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37화 (37/200)
  • ◈37화

    정적이 흘렀다.

    당황, 혼란, 황당 여러 가지 감정이 폭포수처럼 마음을 흐르는 것 같다.

    드웨이크는 저 당당한 남자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헛소리로 치부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혁은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그런 말은… 불쾌합니다.”

    그래, 드웨이크는 적합한 말을 찾았다.

    불쾌다.

    아무리 대단한 양반이라고 할지라도 제논의 기사단이 지키고 있는 왕국이다.

    시작부터 함께하며 정이 든 왕국이다.

    아무리 삐뚤어졌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제논을 가지겠다고? 그걸 이 제논의 기사단 본청 성채 내에서? 이런 광역 어그로를 감히?’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불쾌라.

    나름 적당한 수준의 반응이다.

    정혁은 이제 슬슬 김이 가시고 있는 카모마일 차를 다시 한번 한 모금 마셨다.

    기가 막힌 향은 조금 식었어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미친 소리라는 생각은 안 들죠?”

    정혁의 말에 드웨이크는 잠시 고민했다.

    부정할 수 없다.

    하늬안에게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정혁의 존재는 제논에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김창수, 마스터가 제논을 뒤엎을 계획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정혁이 함께한다면 김창수의 최종 계획은 어디까지로 마무리되어 있을까.

    어쨌든 지금 왕권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드웨이크가 숨을 고르며 단호히 말을 이었다.

    “제논이 우리의 손에 붕괴된다고 해도 제논의 실질적 집권자는 자연스럽게 김창수 마스터가 되어야 합니다.”

    “왜죠?”

    드웨이크는 더욱이 황당했다.

    왜냐고? 아니, 그게 할 말인가? 나올 수 있는 물음인가? 드웨이크의 당혹스러움은 흔들리는 찻잔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문득 그는 다시 정혁의 얼굴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자가 지금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살짝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입가, 진솔함밖에 담기지 않은 눈빛, 당찬 아우라가 퍼져 나온다.

    고작 60레벨짜리 플레이어에게서 말이다.

    “당신, 정체가 도대체 뭡니까.”

    드웨이크가 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정혁은 의자에 더욱 등을 기대며 일어선 드웨이크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때부터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처음 만난 당신은 이 세계에 처음 온 것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능력은 더 말할 것도 없구요. 혹시 오아시스에 어떤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 오아시스라는 게임을 만든 사람입니까?”

    정혁이 손사래를 치면서 웃었다.

    “하하핫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 정도는 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평범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는 말씀이시죠?”

    드웨이크가 정혁의 대답에 자신의 짐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재빨리 받아치듯 물었다.

    “어차피 이 길드 사람들과는 오래 갈 것 같으니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밝혀 두겠습니다. 사실 저도 스스로를 아직 잘 모르거든요. 아, 그리고 혹시 김창수 마스터가 제논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그의 전투력 즉, 랭킹을 기준으로 한 말씀이라면 글쎄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제가 제논을 이끄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당연히, 제가 랭킹 1위가 될 것이니 말입니다.”

    [드웨이크.]

    정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창수에게서 날아든 전음 때문에 드웨이크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의 몸서리에 정혁 역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김창수 마스터죠?”

    얼떨떨한 얼굴로 드웨이크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고 정혁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그 남자가 찾아왔나?]

    김창수의 물음에 전음도 보내지 못했는데 이미 정혁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안 나갈 거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드웨이크는 급히 김창수에게 전음을 보냈다.

    [예, 지금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그래, 내 집무실로 보내.]

    [알겠습니다, 형님.]

    “가, 가시죠.”

    드웨이크가 전음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하늬안이 문에 가까이 붙어 있다가 열린 문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드웨이크의 당황한 표정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여유 있는 정혁의 시선이 따라 보였다.

    정혁은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드웨이크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하늬안은 입을 꾹 다물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드웨이크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드웨이크와 정혁은 제논, 그리고 길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김창수의 집무실을 향하면서 그 둘은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정혁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고 드웨이크는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해 걸음에서도 그런 감정이 느껴질 수준이었다.

    그들은 곧 본청 타워 1층의 김창수 마스터 집무실 앞에 섰다.

    문 앞의 비서에게 드웨이크가 눈인사를 건넸고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드웨이크가 문을 열어 주었고 정혁은 약간 어두운 김창수의 집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문을 닫아 주고서 그는 잠시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하늬안이 그제야 그의 곁에 서서 우물쭈물 입을 달싹거리고 있다.

    “하늬안.”

    드웨이크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늬안이 대답했다.

    “예, 팀장!”

    “지금 당장 모든 팀장들에게 전음을 보내 성채로 복귀하라고 해 줘. 비상사태다.”

    “…비상이요!?”

    “그래, 비상.”

    드웨이크는 바삐 자신의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하늬안 역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팀장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협박이 나름대로 위협적이긴 했나 보군.”

    거대한 의자에 김창수가 앉아 있다.

    그의 거구가 편안히 앉아야 했기에 의자 역시 다른 의자들에 비해 훨씬 컸다.

    김창수는 빛을 받으며 손가락을 깍지 끼고서 굉장히 안락한 자세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손님에게 실례될 수도 있는 자세라고 여겨졌지만 정혁은 그렇게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빛 속으로 나아가 김창수의 거대한 사무용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생각 중이셨을지 맞혀 볼까요?”

    정혁의 말에 김창수는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옆에 있던 의자를 당겨 와 김창수의 책상 앞에 앉았다.

