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35화 (35/200)
  • ◈35화

    일행은 도성까지 걸음을 옮겼다.

    엘라는 여전히 뿔이 나서 팔짱을 끼고 정혁의 뒤를 따라왔다.

    아스칼 역시 분통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엘라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군락지에서 왕국 도성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남짓, 도성을 통과해 왕궁의 입구까지 20여 분이면 충분했다.

    일단 도성 입구에서부터 ‘아린 왕 만들기 프로젝트’는 실행되어야 했다.

    요리조리 계획을 생각하고 수정하며 정혁은 여러 변수를 계산했다.

    그 사이에 묵묵히 그를 지켜보던 박달수의 고민 역시 깊어졌다.

    ‘죽여야 하나?’

    박달수의 머릿속에 가장 크게 박혀 있는 생각이었다.

    잊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곳은 오아시스의 게임 안.

    죽고 죽이는 것이 당연시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 속이다.

    강한 자는 성장하고 살아남는다.

    죽는 자는 시간의 흐름 속에 도태되었다가 다시 접속하면 그만이다.

    물론 한 번 죽으면 오아시스 시간으로 1년의 공백기를 가져야 한다는 패널티가 있긴 하지만 당장 저 인물의 성장세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견주어 본다면 장차 오아시스의 정세에 어마어마한 소용돌이를 일으킬지 모른다.

    이제야 진정된 세계다.

    ‘한’이 사라지고 오히려 요동치던 세상이 대전쟁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와 오아시스 종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겨우 균형을 맞춰 가던 시간들이었다.

    아크 제국이 남하하고 있다곤 하지만 계획대로 은행나무 엘프들과 자유 연맹이 동맹을 맺게 된다면 아크 제국도 당장에 더욱 치고 내려오는 결단을 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대전쟁을 겪고 싶진 않은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변수들이 문제다.

    정혁이라는 변수 말이다.

    김창수라면 분명히 저 남자를 길드원으로 영입하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살해 협박까지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욱이 가만 둘 수 없다.

    ‘정말 죽여야 하나?’

    “야.”

    그 순간 어떤 목소리가 박달수의 귓전을 때렸다.

    “너희 진짜 웃긴다.”

    엘라였다.

    “얕보는 것도 정도껏이지, 누구 앞이라고.”

    박달수는 걸음을 멈춰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엘라의 손이 다시 뻗어 올라갔다.

    정혁이 다급히 엘라에게 달려들어서 손을 부여잡았다.

    “에, 에에에이! 또 왜 이래!”

    엘라는 날카로운 눈매로 박달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모를 것 같아? 허튼 생각 하지 마.”

    박달수는 잠시 숨을 참았다가 내뱉었다.

    ‘이 정도로 예민하다니.단순히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찰나의 옅은 살기도 느낄 수 있다고?’

    그의 시선은 엘라에서 다시 정혁에게로 머물렀다.

    정말 위험한 자다.

    너무 간단히 생각했다.

    에고 장비를 만들 수 있다곤 하지만 사용자에 따라 현저히 능력이 상이한 에고 장비의 특성을 알고 있는 박달수였기 때문에 고작 60레벨짜리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에고 장비라고 해 봐야 뭐 있겠나 싶었는데 이건 장비라고 하기보다 개인 소환수라고 여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심지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며 소환사의 능력이 아니라 본연의 능력을 제약 없이 펼칠 수 있는 그런 존재.

    아니, 이런 존재를 오아시스에서 본 적 없고 그뿐만 아니라 이런 자들을 부리는 소환사도 본적이 없다.

    하긴 애초에 그의 칭호는 대장장이.

    직업도 다른 방향이 보이지 않는 대장장이.

    스탯도 어디에도 전투에 능해 보이는 구석이 없다.

    그래서 이런 이변이 가능한 건가? 아니다.

    납득할 수 없다.

    이건 프로그램의 규칙에 위반된다.

    박달수는 그렇게 느꼈다.

    이건 버그이자 오류다.

    심각하다.

    어쩌면 ‘한’보다 훨씬 심각하다.

    엘라는 쯧 소리를 내며 다시 팔짱을 끼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정혁은 허허 웃으며 작게 까딱 인사를 하고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도성의 성벽이 천천히 나무들 사이로 윤곽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정혁이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잠시 엘라와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마음에서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하늬안은 분명 떠났는데 하늬안의 10배쯤 되어 보이는 자가 그의 앞에 있다.

