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36화 (36/200)
  • ◈36화

    드웨이크는 일련의 이야기를 전달받고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김창수가 떠난 뒤 어떤 연락도 되지 않아 마음을 졸이던 차였다.

    그러나 김창수는 하늬안과 함께 돌아왔고 홀연히 본인의 집무실에 들어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하늬안이 곁에서 정혁과 있었던 일들을 전달해 주었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제논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셨다고?”

    드웨이크가 재차 하늬안에게 물었다.

    하늬안은 잠시 주저 하다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정확한 의사는 모릅니다. 다만 그 녀석의 말에 부정하지 않으셨다는 것 말고는….”

    드웨이크가 몸을 돌려 낡은 책장에 기대어 섰다.

    고민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 이건 진짜 팀장이니까 말해 주는 거예요! 하, 진짜 들키면 죽을 만큼 맞을 것 같은데… 다 잊으라고 했는데….”

    마지막 말끝을 흐리며 하늬안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긁었다.

    복잡한 심경이 여지없이 드러나 보였다.

    “팀장들이 다 모여야 할 수도 있겠어.”

    “예?”

    인상을 잔뜩 쓰고 헝클어진 머리의 하늬안이 고개를 숙였다가 살짝 치켜뜬 눈으로 드웨이크를 바라보았다.

    드웨이크는 입술을 깨물면서 허공을 주시하다가 하늬안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아는 형님은 그럴 사람이야. 가만히 있을 양반이 아니라고.”

    “가, 가만히 안 있으면요? 정말 제논을 뒤엎을 거라는 말이에요?!”

    “당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하늬안과 드웨이크가 목소리의 출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정혁이 서 있었다.

    “뭐야? 언제 왔어?”

    하늬안이 깜짝 놀라서 정혁에게 다가왔다.

    정혁은 약간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고는 드웨이크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몸은 좀 좋아지셨습니까?”

    그의 말에 드웨이크 역시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셨네요.”

    “귀하다니요.”

    ‘확실히 그때와는 대접이 다르군.’

    정혁은 속으로 약간 낄낄대면서 큰 숨을 들이쉬어 가슴을 좀 펴 보았다.

    “아니, 지금 오면 어떻게 해? 아린은! 아크 제국은? 왕국은 또 어쩌고?!”

    하늬안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지만 정혁은 그녀를 옆으로 밀치며 드웨이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김창수… 아니, 마스터는 어디 계십니까?”

    “지금은 좀 실례일 것 같습니다.”

    드웨이크의 대답에서 단호함이 느껴졌지만 살해 위협을 당한 입장인 정혁 역시 당장에 결판을 짓고 싶은 일들이 남아 있었다.

    ‘감히, 나를?’이라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 당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당당히 그럴 수 없다는 게 더욱 밉고 싫었다.

    자존감의 급강하를 느끼며 굴욕에 휩싸였던 시간.

    정혁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에 논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가 정혁의 목소리에서 급박함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스터께서 집무실에 들어가셔서 어떤 생각과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면 유일한 출입구인 집무실 문에 결계 마법이 걸립니다. 우리 길드의 최상위 마법사가 마스터에게만 제공하는 결계 마법 스크롤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논 내에서는 누구도 그 마법을 해제할 수가 없어요.”

    ‘신중한 양반이라는 것은 대화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의외의 곳에 취미가 있구만.’

    정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드웨이크에게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럼 드웨이크 님 집무실은 어디죠?”

    드웨이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안내하듯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그는 정혁과 함께 걸으며 제논의 기사단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논의 기사단 성채는 왕국 제논의 도성 남부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다.

    성채 외벽만 두 단으로 지어져 두 개의 정문을 지나야만 제논의 기사단 성채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과 성채 사이 공간들은 모두 훈련장으로 마련되어 있다.

    각각의 위치에서 다양한 팀으로 활동하는 길드원들이 스스로를 단련하는 데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다.

    제논의 기사단 본청 건물은 가운데 센트럴이라고 하는 거대한 타워 형태의 건축물을 기준으로 여섯 갈래의 건물이 뻗어 나가는 구조로 지어져 있으며 이 여섯 갈래가 기사단의 여섯 팀에게 배정되어 활용되고 있다.

    기사단은 제논 도성 수비대의 역할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제논의 대외적인 외교 활동 지원, 경제력 보강을 위한 각종 레이드와 다른 종족 혹은 세력 간의 협상과 분쟁 해결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제논이라는 국가를 지탱하고 있다.

    사실 가장 큰 전투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창수는 제논의 왕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대륙의 음유시인들이 노래하지만 제논의 기사단은 어떤 야망 없이 김창수의 완벽한 통솔과 통제하에 묵묵히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제논 내부의 정치 싸움이 극에 달했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국 안에서의 생존만 모색하는 모습에 이골이 난 몇몇 길드원들이 자진해서 길드를 이탈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요 근래에는 팀장급 직위의 길드원도 김창수에게 비난과 폭언을 뱉으며 길드를 나갔을 정도.

    그런 탓에 드웨이크가 그 팀까지 도맡아 운영하고 있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몇 걸음 더 걷자 매우 화려한 복도가 펼쳐졌다.

    정말 긴 복도 끝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이고 좌우측에 각각의 문들이 있었으며 문마다 벌어진 간격으로 보아 그 안의 방들도 넓어 보였다.

    문과 문 사이에는 그동안 제논의 기사단이 잡아들였던 몬스터들의 머리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거나 단상 같은 것에 올라가 있었다.

