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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34화 (34/200)
  • ◈34화

    김창수와 하늬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혁은 홀로 고요 속에서 고민에 빠졌고 엘라는 그런 정혁의 분위기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녀는 공중에 떠올라 은행나무 군락지를 다시금 살펴보기로 했다.

    에고 장비에 귀속되었다지만 힘은 전보다 더 제약 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 같다.

    뭐랄까, 제로니막스에게서 느껴지던 힘과 비슷한 맥락이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서 힘을 빌리는 듯 한 느낌.

    나약한 인간에게서 힘을 빌린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정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상을 내려다본다.

    여기 저기 흩뿌려진 역병과 타락의 종기들이 사라진다.

    저주는 거둬지고 생명이 움튼다.

    엘라가 우두커니 서 있던 곳, 은행나무 군락지의 최중심부인 둥근 언덕배기에 이제 그녀는 없다.

    항상 노란 빛으로 반짝이던 거대한 은행나무는 이제 없다.

    자유를 찾아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몸이 되긴 했지만 미운 정인지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엘라가 잠시 그곳에 내려 뿌리를 들어 올릴 때 망가진 둔덕을 마법으로 다시 메운다.

    땅을 애정 어리게 몇 번 토닥인 뒤 작은 홈을 파서 두 손가락을 비벼 나온 씨앗을 넣고 덮는다.

    “너는 이곳에서 오래 커라. 그리고 그저 묵묵히 자라고 번성해라. 그저 크거라.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피고 지고 자라고 성장하거라.”

    엘라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허공으로 도약했다.

    ***

    “하늬안 님은 떠나신거죠?”

    아린이 조심스럽게 정혁에게 다가왔다.

    정혁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아린은 고개 숙인 정혁의 옆 의자에 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거구의 김창수가 앉아 있었던 자리였는데 아린이 앉으니 상대적으로 의자가 넓어 보였다.

    아린은 정혁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항상 색다른 전략으로 상황을 타개했던 그였다.

    어떤 가호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놀라운 능력이 함께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만났던 당찬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의 정혁은 뭔가 어색하고 어려웠다.

    순간 정혁이 큰 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어 아린을 향해 씩 웃었다.

    “일단, 너부터 해결하자.”

    “저요?”

    정혁이 아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켰다.

    “듣고 봐서 알겠지만 네가 이제 이 은행나무 엘프들의 왕이야. 왕으로서 왕위에 앉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지금 은행나무 엘프 왕국 도성으로 가자. 어차피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을 테니.”

    “아, 하지만, 거기는 제가….”

    아린의 시선이 떨렸다.

    ‘두려운 거지.그럴 거야.’

    “무섭지?”

    정혁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아린의 눈동자도 함께 움직였다.

    “너는 적통도 아니고 심지어 엘프도 아닌 아엘프인데 만약에 그 힘으로 왕위에 앉는다 해도 허수아비가 되지 않을까 두려울 거야.”

    아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리곤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알면서 뭘 그렇게 말 하시는 거예요.”

    “아무리 엘라가 너를 인정해 준다고 해도 꼴통 중에 꼴통인 은행나무 엘프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꼴통이라는 말에 아린이 작게 쩝 소리를 내었다.

    정혁이 아린을 빙 돌아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뒤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만큼 녀석들은 예언을 중요시해.”

    “…예언?”

    “은행나무 엘프 역사를 관통하는 예언. 왕의 자질.”

    “왕의 자질?”

    정혁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의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내가 한참 녀석들과 한바탕 붙어… 아니지, 녀석들에 대해서 연구했을 때 들었던 예언이야. 은행나무 엘프들 사이에서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예언이 두 개 있지. 하나는 ‘은행나무 군락지에 거대한 은행나무는 살아서 움직이며 위기의 때에 은행나무 엘프들을 돕는다.’ 이 예언이 실제라는 사실을 아는 엘프들은 몇 안 되지만 뭐, 실제로 그들이 위기를 맞았을 때 엘라가 나서서 도와주기는 했어.”

    정혁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듯 큰 숨을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은행나무 엘프의 진정한 왕은 군대를 이끌고 고대 엔트의 가호를 받으며 왕궁으로 진군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있는 왕은요?”

    “사실 지금 그들의 왕은 일종의 섭정 같은 것이야. 네가 과거에 만났던 그 왕도 실제로는 섭정이지. 은행나무 엘프는 왕을 기다리는 존재들. 자신들의 왕을 위해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들. 야욕이 넘치고 호전적이고 꼴통 집단들이지만… 그에 완전히 반대되는 왕을 이들이 만날 때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네.”

    아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스산하게 그들을 지난다.

    따뜻한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바람이다.

    “그래도.”

    정혁의 말에 아린이 재빨리 정혁을 주시했다.

    “그것만으로 모든 엘프들이 너를 쉽게 인정하진 않겠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동시에 시간이 많진 않아. 그래서 지금 그들이 올 거고.”