    분명 자신이 만들어 낸 에고 무기 이고 주도권 역시 자신에게 있는데 한없이 스스로가 작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에 돌이 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아린이 다소 결연한 표정으로 정혁을 주시했다.

    “일단 자유 연맹의 두 사람은 잠시 이곳에서 대기해 줘. 잔여 수비대가 외곽을 지키고 있을 수 있으니까.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은행나무 엘프 내부 상황에 아린와 엘라의 등장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적 타격이 클 테지. 거기에 증오하다시피 하는 인간의 등장이라면 더욱 악영향을 끼칠 거고.”

    박달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칼 역시 묵묵히 의견에 동의했다.

    “아린은 이곳에서 엘프 병력들을 소환해. 그리고 엘라와 함께 도성 외곽 문을 향해 진군한다. 아마 등장만으로도 수비대는 누가 나타났는지 알 거야. 중요한 건.”

    정혁이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네가 아엘프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건데. 내 생각엔 아마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거야. 도성 정면까지 아크 제국이 주둔해 있는 상황이니까. 너의 등장이 마치 구세주의 등장처럼 여겨질 테지.”

    엘라가 피식 웃으며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린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가 손으로 목걸이를 감싸 쥐었다.

    “네 군대가 그대로 도성 내부를 통과해 도성 주민 지구를 지나 입구까지 전진하면 이미 민심을 네게 쏠리겠지. 당연히 아크 제국의 군대는 네 군대를 이길 수 없어. 이 대륙의 어떤 자도 엘라가 보호하고 있는 은행나무 엘프의 왕을 죽일 수 없을 거야. 당장은.”

    “당장은?”

    엘라가 불편하다는 눈으로 정혁을 바라보았다.

    정혁은 입을 삐쭉이고서 말을 이었다.

    “당장이면 충분해. 위기의 순간에 등장. 존재의 어필, 역전의 서막, 완벽한 반격, 그리고 승리. 기승전결이 아주 짜릿하지. 그리고 나면 이제 당신네들의 차례야.”

    정혁이 박달수를 바라보았다.

    “이 부분이 사실 제일 중요해.”

    박달수가 고개를 갸웃 하며 물었다.

    “왜죠?”

    “사상의 붕괴. 그 첫 번째 균열 부위를 비집고 벌려 줘야 하거든.”

    아스칼이 머리를 긁적였다.

    “쉽게 말해.”

    그의 조금 난폭한 어투에 정혁이 빙긋 웃곤 말했다.

    “위기 상황의 극복, 여론의 지지, 그러나 결국 아엘프는 아엘프. 주민들이 인정하는 분위기라 하더라도, 아무리 목숨같이 여기는 예언일지라도 수천 년간 이어지던 역사적인 사상과 신념을 하루아침에 바꾸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분명 몇몇의 깨어 있는 엘프들이 있겠지만 대개 쇄국 정책을 이어 가는 정치 집단은 매우 보수적이라 정통과 적통을 매우 강조하고 있을 거야.

    그들의 꽉 막힌 신념에 아린의 등장으로 균열이 생길 것이고 이때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일 또 다른 기회가 없을 거야.”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정혁이 눈빛을 반짝이더니 아스칼에게 박수를 보냈다.

    “쉽고, 정확하네.”

    “그저 등장만 해 주면 되는 겁니까?”

    박달수가 묻자 정혁이 손가락으로 박달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좋은 질문이야. 당연히 그러면 안 되지.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엘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크 제국의 병력들이 정리되는 것 같다 싶을 때 그들 속에서 등장해서 단박에 아린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어. 도돈치아의 상황을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거야. 분명 아린의 곁에는 지금 이 왕국의 왕으로 군림하는 자가 서 있을 거야. 이때 아린은 절대 그자에게 의견을 구해서는 안 돼. 반드시 엘라와 엔트어로 대화를 나누고 이들을 돕고자 하는 의지를 표해야 해.”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엘라가 딱딱하게 물었다.

    “아린이 온전한 왕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끝까지 아린의 왕정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솎아 낼 필요가 있어. 처음부터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 없지. 적통? 혈통?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은행나무 엘프 전체를 관통하는 예언의 존재. 고대 엔트 엘라가 인정하고 지지하며 보호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맞다는 것을 왕권을 쥔 자들에게 보여 줄뿐더러 인간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린 혼자만의 독선적인 결정이 아니라 엘라의 의도였다는 것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수 있어.”

