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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38화 (38/200)
  • ◈38화

    본청 측면부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주변에 있던 길드원들이 다급히 붕괴가 일어난 구역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추가적인 붕괴는 없었다.

    기둥이 갈라져 무너지면서 벽을 쳐 허물어진 것뿐이었다.

    다만 뿌연 흙먼지 속에서 마스터가 웬 남자의 멱살을 붙잡은 채 죽일 듯한 기세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모두들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드웨이크와 하늬안도 소란 속에서 김창수와 정혁을 발견했다.

    하늬안이 이마를 감싸 쥐며 인상을 구겼고 드웨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순간 이미 문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집무실 문을 비서가 열고 들어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더니 당당히 김창수의 옆으로 다가갔다.

    눈동자가 터질 듯 충혈된 김창수는 비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서는 수려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올려 묶은 짙은 갈색 머리는 찰랑거렸고 말쑥한 정장 차림에 약간 쌀쌀한 날씨를 대비해 얇은 코트까지 입고 있었다.

    다소 날카로운 눈매와 작은 입술이 조화로워 잘 어울렸다.

    아름다웠다.

    그녀는 정혁의 멱살을 쥐고 있던 김창수의 손을 가차 없이 때렸고 찰싹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주변의 몇몇 길드원들이 눈을 질끈 감을 정도였다.

    “무례하네요, 마스터나 되는 양반이.”

    그녀의 말에 김창수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서 자신의 비서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두 손가락을 든 그녀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김창수의 두 눈을 그대로 찔러 버렸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눈동자에는 한없이 약할 수밖에.

    김창수는 살짝 비틀거리며 정혁을 놓치듯 내려놓았다.

    정혁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다른 방으로 안내하지요.”

    비서는 손짓을 하고서 앞서 걷기 시작했고 정혁은 뒤를 힐끔 보고 곧 그녀를 따랐다.

    김창수 역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길드원들이 당황해 하는 것을 인지하고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그 둘을 따라갔다.

    수석 목공들이 곧 도착해 잔뜩 망가진 본청 외벽을 보며 욕지거리를 뱉어 댔고 드웨이크는 속으로 역시 김창수를 집어삼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비서 밖에 없다는 자신의 정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곳입니다.”

    비서는 김창수의 집무실보다 조금 작지만 오히려 아늑한 또 다른 방으로 정혁을 안내했다.

    회의실처럼 거대한 탁자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 끝에는 화목 난로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작은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가득했고 뒤따라온 김창수는 문을 굳게 닫고 팔짱을 끼며 정혁을 노려보았다.

    정혁은 탁자의 한 의자에 앉았다.

    정혁은 사실 많이 놀랐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필요한 절차이긴 했어도 김창수를 상대로 이 정도의 도발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건 엄청난 도박이었다.

    “흥미롭네요.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비서는 정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입을 다문 것은 김창수 쪽이었다.

    정혁은 김창수의 눈치를 살피면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시죠?”

    “아, 인사를 안 드렸네요. 저 양반 비서직을 수행하고 있는 안나입니다.”

    “아, 예.”

    안나는 밝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고 정혁은 얼떨떨하게 악수를 받았다.

    손을 쥐는 순간 붉은 기운이 몸을 타고 돌았다가 사라졌다.

    따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쾌한 기운이었다.

    안나의 눈이 잠시 붉게 빛났다가 사그라든 것 같기도 했다.

    “집무실에서 나눈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스터께서 말씀하신 당신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알고 있구요. 이제부터는 저하고 이야기를 좀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상태의 마스터라면 아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거예요.”

    김창수는 여전히 약간 흥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안나는 정혁의 앞에 앉았다.

    “차가 없는 게 아쉽군요.”

    “아닙니다. 많이 마셨어요.”

    “드웨이크가 타 주던가요?”

    “예. 솜씨가 좋던걸요.”

    “드웨이크라면 나쁘지 않았을 겁니다.”

    작은 동의.

    그리고 다시 적막이 흘렀다.

