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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39화 (39/200)
  • ◈39화

    정적.

    안나의 검은 눈동자는 정혁의 사고를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도대체 정체가 뭐지?’

    당황하고 있는 정혁을 바라보며 안나는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녀가 딱- 하고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자 회의실 구석에 있던 머그컵과 금세 뜨겁게 달궈진 주전자가 날아왔다.

    허공에서 노닐던 주전자와 머그컵은 그녀의 손짓 몇 번에 뜨거운 물을 담아 김을 피워 냈다.

    커피 향이 김을 따라 회의실에 퍼져 간다.

    다시 그것들이 원위치로 돌아가고 안나가 한 모금 홀짝일 때까지 정혁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은 없을 줄 알았어?”

    아니, 그렇지 않다.

    그동안 정혁의 실체를 알아차린 자들이 몇몇 있었다.

    지금도 아마 이공간의 대장간에서 쉬고 있을 조 패더럴.

    그는 그래도 죽은 이후에 그의 대장간을 찾아 온 것이기 때문에 정체를 알아차린다고 해도 위해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두 번째, 악마 제로니막스.

    그는 분명 걸림돌이긴 하다.

    추후에 고민해야 할 거리라고 여기며 서랍에 묻어 둔 논제이긴 하나 어쨌든 마계의 강력한 힘을 가진 자들은 실체를 꿰뚫어 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했다.

    마지막으로 대장간에서 마주쳤던 에드가.

    그도 역시 시스템에 묶인 NPC일 뿐.

    후에 만나게 되더라도 그때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일반 플레이어다.

    이제까지 일반 플레이어가 정혁을 알아본 적은 없다.

    그건 안 된다.

    안 될 일이다.

    지금 이 정도 수준에서 정혁이 ‘한’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사방팔방에서 그를 사지 분쇄하려 몰려들 것이 뻔했다.

    좋은 인연? 거의 없다.

    김창수가 진짜 이상한 케이스였다.

    이해관계에 얽혀 있거나 귀찮아서 살려 둔 인연들을 제외하면 그는 사실 정말 개망나니 깡패 수준이었다.

    어차피 게임일 뿐이었으니까.

    죄책감은 더욱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한'에 대한 어떤 흔적도 아직은 남기거나 흘릴 수 없었다.

    기회가 와서 자의적으로 누군가에게 밝히게 된다면 모를까.

    이렇게 공개가 되어 버린다면 앞으로 또 누군가에게 알려지게 될지 모른다.

    “어떻게 알았지?”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자.당황? 할 수 있지.

    하지만 네가 안다고 해서 나에게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풉.”

    안나는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혁의 모습을 보며 작게 실소했다.

    그리곤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왜?”

    정혁의 물음에 안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너는 지금 ‘한’이라는 포인트에만 집중했지?”

    ‘그게 왜?’

    아리송한 말이었다.

    “여기서 네가 더 집중해야 하는 건 가려져 있어야 할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내가 알아냈다는 사실 아냐?”

    “…?”

    “뭐야, 너 정말 모르는 거야?”

    안나의 말이 마치 고대 언어 같다.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칭호가 정혁의 앞에 파란 창으로 표시되었다.

    [오아시스의 지략가 안나 에이드윈]

    “어?”

    작은 탄성이 새어 나온다.

    정혁은 궁금하긴 했었다.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한’이었을 때도 만나지 못했던 자들, 어쩌면 정혁처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자들일까? 그처럼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의 만남은 생각보다 빠르고 또 급박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와, 이 칭호가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모르나 보네.”

    안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약간의 허탈함이 묻어 있었다.

    “알아 듣게 설명해 봐. 어떻게 안 거야, 내 본래 모습을? 게다가 오아시스의 칭호가 더 중요하다는 듯이 말하는 이유는 뭔데?”

    결국 정혁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참았던 답답함이 터져 나왔고 정혁은 그녀를 밀어붙이듯 언성을 높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거, 너무 애송이였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그 칭호를 가지고서도 이렇게 난동을 부리고 있단 말이야?”

    가능만 하다면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모든 비장의 패를 다 빼앗겨 버린 기분이었다.

    제논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잔뜩 얽혀 버린 사고의 끈을 어떻게든 풀어내고 싶었다.