    “의미라. 그 의미라는 것은 아마도 엘라의 등장 시기에 대한 예언과 퍼즐이 맞겠군.”

    “그렇지.”

    박달수의 말에 정혁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나무 군락지의 거대한 은행나무는 살아서 움직이며 위기의 때에 은행나무 엘프들을 돕는다. 엘프를 돕는 존재가 내린 판단은 엘프들에게 이득이 되는 판단. 인간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엘라의 의지이며 예언의 확장일 거고, 더불어 어떻게 보면 아크 제국의 어마어마한 힘과 잔혹함에 치를 떨었을 그들에게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야 할 동맹이라고 여길지도 몰라.”

    “그래, 여기까지 잘 넘어갔다 치자. 그리고 그 다음 역할은?”

    아스칼의 물음에 정혁이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는 내 계획대로 흘러갈 거야. 이 다음부터는 김창수가 당신을 부른 이유에 맞게끔 당신 스스로 행동해 줘야 해.”

    정혁이 박달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달수는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저으면서 탄성을 뱉었다.

    “…대단하군. 정말이야. 이 모든 판단이 고작… 60레벨의 플레이어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고? 오아시스를 처음 접해 본?”

    박달수의 말에 정혁은 또 한 번 마음이 찔려 뜨끔했다.

    박달수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첫 번째, 왕께서 왕좌에 정상적으로 안착하도록 근거리에서 최선의 조력과 보호를 이어 가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자유 연맹과 은행나무 엘프 사이의 긴밀한 연대를 이루어 서로가 서로에게 아크 제국의 남하를 적극적으로 제지하는 울타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박달수는 힐끔 정혁을 보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제가 있는 것은 도돈치아에서 온갖 세력들과 분쟁과 협약, 배신, 전투, 동맹 등 외교적인 측면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김창수의 판단이었고 이는 자유 연맹의 판단과 일치합니다. 저는 만족할 만한 도움이 될 겁니다. 여기 있는 아스칼도 당신을 보호하는 데 앞장설 거구요.”

    아스칼이 고개를 끄덕하며 예를 갖추었다.

    아린은 큰 숨을 쉬었다.

    그때 엘라가 찝찝하다는 듯이 정혁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너는 뭐해?”

    정혁이 씩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엘라. 그들을 좀 도와줘.]

    정혁이 엘라와 독특한 전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전음과는 조금 다른, 결속의 관계들끼리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엘라는 표정의 변화 없이 정혁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무슨 꿍꿍이야.]

    [어차피 이곳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 네가 느꼈겠지만 박달수 저 사람은 나를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거야.]

    [그래, 그 덩치 큰 사내놈처럼.]

    [네가 아무리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해도, 이젠 혼자로는 힘들어. 나도 소속이 있어야 하고 보호받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나를 무시하는 거야?]

    엘라의 왼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정혁은 소름이 살짝 돋았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어쨌든 소속을 정할 때가 된 거지. 하늬안에게 전음을 보내서 제논으로 갈 거야. 이곳의 일이 끝나면 돌아와 줘.]

    [괜찮겠어? 그리고 여기서 거기면 거리가 꽤 될 텐데?]

    [네 살짜리 꼬맹이가 물가에 있으면 걱정이 되겠지만 만 살짜리 자연 최강자가 혼자 있다면 아무도 걱정 하지 않을걸. 실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실험?]

    정혁은 엘라에게 찡긋 윙크를 하고 곧바로 후회했다.

    엘라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함께 자신의 주마등이 갑작스레 보였기 때문이다.

    “저, 저는 여기서 물러납니다.”

    정혁이 다급히 인사를 건넸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가세요! 같이 가지 않나요?”

    박달수와 아린이 동시에 물었다.

    정혁은 아린에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아린이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좋은 왕이 되어라. 그럴 수 있지? 그러나 동시에 강한 왕이 되어야 해.”

    정혁은 아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목걸이는 내가 만들어 줬다는 사실, 잊지 말구.”

    정혁은 꾸벅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뒤로 돌아 다시 은행나무 군락지 쪽으로 걸어갔다.

    아린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엘라의 재촉과 함께 떨리는 걸음으로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견고한 도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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