 거냐!”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늬안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대도는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그녀는 두 손을 감싸 쥐고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손이 염구에 의해 관통당한 것이었다.

“짹짹거려, 시끄럽게.”

남자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친다.

“재수 없네. 인간들은 참, 변하지 않아.”

엘라가 고개를 저으며 정혁의 앞으로 나섰다.

“알지? 그 구슬들로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는 거?”

엘라의 말에 남자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여부가 있을까요, 감히 저 따위 인간이 당신같이 고귀한 존재에게 뭘 들이밀 수 있겠습니까.”

그리곤 손가락으로 정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저 짐짝 짊어지고 가능하겠어요?”

그리곤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까닥거렸다.

모욕적인 위협이다.

“참 그 절차가 뭔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한 건 올리고 싶은데 말이야. 사는 게 쉽지 않아, 그치?”

“원하는 게 뭐야?”

정혁의 물음에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하핫! 내 말을 어디로 들어 처먹은 거야. 진짜야, 네 낯짝이 궁금해서 왔다니까?”

“E라느니 이런 말은 뭔데?”

“에이, 그것 까지 알려 주긴 그렇지.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는데?”

“농담도 적당히 해. 지금 이 상황에서 프라이버시니 뭐니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아?”

“그럴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가능한 건데?”

조롱과 비꼼투성이다.

슬슬 정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팍팍 올랐다.

오히려 엘라가 정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야, 야, 가라앉혀.]

[한판 붙을까?]

[무슨 헛소리야. 절대 안 돼. 너보다 더 답답한 건 나야. 허튼짓 절대 하지 마.]

엘라가 인상을 구기며 정혁을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앞을 주시했다.

“그래도 온 김에 선물이라도 하나 주고 가고는 싶은데.”

남자의 말에 엘라가 순식간에 지면에서 은행나무 잎들을 생성해 끌어 올렸다.

염구는 이미 사라졌다.

노란빛 파도가 공간을 메우고 휘몰아쳤다.

정혁을 감싸고 있던 은행잎 보호막이 더욱 두꺼워지며 사방을 경계했다.

염구의 빛줄기가 노란 파도를 뚫고 사방으로 튀었다.

마치 위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화염 꼬리가 선명하다.

엘라는 타오르는 은행잎들을 지켜보면서도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움직여 계속해서 위치를 추적했다.

7개의 빛줄기는 엘라의 은행잎 파도들을 서핑하듯 자유로이 움직이면서도 순간적으로 정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엘라가 그것들을 손으로 쳐 내면서 간신히 정혁을 보호해 냈다.

“에이, 그게 다라고 착각하면 좀 그런데.”

정혁의 오른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어느새 이동한 그가 정혁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엘라는 이미 정면을 향해 날아드는 염구를 막아 내느라 미쳐 정혁을 주시하지 못했고 정혁은 옆구리가 박살나는 고통을 느끼며 상당히 멀리 밀려났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은행잎 보호막이 출렁이며 흩어졌고 그 찰나에 염구 하나가 정혁의 어깻죽지를 관통했다.

고통이 정신없이 밀려들어왔다.

엘라가 다급히 보호막을 다시 펼치고 양손으로 지면을 내리치자 아래에서 수많은 뿌리들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그녀의 손짓과 함께 가시처럼 번졌다.

변칙적으로 커졌다 작아지는 가시가 남자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그들에게서 멀리 벗어나 염구를 회전시키며 빙글 웃고 있었다.

정혁이 피를 한 번 토하며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염구의 불길 덕분에 관통되자마자 지져져 추가 출혈은 없었다.

“괜찮아?”

엘라의 물음에 정혁이 고개를 들었다.

고통 속에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정혁은 소름 돋을 정도로 표독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뒤졌다. 저 새끼.”

정혁은 곧바로 엘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저 자식에게 던져 줘.”

“뭐?”

“그냥 내가 부탁한 대로 해 줘.”

“아니, 무슨 소리야.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는데?”

그녀의 말에 정혁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시끄러워. 그냥 그렇게 해. 믿어, 오늘 지는 쪽은 우리가 아냐.”

엘라는 손을 올려 정혁의 아래에 나무 둥지를 만들었다.

은행잎 벽으로 인해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상대는 알지 못할 것이다.

“확실한 거지?”

엘라는 그날 처음으로 왜 정혁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저 표정을 본 적이 있다.

마치 사냥감을 포착하고 반드시 찢어 죽인다는 각오를 가진 괴수의 표정을 말이다.

그 어떤 존재도 저 표정 앞에서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녀조차도 더 이상 반문할 수 없었다.

엘라는 그를 순식간에 남자 쪽으로 날려 보내며 이제까지 오직 방어만을 위해 펼친 모든 자연의 힘들을 걷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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