    “일단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없어. 시간도 없고 그것을 네가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도 안 돼 있고. 하지만 지금처럼 설치고 다니면 모가지 날아가는 건 금방일거야. 이미 그들이 낌새를 맡았으니까.”

    “그들?”

    “네가 있었던 강철 망치 대장간. 나름 잘 나가던 대장간이었는데 순식간에 몰락했어. 전 대륙에 있던 모든 가맹점들이. 그것부터가 그들이 이미 너를 찾고 있다는 증거야.”

    “아니, 그러니까 그들이 누구냐고!”

    “거 봐, 지금 네 상태로는 안 돼. 일단 제논부터 마무리 짓자. 제논에 대한 계획이 뭐야, 네가 바라보는 미래상이 뭐냐고.”

    ‘야, 아니 지금 이 상황에 내가 그런 얘기하고 앉아 있게 생겼냐?’라고 욕지거리를 포함해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정혁은 억지로 꾹꾹 삼켰다.

    1보 후퇴는 2보 전진을 만든다.

    상황을 보아하니 안나 역시 정혁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 보였다.

    결국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더 여유롭게 진실에 대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을 것이다.

    “…제논을 통해서.”

    정혁이 말이 시작하자마자 안나가 곧바로 말을 끊었다.

    안나의 눈동자가 약간 커져 있었다.

    “생각보다 이성적이네?”

    “닥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정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김창수가 너를 엄청 신뢰하는 것 같은데. 너는 거의 조련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 같고. 애초에 나보다 사리분별은 더 잘하는 것 같으니 너도 사실 제논을 길드에서 무너트리길 기대하고 있었던 거 아냐?”

    암묵적인 동의가 이어졌다.

    안나는 다시 잔을 들어 몇 번 흔들었다.

    잔에서 김이 올라왔다.

    “제논을 향한 김창수의 시위는 잔뜩 당겨져 있었어. 나는 그저 조준점을 고쳐 줬을 뿐. 너는 이제 네 일을 해. 막무가내일 수 있었던 내 의지에 너의 의견을 더해 줘. 내 생각은 확고해. 이전의 나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내 성격도 알겠지. 난 물러섬이 없어. 그렇게 결정이 됐다면 해야 해.”

    “그럴 힘은 충분히 있고?”

    정혁이 안나를 노려보듯이 쳐다보며 품에서 나무 토큰을 꺼내 손가락을 튕겨 그녀 얼굴로 날려 보냈다.

    정확히 안나의 시야 앞에서 멈춘 토큰을 보고 그녀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젠트라의 초대장? 너, 설마?”

    “그래 그 설마. 해 볼 생각이야.”

    “미쳤구나, 너.”

    “그래도 가능만 하다면?”

    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될 건 또 뭐야. 그 레벨에 벌써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 다했지. 역대급 멍청이에게 역대급 힘이 주어졌네. 진짜 다행이다. 그래도 몸뚱이는 쓰레기여서 마음대로 날뛰진 못하니까.”

    정혁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안나는 싱긋 웃고는 손바닥을 털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정혁에게 다시 젠트라의 초대장을 던졌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오케이. 알겠어. 마스터하고는 내가 이야기해 보지. 너도 알겠지만 길드를 가지겠다는 둥 그런 말은 앞으로 금지야. 일단 지금은 제논을 갈아 치우는 것에 집중하자.”

    안나는 그에게 몇 걸음 다가와 어깨를 쓸어 내듯 몇 번 손짓을 하곤 팔짱을 끼며 단호히 말했다.

    “이 결계가 풀리면 우리는 다시 이전과 같은 관계가 되는 거야. 아무리 궁금하더라도 제논을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참아.

    그리고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 줘.

    그저 이곳에서 엘라는 데리고 다니며 존재감이나 보이고 있으란 말이야.

    그러다가 제논 왕정과 한바탕할 때, 그때 힘 좀 보태고.”

    안나는 그의 앞에서 다시 붉은 마나를 회수하여 결계를 해제했다.

    머리를 깡총 묶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곤 가차 없이 문을 열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정혁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커피 향을 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주도권을 완벽히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

    어둠 속 축축한 지하실에서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 퍼졌다.

