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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40화 (40/200)
  • ◈40화

    다른 좌석들과는 달리 조금 넓고 크며 황금빛 모피가 올라가 있는 좌석 앞에 A라고 불린 자가 섰다.

    한 좌석이 비어져 있었는데 A가 도착하자 검은 연기가 몽환적으로 피어오르더니 곧 걷히며 한 사람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로서 10개의 크고 작은 좌석들은 모두 채워졌다.

    “전언이다. 들어라.”

    A의 목소리는 굵고 또렷했다.

    그러나 격식 있고 웅장했으며 마치 소라 고둥 속을 지나는 듯 소리에 울림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뒤늦게 등장했던 사람도 못마땅하다는 뉘앙스로 몸을 일으켜 섰다.

    A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다고 해야 맞겠다.

    그들이 이 공간에 도착하면서 동일하게 각자 얼굴에 일종의 안면 마스크 같은 것이 씌워졌다.

    그것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활성화된 일종의 위장 스킬인 것 같았다.

    마스크는 모두 하얀색 바탕에 눈구멍만 나 있었으며 각자의 명칭이 마스크 좌측 볼에 붉은 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다만 A라고 불린 사람의 마스크는 우측 볼에 앞발을 들어 올린 말 문양이 추가로 새겨져 다른 이들과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이제 정화의 시간이 도래했다.”

    적막 속에 A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퍼져 나간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리고 소멸시켜야 마땅하리라. 그리고 종래에는 이 세계 역시 정화시킬 것이다.”

    말을 마치며 A는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나머지 사람들도 자리에 각자의 자세로 앉았다.

    안면 마스크에 G라고 새겨진 자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A를 향해 넌지시 묻는다.

    “RE-SET을 이야기하는 건가?”

    A는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작은 동작마저도 위엄 있어 보였다.

    “그것까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것도 대비해야 할 것 같다.”

    “그럼 우리는?”

    “모르겠다. 아직까지 자세한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첫 단추가 꿰어졌다. 나머지 단추를 채우는 것은 시간문제다.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성과를 내느냐에 달렸다.”

    “나 참, 뺑이는 우리가 다 치고 대가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살짝 공기의 진동이 불규칙적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들자 G는 자신의 말을 마치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내며 다시 좌석 안으로 깊숙이 자리해 앉았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G의 태도도 이해한다.”

    A는 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처음도 아니고 이미 몇 번 경험했던 일이다. 우리는 늘 함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변수는 없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기한은?”

    E라고 새겨진 안면 마스크를 착용한 검은 정장의 남자가 행커치프를 꺼내 몇 번 털고 주머니에서 해바라기 씨를 몇 개 꺼내서 입에 깨물어 넣으며 물었다.

    까득 하는 소리가 적막 속을 관통한다.

    “앞서 말했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A의 대답이 다시 한번 들린 까득 소리에 약간 묻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E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대화를 이어 갔다.

    “이번엔 좀 다르다는 거 알고 있지? 변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기에 혹시 모르나 해서 말해 두는 거야.”

    “그놈 말인가?”

    “어. 우리가 이용해 먹었던 ‘한’의 재구성 버전 말이야.”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의견은 변함없다. 이는 그분의 뜻이기도 하다. 전언에 어떤 고뇌와 갈등도 없었다. 명쾌하고 확실했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

    까득-

    그의 오른쪽 좌석에서 손이 스윽 나왔고 E는 해바라기 씨 몇 개를 손의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A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불경한 말투다. 문제가 생긴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멀쩡해.”

    그는 마지막 해바라기 씨의 알맹이를 입에 넣고 펼쳐 놓은 행커치프 위에 떨어진 씨앗을 모아 담아 옆에 던져 버린 뒤 행커치프를 털어 내고 고이 접어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동안에도 A의 시선은 E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냥, 답답해서. 우리 정도 수준이라면 진작 끝내고 남았을 일인데 그놈의 불문율 때문에 매번 G의 말처럼 고생하고 돌아가고. 더불어, 이번만큼은 조금 찝찝하기도 해. 아까 말한 그녀석이 걸려.”

    “왜 그렇게 생각하지?”

    A의 차가운 물음이 돌아왔다.

    E는 A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A를 마주 보진 않았다.

    여전히 무심한 듯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퉁명스러운 말투를 이어갔다.

    “시간의 마나를 사용하고 독립 공간을 열고 닫으며 에고 장비를 제작하는 힘을 가진 데다, 거의 최상급 소환술사도 하지 못하는 짓을 벌이고 있잖아.”

    잠시 몇몇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거든? 이 정도의 권한은 우리 정도, 아니 거의 당신네들 정도 되어야 가능한 일 아냐?”

    E는 그때에야 비로소 A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B와 C도 있었다.

    A는 곧바로 칼같이 대답했다.

    “염려할 필요 없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그분의 전언에는 어디에도 조급함이나 머뭇거림이 없었으며 고민의 구석도 없었다. 확고하며 정확했다. 변수는 없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좌중을 바라보았다.

    웅성거림이 멈추고 정적이 이어졌다.

    “우리의 일은 언제나 대의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이는 곧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기도 한다. 흩어지면 또 한동안 마주할 수 없겠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활동해라. 그럼 다시 볼 날도 빨리 찾아 올 것이다.”