    안나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렀다가 정혁을 바라보며 그녀의 작은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논도 가지고, 이 길드도 가지고 싶다구요?”

    그녀의 말에 김창수가 다시 움찔했으나 마치 어떤 결계에 묶인 것처럼 추가적인 위협을 가하진 않았다.

    놀랄 노릇이었다.

    이 안나라는 여자는 정혁도 처음 보는 여자다.

    ‘그렇다면 유명한 네임드도 아니라는 건데.강렬하고 우직한 김창수를 속수무책으로 만드는 이 여자는 도대체 뭐지?’

    “예, 그렇습니다.”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계시겠지요?”

    안나는 상당히 차분했다.

    그녀의 시선에서 느껴진다.

    마치 정혁의 모든 수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여자라면 정말 어렵다.

    정혁이 김창수에게 무리해서라도 이런 말을 뱉은 것은 김창수의 침체되어 있는 욕구에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아까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서 모두가 보는 앞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길드원에게도 일종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내고자 했던 심산이 깔려 있었다.

    딱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김창수는 제논보다도 자신의 길드에 더욱 민감했다.

    당연한 것이다.

    왕국보다도 오래 자신의 모든 정성을 쏟았던 길드.

    그 안의 가족과 같은 구성원들, 그의 노고와 노력, 애정과 세월이 깃든 길드를 애송이가 가지겠다고 이야기하는데 누군들 화를 내지 않겠는가.

    허물어진 벽을 통해 관객들이 모여들면 다음 수를 펼치려던 정혁이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등장으로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

    ‘한’이었을 때 경험들이 모두 빛을 발하고 있다.

    정혁은 항상 힘만 믿는 멍청이들을 상대할 때 이런 식으로 약점을 잡아 비틀어 무너트리곤 했는데 가끔 이렇게 의외의 인물들을 발견하곤 한다.

    이들은 이상하게도 그의 방식대로 무너트리기가 쉽지 않았었다.

    “타당한 이유, 가지고 계시겠지요?”

    생각에 잠긴 정혁에게 다시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꽂혔다.

    눈동자에 다시 붉은 기운이 맺혔다가 사라진다.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경계를 안 할 수 없다.

    정혁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을 말하기 전에 당신이 이곳에서 어디까지 결정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결정…?”

    안나는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닦아 내듯 문지르고서 김창수를 쳐다본 후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모든 권한이 제게 있다고 생각하셔도 되요.”

    ‘호오.’

    김창수의 불쾌함을 뒤로 하고 정혁은 약간 놀란 제스처를 살짝 비쳤다.

    안나 역시 그것이 김창수에게 보여 주기 위한 정혁의 행동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제 대답하시죠. 당신의 말은 우리 마스터를 상당히 불쾌하게 했습니다. 적진에서 적장에게 모욕을 준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시죠? 지금부터 당신의 말이 합리적이고 합당하지 않는다면 글쎄요, 다음은 저 화난 짐승에게 맡길 수밖에요.”

    정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알겠다.

    김창수가 왜 저 비서에게 이 중요한 결정의 전권을 맡기며 억하심정을 참아 내고 있는지 말이다.

    그녀는 예리하고 노련한 지략가다.

    아마 제논의 기사단의 모든 계획을 그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 모든 능력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합니까?”

    안나의 인상이 잠깐 구겨졌다가 펴졌다.

    “가진 패가 고작 그것입니까? 사자 밥이 되시겠는데요?”

    김창수의 이 가는 소리가 다시 정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정혁이 곧 말을 이어 가려 하자 안나가 손바닥을 보이면서 말했다.

    “혹시나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더 떠벌리려거든 그만두는 게 좋아요.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만 늘어나는 거니까.”

    그녀의 말에 정혁이 말을 하려던 숨을 비워 냈다.

    하긴 맞는 말이다.

    어차피 김창수도 모 아니면 도.

    그를 죽이려고 했었다.

    “진짜 제 마음을 듣고 싶은 거죠?”