    “아마 제가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없으셨을 겁니다. 앞으로 이 길드의 앞날에 대한 설계엔 반드시 제가 들어가 있었겠죠?”

    “그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헛웃음과 함께 되레 찾아온 핀잔 같은 말투에 정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더불어 최단기간에 제논을 굴복시키려는 여러 계획들과”

    잠시의 정적.

    “새로운 지도자를 제논에 합리적으로 세우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하고 계셨겠죠?”

    “오호.”

    김창수가 기댄 등을 앞으로 당겼다.

    그의 눈빛에 호기심이 맺혀 있다.

    “내가 제논의 지도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했단 건가?”

    정혁은 약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반대로 그가 의자에 등을 붙였다.

    다리는 자연스럽게 꼬아 올렸다.

    “왜냐, 당신은 나를 제논의 지도자로 앉힐 생각이거든.”

    한 방.

    제대로 김창수의 머리에 치고 들어간다.

    김창수의 오른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깍지 낀 두 손이 풀어 졌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쓸고 올라간다.

    큰 숨이 복부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입을 향해 뿜어져 나온다.

    “애송아.”

    김창수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살의가 깃든다.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

    그러나 거기에 결코 기죽지 않은 정혁이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무료함, 당신의 답답함, 당신의 고뇌와 어려움.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해 줄 키를 내가 쥐고 있어. 그렇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정혁은 서늘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벌거벗은 채로 김창수의 시선을 온전히 받는 듯했다.

    “주둥이 하나 때문에 내 도끼에 목숨을 잃은 자들만 셀 수도 없다. 그런데, 감히.”

    김창수가 몸을 일으켰다.

    “내 앞에서 우리 제논을 조롱해?”

    위압감이 몸서리 칠만큼 강렬하게 정혁을 휘감았다.

    저절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김창수가 책상을 두 손으로 강하게 내리치며 상체를 앞으로 바짝 숙여 정혁의 코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의 딱딱한 표정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김창수.

    강자다.

    오아시스의 강자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안에 갇혔다고 해도 야수는 야수.

    오랫동안 배까지 고픈 야수이기 때문에 그의 상태는 지금 매우 날카로울 뿐 아니라 조급하기까지 하다.

    오아시스 정식 랭킹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위치에 있는 것이 분명하며 더불어 노련한 길드원까지 보유한 대형 길드의 수장.

    그러나 예상대로라면….

    정혁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김창수라면 애초에 이 제논의 기사단이 된 것에 후회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자이지만 그 선택에 후회가 없다고 믿어 왔을지라도 지금의 상황은 영 탐탁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길드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제논이 더욱 강대한 왕국이 되고 더불어 세계의 커다란 균형이 되어 줄 거라는 확신이 모두 깨어졌기 때문에.

    “‘한’이 했던 일, 그 방향성만큼은 옳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당신은 믿고 있을 거야.”

    갑작스레 등장한 그 이름에 김창수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다시 몸을 당겨 의자에 앉았으나 절절한 기운 만큼은 그대로였다.

    “그가 사라진 3년. 아무리 악동이었고 세계의 악이라고 생각되는 자였지만 그가 세계의 균형이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었을 테지. 거대 악이었기에 모두가 그를 따라잡으려 혈안이었던 그때, 지금처럼 비상식적인 세력들이 오아시스 전역에 분수처럼 쏟아지지 않았고 서로 간에 분쟁이 지속 되지 않았고 정말 순수한 강함을 쫓으며 모든 플레이어들이 유대를 이어 가던 그때, 그때가 그리운 거야.”

    왜냐.

    김창수는 그렇게 세계의 균형이었던 ‘한’ 곁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압도적인 강함,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함, 그것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세계의 균형과 모두의 일치단결.

    그런 ‘한’의 순수한 강함을 동경하고 또 궁금해했으니 그는 그렇게 일관적인 무시를 받으면서도 기어코 한을 따랐던 것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이 사력을 다해 키워 왔던 길드를 왕국의 건설에 투입시키고 자신이 믿었던 동료가 왕권을 세우는 데 조력했으나 결국 원래 뜻이었던 세계의 균형보다는 자신의 실속만 챙기는 모습에 이골이 났다.

    그러나 스스로 잘 알고 있듯이 김창수는 타고난 싸움꾼일 뿐 왕좌에 앉아 주변을 살피며 세계를 다스리는 일은 그의 옷이 아니다.

    김창수가 몇 번 목을 가다듬듯이 헛기침을 했다.

    “내 말이 틀려?”

    “왜 너일 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굳이?”

    ‘그렇지.예상을 전혀 빗나가지 않는군.’

    “이 길드 안에 왕의 재목은 없어. 애초에 정치적 방향성을 가진 길드는 아니었잖아? 전투를 사랑하고 전장을 집으로 여기는 자들이 모인 의리파 길드니까. 그리고 당신만큼 강한 자도 아직 없잖아?”

    코웃음이 이어졌다.

    “네놈은 나만큼 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글쎄, 아마 앞으로는 더 강해질걸.”

    반론은 따라오지 않았다.

    정혁은 계속해서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제논의 왕이 되고 싶진 않아.”

    김창수가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그래, 장단에 맞춰 주지. 그렇다면 네가 이곳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냥, 제논의 땅과 길드를 내놔. 내가 가질 테니.”

    정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무실 외벽이 터져 나가듯 박살이 났다.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어느새 정혁의 멱살은 전과 같이 그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김창수의 표정엔 살기가 가득했다.

    “정말 획기적인 자살 방법이군.”

    그의 딱딱한 말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정혁은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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