    횃불을 든 덩치 큰 남자와 그의 곁에 선 검은 정장의 남자가 함께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검은 정장의 남자는 워낙 긴 장검을 차고 있어서 땅에 끌릴 듯 말 듯하다.

    복도 양 측면은 모두 오래된 철장들로 이루어진 감옥이다.

    치워지지 않은 오래된 뼈들이 나뒹구는 곳도 있다.

    그들은 그저 앞만 바라보며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빛을 향해 걷고 있다.

    “길어질 것 같아, J?”

    검은 정장의 남자는 횃불을 들고 있는 사내에게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의 소집이라.”

    “장소나 좀 좋아졌으면 좋겠어. 맨날 이런 으슥하고 찝찝한 곳에서 말이야.”

    검은 정장의 남자는 쯧 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다.

    “격 떨어지게.”

    그는 아까부터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부드럽게 모조리 피해 가며 걷고 있었다.

    반사 신경과 걸음이 매끄럽고 놀라웠다.

    “어떻게 조사는 좀 했어?”

    남자의 말에 사내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작게 대답했다.

    “성과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죽였는데?”

    남자의 목소리에 약간의 장난기가 묻어난다.

    “네가 목숨을 빼앗는 장면은 참 아름답단 말이야, 그게 인간이든 다른 종족들이 되었든. 그저 본연의 모습에 충실해서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인정사정없이 찍어 누를 때!”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꿈도 못 꿀 장면이지.”

    그는 자신의 오른쪽에 찬 장검을 작게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리듯 말을 마쳤다.

    “과찬이십니다.”

    남자는 사내의 옆구리를 살짝 치면서 피식 웃었다.

    곧 그들은 횃불의 빛이 약해지기 전에 향하던 빛에 다다랐다.

    갑작스레 등장한 거대한 벽과 그에 버금가는 거대한 문이 그들의 앞에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사내는 횃불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문을 열었다.

    남자는 그저 사내가 문을 열어 주기를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문 너머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고 10개의 돌로 제작된 좌석, 그 위를 덮은 동물들의 모피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각각의 좌석에는 이미 도착한 몇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용했다.

    두 남자가 자리에 앉는다면 이제 남은 좌석은 두 개뿐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사내가 문을 열어 주자 손가락으로 코끝을 살짝 비비며 안으로 들어갔고 사내 역시 남자가 들어간 것을 확인 한 뒤 문을 살며시 닫았다.

    커다란 문이었지만 사내에게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오, J! 살아 있었네?”

    조금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사내를 먼저 반겼다.

    남자는 그쪽을 힐끔 보고는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한 좌석 앞에 서서 옆에 찬 장검을 풀어 내려놓았다.

    “E는 아직도 살아 있고.”

    아까의 목소리에서 실망감이 느껴졌다.

    E라고 불린 남자는 좌석에 앉아 정상 상의를 탁탁 당겨 구겨진 부분을 폈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아 앉자 광이 날정도로 빛나는 구두가 높은 천장 위로 난 구멍에서 스며든 빛을 반사에 번쩍였다.

    “거 마크는 좀 튀는 데다 표시하라니까.”

    정장의 남자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목소리가 한 소리 거들었다.

    그는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는데 E에게 손을 뻗어 그의 옷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E가 다가오는 손을 받아 쳐냈다.

    순간의 힘이 얼마나 강하던지 뻗어진 손의 손목이 빡 소리를 내며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싸가지는.”

    부러진 손목의 주인이 다른 손으로 손목을 잡고 다시 몇 바퀴 돌리자 우득 소리를 내며 다시 원 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더니 핀잔을 주듯 말했다.

    “나처럼 이렇게 팔뚝에 새기라고 샌님아.”

    그가 반팔을 걷어 올려 보인다.

    팔에는 검은 말이 앞 다리를 들고 일어선 모습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E는 아무 말 없이 남자에게 한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듯이 입에 대 보였다.

    “하여간.”

    반팔의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세를 고쳐 잡아 앉았다.

    곧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거칠고 섬뜩한 소리다.

    열린 문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오자 좌석에 앉아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A를 뵙습니다.”

    모두의 통일된 목소리가 하나의 문장을 뱉자 A라는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익숙한 듯 자신의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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