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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41화 (41/200)
  • ◈41화

    [딱 너의 계획대로 흘러갔어.]

    뭔가 불만이 섞인 느낌의 대답이었다.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정혁이 몸을 돌려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불안정한 상태일 텐데?]

    [내 존재만으로 모든 것이 다 순응되어야 마땅하지. 불협화음은 용납 못 해.]

    [아린의 상태는 어떤데?]

    [꼬맹이 왕은 아직 얼떨떨한 상태지만 곁에 있는 인간들이 도움을 잘 주고 있어.]

    [전에 있던 왕은?]

    바로바로 돌아오던 엘라의 전음이 잠깐 멈췄다.

    그 사이 정혁은 이불 속으로 몸을 뉘였다.

    [죽였지.]

    [누가?]

    [어쩔 수 없이, 내가 죽였어.]

    그래.

    그 또한 필요한 절차였을 것이다.

    섭정은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의 특성상 꽤 긴 기간 왕국을 지배했을 것이다.

    왕의 의지만큼 은행나무 엘프의 쇄국 정책은 더욱 견고하게 이어졌을 테고.

    그랬던 그가 갑자기 나타난 변화의 바람에 고개를 숙였을 리 만무하다.

    아무리 예언의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난 여기 계속 있나?]

    [바라던 자유 아니었어?]

    정혁이 피식 웃었다.

    사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그녀를 무기화하여 소환을 하게 되면 이곳으로 소환이 될지 궁금했었다.

    당장은 그녀가 엘프 왕국에 필요한 상황이었고 정혁도 제논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거라는 전제를 두고 이곳으로 오긴 했지만 어쩌면 지금이 엘라가 계속해서 말하던 자유의 시간이 아닌가?

    [그렇긴 하다만 스스로 이런 처지가 되고 나서는 뭐랄까….]

    엘라가 잠시 말을 멈췄고 정적이 흘렀다.

    [마치 뿌리를 뻗지 않은 상태로 지면에 서 있는 나무의 느낌이야. 찝찝하고 불쾌해.]

    정혁은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골치 아플땐 자는게 최고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더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제논의 수복이 먼저니까.

    곧 길드가 움직일 것이다.

    [야, 대답 안 해? 기껏 속마음 내비쳤더니.

    뭐해? 자?]

    엘라의 말이 메아리치듯 들려왔지만 정혁은 그대로 잠에 들었다.

    ***

    똑똑-

    노크 소리에 정혁은 눈을 떴다.

    바깥은 고요했고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다시 이어지자 정혁은 곧 몸을 일으켜 부스스한 머리를 한 번 정리하고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여니 앞에는 하늬안이 서 있었다.

    스윽 바깥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아침이라기엔 시간이 좀 더 흐른 것 같았는데 평소라면 북적여야 할 주변 훈련장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하늬안은 정혁의 눈치를 살피고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정혁이 뒤이어 문을 닫자 그녀는 별채를 한 번 둘러보고서 탁자에 딸린 의자에 앉았다.

    차림을 보니 두 검만 축소시켜 귀걸이로 만든 것 외에는 만반의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오늘이야?”

    정혁의 물음에 하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긴 왜 왔지?”

    “난 너와 함께 있으라고 하셨어.”

    “왜 굳이?”

    “네가 워낙 천방지축이니까 그렇지.”

    하긴, 모든 병력들이 일제히 왕궁으로 쳐들어갈 때 정혁이 혼자 제논의 기사단 성채 안에 남아 있다면 제논을 가지겠다는 둥 길드를 내놓으라는 둥 불편한 말들만 해 댄 터라 김창수 입장에서도 뒤가 구릴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됐고, 배는 안고파?”

    ‘얼레? 왜 이렇게 친절?’

    낯선 그녀의 대우에 정혁이 잠시 멀뚱멀뚱 하늬안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하늬안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침에 배 안 고프냐는 인사가 그렇게도 이상한 거냐.”

    그녀의 말에 정혁은 인벤토리에서 숨겨 두었던 빵을 꺼내 손에 들었다.