    돌티아 고원의 사자왕, 자이언트 나이트메어, 기사단장급 데스나이트, 어둠 날개 가고일 등등 하나같이 고전 했을 법한 몬스터들이다.

    정혁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주변을 지나가는 길드원들이 드웨이크에게 존경의 인사를 건네는 동시에 정혁을 유심히 바라보며 사라져 갔다.

    시선을 느꼈는지 드웨이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논의 기사단에서 가장 핫한 사람입니다. 수다쟁이 왈로에게 맹독염화의 무기를 만들어 준 사람이니까요.”

    ‘그 자식 어째 무기를 받을 때 꼭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한테 장난감 선물 받는 꼬맹이 같더라니, 입도 싼 녀석이었구만.’

    “뭐, 그게 왈로의 장점이긴 합니다. 우리 레이드 팀의 활력소니까요. 할 땐 하고 놀 땐 노는, 좋은 팀원이죠.”

    그는 곧 복도 중앙의 어떤 문 앞에 멈춰 섰다.

    ‘레이드 팀장 드웨이크’라는 문패가 새겨진 고풍스러운 문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정혁이 들어가자 하늬안이 밖에서 문을 닫았다.

    “꽤 예의가 있는 여자였네요?”

    정혁이 뒤를 힐끔 보며 비꼬듯 말하자 드웨이크가 피식 웃으면서 거들었다.

    “여행길이 고단하셨겠습니다.”

    그 순간 문 바깥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늬안이 발로 문을 걷어차는 소리였다.

    드웨이크가 작게 실소했고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방을 둘러봤다.

    편백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방은 생각보다 검소하지만 규모는 컸다.

    당시만 해도 거의 박살이 나다시피 했던 그의 무기는 어느새 그때보다 더 강한 무기들로 교체되어 한편에 걸려 있었고 그 옆에 그의 중장갑들이 함께 있었다.

    넓은 나무 재질의 책상과 의자 뒤로 큰 창문에 세 개 뚫려 있었으며 마침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방 안을 더욱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옆에는 책장들이 놓여 있었고 동시에 넓은 벽에는 오아시스의 대륙들이 담긴 지도와 유명한 몬스터들의 출몰 현황이 핀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몇몇 곳에는 빨간색 X자가 그려져 있기도 했는데 정혁이 망쳐 버렸던 키메라 사냥터도 지도에 X자로 그려져 있다.

    드웨이크는 들어오자마자 차를 타는 중이었다.

    카모마일의 시원한 향기가 정혁의 코를 간지럽혔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차는 금방 준비되었고 정혁은 자연스럽게 중앙에 마련된 티 테이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드웨이크는 두 잔을 들고 자리에 내려놓았다.

    얼굴에 길쭉이 상처가 난 사내가 그의 손보다 작은 찻잔을 들고 테이블에 내려놓는 모양이 썩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졌지만 카모마일 차 한 모금을 마신 정혁이 커진 동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의 소질이 있으시네요?”

    “그렇게들 놀라는 편입니다.”

    정혁의 말에 드웨이크도 인정하는 듯이 웃으며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걸어오면서 제논의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 제논의 사정 정도는 잘 들었다.

    정혁은 김창수와 다시 한번 대면하기 전에 마침 원치 않게 시간이 비게 되었으니 안면식이 있던 드웨이크에게 조금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살해 협박을 당했다 들었습니다. 하늬안이 그러더군요.”

    “어? 그거 잊으라고 마스터가 단단히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여기는 다 수다쟁이만 있나요?”

    “하하, 아닙니다. 그만큼 하늬안과 저는 돈독한 사입니다. 저와 마스터만큼 말이에요.”

    “…마음고생이 많겠군요.”

    다시 한번 문밖에서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린다.

    쿠웅- 정혁이 뒤를 힐끔 보고는 말을 이었다.

    “예, 뭐 썩 기분 좋은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제논에 베푼 것에 비하면 말이에요.”

    “제논에 베풀었다…?”

    드웨이크가 물음표를 가지고 말을 마치며 찻잔을 내려놓는다.

    빛 사이로 차의 향기를 담은 작은 수증기가 옅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진다.

    “왈로의 무기만 가지고 하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드웨이크의 말에 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물론 왈로의 무기 자체가 가지는 힘을 당신네들이 잘 사용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수리는 저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완벽한 제 베풂이 맞구요. 더불어 이번 전투로 인해서 제논…? 아니 제논은 아니지, 제논의 기사단은 그 유명한 은행나무 엘프 왕국과 동맹을 맺을 기회를 얻었어요. 이것도 제 인연에서 나온 베풂이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드웨이크는 속으로 약간 뻔뻔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뭐, 그것이 정혁의 성격이니까 이해하기로 했다.

    뭐랄까, 항상 대화의 주도권은 정혁이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번씩 정혁의 레벨을 보면 그 숫자에 소위 ‘현타’가 오기도 한다.

    200레벨도 되지 않은 플레이어 주제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자신과 그보다 더한 마스터까지 제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힘의 세계.

    약육강식의 세계.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평정한 자는 ‘한’뿐이었고 결국은 세력 간의 결속이 평화를 유지하는 그런 세계.

    이단아처럼 등장한 정혁은 평화 유지를 위한 결속의 단일 고리로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드웨이크는 여기고 있었다.

    이는 마스터 역시 같은 생각이리라.

    “하지만 생각이 확고해졌습니다. 살해 협박에 의해서 말입니다.”

    “생각이요?”

    “예.”

    “무슨?”

    드웨이크의 말에 정혁이 빙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제논을 가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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