    “예, 혹시나 우리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시면 좋겠구요.”

    ‘숨기고 있는 거라니…? 무슨 말이지?’

    혼란의 물결이 마음속을 요동쳤다.

    갑작스레 다가온 그녀의 애매한 질문에 정혁은 당황했지만 곧 평정심을 찾았다.

    “숨긴 것은 없습니다. 제 진짜 속마음은 김창수 마스터의 아성을 되찾게 해 주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잠자던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지만 코털을 건드리게끔 만들어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코털을 건드려도 일어나지 않는 사자는 필요조차 없지요. 지금 제가 바라본 이 길드의 모습은 움직이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자입니다. 근육은 쓰지 않아서 물렁해져 가고 발톱은 언제 갈았는지 뭉툭하기 그지없으며 날카로운 이빨로 사냥을 나간 적은 언제인지 알 수조차 없지요.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모두들 사자가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쉬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안나의 또렷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촉진제.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소 과격한 방법일지라도 저 같은 애송이가 제논을 먹겠다는 둥, 길드를 가지겠다는 둥 헛소리를 해 대면 마스터도 상당히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까 해서요.”

    정혁은 본심을 숨기고 대충 둘러댔다.

    ‘무슨, 사실 정말 제논을 가지려고 한다. 길드를 초석으로 삼으려고 한다. 왕정? 개나 주라지. 이 땅 자체를 길드의 땅으로 다시 수복하고 김창수를 시작으로 강한 자들을 ‘수집’한다. 잊어선 안 된다. 나는 대장장이고 이전과는 달리 혼자서 모든 것을 완전히 해 나갈 순 없다. 대장장이로서 랭킹 1위가 되려거든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나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어떻게 전개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강한 사람들이 모여서 나의 무기를 사용해야 하고 나 역시 에고 장비와 함께 강해져야 한다. 모두의 목에 정혁의 제작 아이템이라는 족쇄를 채워야 한다.’

    안나는 정혁을 찬찬히 응시했다.

    그리곤 뒤를 돌아 김창수를 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 방법이 마스터에게 잘 맞아 들어간 것 같습니까?”

    마치 안나가 김창수에게 자신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듯한 뉘앙스였다.

    정혁은 힐끔 김창수를 보았다.

    반반? 예상했던 대로긴 하다.

    당장에야 화가 나겠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요구였을 것이다.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지.이렇게 훌륭한 책사와 함께라면 말이야.’

    정혁이 작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제 기준에 성과를 보고 있다고 해야겠죠?”

    “무리수였다는 건 인정합니까.”

    안나가 한 보 물러난 느낌으로 한숨을 쉬며 물었다.

    자신도 한 보 물러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정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안나에게 말했다.

    “마스터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제 완전한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마스터 내면의 어떤 끓어오르는 것을 밖으로 표출해 내고 싶었습니다.”

    김창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안나는 정혁과 김창수를 번갈아 바라보고서 말했다.

    “마스터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김창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서는 까치발을 들고 귓속말로 몇 마디 건넸다.

    김창수는 팔짱을 낀 채로 살짝 몸을 굽혀 그녀의 말을 전해 듣고서 어깨를 한 번 들썩 하며 콧방귀를 뀐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정혁은 뭔가 불길한 기분이 몸을 스치고 지나는 것 같았다.

    안나는 곧 입으로 몇 마디 중얼중얼거렸고 방 전체가 붉은 마나의 기운으로 감싸지더니 외벽 전체를 감쌌다.

    “결계입니다.”

    약간 위축되었던 정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마스터는 왜 나갔고 결계는 왜 치셨죠?”

    안나는 숨을 고르며 뒤로 묶었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

    찰랑거리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두 뺨을 스쳤다가 정돈됐다.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잉? 반말?’

    “자, 피차 솔직해지자. 언제 눈떴니?”

    “뭐?”

    당황이 섞인 정혁의 물음에 비수와 같은 안나의 묵직한 돌직구가 내리꽂힌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한’ 씨? 대답해 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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