    그러자 하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밥은 내가 알아서 먹어. 상황이나 알려 줘.”

    그녀가 말한 현재 상황은 이랬다.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길드의 다섯 팀장은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길드원들을 향해 자정을 기해 왕국 도성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마스터의 의지를 전달하고 전의를 다지는 데 힘을 다했다.

    김창수는 아침에 일찍 안나와 함께 왕궁으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그의 왕을 알현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는 곧 그곳에서 있을 참혹한 미래의 초석을 쌓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곳 제논의 기사단 성채 내부는 성채를 관리하는 관리인들 열두 명 정도와 다른 임무로 인해 다쳐 회복 중인 몇몇 길드원들 그리고 하늬안과 정혁뿐이었다.

    “외곽의 팀원들은 언제 진입하고?”

    정혁의 물음에 하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마스터께서는 신호가 보일 거라고만 하셨어.”

    ‘뭐라도 하나 무너트리겠다는 심산이구만.’

    정혁은 잠시 김창수가 전에 성채 벽을 부쉈던 장면을 떠올렸다.

    ‘무식하긴.’

    “아린 쪽은 어떻게 됐대?”

    “이제는 그냥 아린이라고 못 부르게 됐지.”

    “그 꼬맹이가 결국 왕이 됐구나.”

    하늬안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도돈치아에서부터 함께해 온 인연이었는데 헤어질 때 급작스러워 어떤 인사도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역경을 딛고 아엘프로서 은행나무 엘프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친구가 왕이라니.”

    “친구? 누구 마음대로?”

    정혁이 틱틱대는 말투로 웃으며 말하자 하늬안이 입을 삐죽거렸다.

    “너의 그 무기… 씨는?”

    무기 씨? 그녀의 말에 정혁이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크게 웃는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 무기 씨는 굉장히 빡쳐 있을 텐데.내가 어제 모든 말을 다 씹어 먹고 잠들어서 말이야.’

    “왜? 만나고 싶어?”

    하늬안은 약간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일전의 전투를 통해서 만만찮은 성격이라는 것을 익히 알게 된 하늬안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정혁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마무리했다.

    그 순간.

    콰과강!-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근처에서 강하게 들렸다.

    정혁이 깜짝 놀라서 커튼을 완전 걷어 내 바깥을 쳐다보았으나 하늬안은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스터의 신호일 거야.”

    하늬안의 말에 정혁이 그녀를 힐끔 보았다.

    뿌연 연기가 가득하다.

    엄청난 것이 터져 나간 모양이었다.

    “김창수의 신호라고? 근데 왜 길드 성채를 터트려?”

    정혁의 말에 하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아닌데? 그럴 리 없는데?”

    이번엔 그녀가 다급히 창문을 통해 바깥을 쳐다보았다.

    뿌연 흙먼지가 가득하다.

    높은 층으로 솟아 있던 성채 본청 중앙 건물이 모두 무너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빛줄기가 아래서부터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쿠과가강-

    그에 질세라 저 멀리 보이는 왕궁의 거대 시계탑이 무너져 내렸다.

    하늬안이 알고 있는 신호는 저 시계탑의 붕괴였다.

    김창수와 안나가 먼저 왕을 만나 마지막 설득의 시간을 가지려 했고 만약 이 협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외곽 팀장들에게 보내는 공격의 신호로서 멀리서도 보이는 제논의 왕궁 시계탑을 무너트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럼 지금 성채를 공격한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저 불쾌한 기운의 검은 빛줄기는 또 무엇인가.

    빛줄기는 순식간에 거대하게 퍼져 갔다.

    이는 마치 베리어의 모습으로 변하여 성체 외곽을 감싸기 시작했다.

    정혁이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의 오른손이 황금빛 마나로 둘러싸였고 천천히 스태프가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엘라였다.

    [하늬안! 길드에 무슨 일이야!]

    순간 드웨이크의 전음이 하늬안의 머릿속으로 날아들었다.