    A가 손을 뻗자 공중에 붉은 눈동자의 검은 말 형상이 나타났다.

    말은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공중에서 원탁 한가운데로 내려와 섰다.

    윤기 나는 털에 다부지게 잡힌 근육들 사이로 거친 심장 박동과 번뜩이는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말은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공중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말이 사라질 때 그 연기 가닥들이 옅게 좌석의 주인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들은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밀한 지시 사항은 다들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흩어진다. 오늘은 특별히 대화가 많았고 이는 우리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실망스러운 모습 이후에 더 큰 도약이 있을 거라 믿는다. E?”

    A의 지목에 E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결례에 용서를. 그분의 뜻대로.”

    그와 동시에 A는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나머지 좌석의 주인들도 각자의 방법으로 이 공간에서 이탈했다.

    J가 E에게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가실까요?”

    E는 고개를 숙인채로 대답 없이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리면서 아래에 침을 뱉었다.

    “해바라기 씨가 이빨에 꼈네. 재수 없게.”

    그는 손가락을 넣어 이빨에 낀 해바라기 씨를 긁어내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J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하루.

    마치 이를 갈고 있던 짐승 떼처럼 제논의 기사단 병력들이 속속들이 왕국 제논의 영토 변방에 모여드는 데 걸린 시간은 딱 하루였다.

    김창수의 비밀 전음이 전파되고서 기사단 내부에서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과 모르고 있는 자들로 나뉘었다.

    이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안나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후의 일은 이후에 판단하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정혁의 망언은 김창수와 안나, 드웨이크, 하늬안 선에서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물론 하늬안은 속에서 일어나는 천불을 끄느라 애를 한참 먹었다.

    오죽했으면 하도 정혁을 노려봐서 전부 충혈된 두 눈이 그녀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정혁은 작은 손님용 별채에 묵기로 했다.

    그는 모든 작전 회의에서 제외되었다.

    팀장들이 모였을 때도 그는 그 자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고 정혁은 별채에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본청의 모든 불은 전부 밝혀져 있었다.

    제논의 기사단 성채 내부의 부산스러움은 없었다.

    철저하게 평범했다.

    혁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아마 외부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단의 길드원들도 정확히 어떤 이유로 각자의 위치에서 급히 소집되었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짐작 정도는 가능할지도.

    김창수와 제논의 왕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난 전우이다.

    정혁은 3차 대전쟁 때 함께했었던 둘을 기억한다.

    전투적이고 호전적이면서도 의리파였던 김창수에 비해 지금 국왕인 비르파인이라는 자는 상대적으로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자였다.

    그들의 인연은 꽤 오래전부터 이어졌다고 들었고 김창수가 지금의 길드 이전에 몸담았던 길드에서 배신당했을 때에도 끝까지 곁을 지켰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왕국 건설의 꿈을 꿀 때 김창수는 거기에 기꺼이 동의해 주었고 함께 왕국의 미래를 그리며 길드를 키워 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고쳐졌다고 생각한 비르파인의 우유부단함은 김창수보다 더 친절하고 비위를 맞춰 주는 측근들 덕분에 더욱 심해져서 결국 자신의 왕권조차 제대로 쥐고 있지 못하는 꼴로 전락했다.

    물론 김창수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친우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휘둘려 함께 그렸던, 세계의 균형을 잡는 무게추가 되기로 한 왕국의 미래를 무너트리는 모습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둘의 대담은 항상 길어졌다.

    비르파인은 늘 김창수를 찾았고 김창수는 항상 그에 응했다.

    이때부터 길드의 통솔이 점점 해이해졌고 길드원들의 불만이 천천히 쌓여 가기 시작했으며 그가 본청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보다 왕궁의 국왕 집무실에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왕국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단단했던 친우가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흔들리는 모습에 김창수가 온전히 몰두하게 되는 순간 되레 왕국에 모인 다른 세력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국왕의 귀에는 꿀 같은 위로와 간언들이 채워지고 김창수의 올곧은 의견과 조력은 점점 뒷전이 되어 갔다.

    그리고 김창수는 비르파인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김창수와의 만남을 거부한 것이다.

    왕국의 방향은 키가 부러진 배처럼 정처 없이 폭풍우 속을 표류했다.

    새로운 희망을 품고 왕국의 영토에 자리 잡은 국민들, 몇몇의 세력들은 지쳐 가고 있었다.

    정치 싸움의 소용돌이만이 왕궁에 남았다.

    모략과 배반이 가득하고 비르파인의 흥겨운 노랫소리만 들렸다.

    김창수는 가끔 본청 탑 꼭대기에서 저 멀리 왕궁을 바라보곤 했다.

    아무도 정혁을 신경 쓰지 않았던 하루 동안 주변의 이야기들과 그간 하늬안과 나눈 대화들을 통해서 이전에 알고 있던 내용들과 연결시켜 보면 김창수는 꽤 오랫동안 참아 온 것이다.

    두 번의 대전쟁을 더 겪고도 제논을 먹여 살리면서 까지 최선을 다해 비르파인을 배려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잘나신 주인 양반?]

    여러 가지 생각에 휩싸여 있던 정혁에게 엘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맞다.거기도 슬슬 정리가 됐겠구나.’

    정혁은 약간 지끈거리려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일은 잘 마무리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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