    [팀장!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 이게 무슨]

    [왕궁에서 선수 친 건가?!]

    아니다.

    절대 그들이 먼저 알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의 선제공격은 더욱 확실한 빌미를 제공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건 제논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느낌의 마나다.

    하늬안이 고개를 저으며 전음을 보냈다.

    [아니에요! 이건 외부의 공격입니다.]

    [알겠… 우리느… 곧… 지워…]

    [팀장? 팀장님!?]

    드웨이크의 전음이 끊길 듯 말 듯 들리더니 결국 안내 창으로 차단되었다는 경고 문구가 확인되었다.

    하늬안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정혁은 그의 손안에서 발악하는 엘라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너 이 새끼! 날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따위로 나를 취급해?!]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도 싸그리 무시하더니 데리러 오는 것도 아니고 무기화를 시켜서 이렇게 소환을 한다고? 아니, 나를 소환해!?]

    [엘, 엘라 진정! 진저엉!]

    [그리고 이런 나무때기 모양은 진짜 싫다고! 자존심 상한다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빨리 안 풀어!?]

    [안 때릴 거지? 때리려고 하면 다시 이렇게 만든다?]

    [아우 진짜! 빌어 처먹을 내가 왜 그따위 말장난에 속아 넘어가 가지고! 진짜 인간 따위에게 종속되어서…. 와 나, 이러려고 만 년을 산 게 아닌데 진짜.]

    엘라의 신세 한탄 시간을 애써 무시하며 정혁은 심상치 않은 외부를 상황을 주시했다.

    “차단됐어. 모든 외부 통신이.”

    만약에 정혁이 빠르게 엘라를 소환하지 않았다면 하늬안의 말처럼 저 검은 베리어에 의해 막혀 소환 불가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찔했지만 축적된 전투 감각 덕분에 또 한 고비 넘겼다는 약간의 안도감이 찾아왔다.

    어쨌든 일단 최강 전력 엘라가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약소국이라도 해도 왕국의 도성 내에 그것도 수비대를 자처하고 있는 길드 본진을 습격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하고도 무모한 짓이다.

    그러나.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

    정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늬안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그녀는 재빨리 귀걸이를 빼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자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두 대도가 위용 넘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완전히 수리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형태였다.

    정혁은 인벤토리를 열어 스크롤 두 개를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무기에 영구 적용되는 스크롤이야.”

    하늬안은 스크롤를 받아 들고 펼쳤다.

    [키메라의 맹독 스크롤 : 무기에 영구적으로 독성 추가 데미지를 부여합니다.]

    [키메라의 마비 스크롤 : 무기에 영구적으로 확률적 마비 효과를 부여합니다.]

    나쁘지 않은 옵션의 2등급 스크롤이었다.

    “지난 키메라 사냥에서 너희들이 받지 않았던 일반 아이템을 가지고 대장간에서 제작한 스크롤이야. 잘 사용하라고.”

    정혁이 바깥을 주시하며 딱딱한 말투로 하늬안에게 말하고는 스태프를 공중으로 살짝 던져 올렸다.

    그러자 곧 다시 황금빛 마나에 휩싸이며 엘라의 모습을 변했다.

    엘라는 화가 단단히 난 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으나 이빨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없이 정혁을 노려봤다.

    한편으로 하늬안은 정혁이 처음으로 건네준 이 두 개의 스크롤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이제까지 어떤 경우에도 대장장이인 그가 그녀에게 도움 같은 것을 주지 않았었다.

    이는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판단 뿐 아니라 정혁 혼자서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검은 베리어가 감싼 성채의 내부는 급격히 어두워졌다.

    빛이 스며들긴 했지만 마치 늦은 저녁처럼 깊은 어둠이 곳곳을 잠식한 느낌이었다.

    이내 무너진 성채 중앙 타워에서 붉은 색 구체 여러 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7개의 구체는 공중을 부유하면서 무언가를 찾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구체들은 동시에 성채 내부를 밝히는 역할도 함께 했다.

    그리고 성채 중앙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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