    정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의 사이에 이공간이 열렸다.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며 바람이 빠르게 이공간으로 밀려 들어가더니 동시에 차원 문이 형성되어 그 안으로 두 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강한 기운을 감지한 엘라가 어느새 그들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차원 문 속에서 걸어 나온 두 남자는 자유 연맹의 당당한 청색 깃발 문양이 새겨진 증명서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거대한 활과 텅 빈 활집을 차고 있는 한 남자는 김창수만큼 덩치가 컸다.

    적색과 흑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견갑 여기저기가 갈라지고 부서져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청색 눈동자에 짧게 자른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왼쪽 눈에 엑스 표시의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약간 각진 턱을 가진 그러나 투박해 보이지는 않는 그런 사내였다.

    동시에 그의 곁에는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아 보임에도 단단해 보이는 남자가 서 있다.

    마찬가지로 전투의 상흔이 붉게 전신을 물들이고 있으며 상체는 탈의한 상태였다.

    가죽 하의도 성하지 않다.

    특이한 것은 양손에 핏자국이 가득한 검정 너클이 굳게 쥐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껌을 씹고 있다가 거침없이 땅에 뱉고는 뭔가 아쉽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서운 눈매와는 다르게 외모는 옆의 사내에 비해 수려했다.

    “김창수….”

    거구의 사내가 중얼거리고는 아린을 보자 90도로 인사를 했다.

    곁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엘프 왕이군요.”

    그리곤 곧바로 아린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정혁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한 걸음 물러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이상한 남자구요.”

    사내는 정혁에게 마찬가지로 손을 내밀었다.

    정혁은 약간 떨떠름하게 남자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이상한 남자라니, 참.

    이들은 그 유명한 도돈치아의 치안대 대장과 분대장 아스칼이다.

    자유 연맹의 최전방에서 각종 분란을 잡고 처리하는 노련한 대장 박달수.

    분노 조절자로 통하지만 그와 동시에 엄청난 패기와 투기를 겸비했다고 알려진 아스칼.

    이들이 왜 갑자기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

    또 그것을 정혁이 어떻게 알게 되었냐.

    엘라의 경계 마법 해제로 인해서 이곳을 방해하고 있던 모든 마법이 사라지자 전음과 공간 이동 마법이 가능해졌다.

    금방 제논의 기사단 성채로 이동한 하늬안이 급히 정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혁이 고민에 휩싸여 있던 그때 말이다.

    그녀의 전음으로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일단 도돈치아가 완전히 아크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동시에 은행나무 엘프 본진 병력이 거의 몰살되다시피 했다.

    자유 연맹의 노련한 치안대가 사력을 다했으나 도돈치아에 현신한 악마 군대와 두 명의 군주, 거기에 전에 보지 못한 강력한 흑마법사의 엄청난 마력에 의해 대전쟁 이후에 면적 대비 최고의 사망률이 집계되었다고 한다.

    플레이어는 물론 그곳의 모든 거주민들이 모드 아크 제국의 병력으로 되살아나거나 굴복했다.

    또한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병력 역시 9할이 대패하고 겨우겨우 왕국으로 되돌아왔으나 왕국 도성 근방까지 진출해 있는 또 다른 아크 제국의 병력으로 인해 오히려 협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잔여 병력은 도성 수비대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든 상황을 전해 받은 김창수는 박달수에게 연락을 했다.

    김창수와 박달수는 오아시스의 시작부터 함께한 절친한 사이였다.

    과거형인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들이 있지만 김창수가 개인적으로 박달수에게 전음을 보낸 것은 무려 3차 대전쟁 이후로 처음이었다.

    박달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김창수에게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무려 고대 엔트의 부활과 엘프 왕의 탄생이라니.

    그는 떠올릴 수 있었다.

    은행나무 엘프들이 신성시 여기는 전설적인 예언을.

    이 모든 예언이 어쩌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전음을 닫고 박달수는 고민했다.

    김창수가 전해 준 공간 이동 포인트로 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김창수의 의도대로 놀아날 뿐이다.

    알고 있다.

    정치적으로 김창수는 박달수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유 연맹의 입장에서 아크 제국이 카탈 대륙의 북부 지역을 거의 다 잡아먹어 버린다면 그 위세를 더 이상 막기 힘들 것이다.

    제논 입장에서는 당연히 중부에 위치한 자유 연맹의 거대한 연합이 아크 제국의 침략을 막아 주는 거대한 방어막일 수밖에.

    그런 입장에서 자유 연맹은 견고해야 한다.

    당장의 수 싸움에서 제논이 가지고 있는 패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치적 제안을 무시할 상황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엘프들의 사상을 도돈치아에서 겪고 느낀 박달수가 아엘프 꼬마 왕의 발돋움을 도와줘야만 한다.

    더불어 이 위협을 왕의 힘으로 물리치고 내부 결속을 다져 아크 제국의 남하를 막는 또 하나의 동맹이 되어 줘야만 한다.

    ‘세상에, 그 꼴통 집단과 동맹이 되다니.’

    그가 은행나무 군락지로 이동한다고 했을 때 혼란 속에서 아스칼이 동행하겠다 소리쳤다.

    그는 만나야 할 여자가 그곳에 있다고 했다.

    함께 이곳으로 와 보니 펼쳐진 상황은 김창수의 말과 같았다.

    아스칼은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는 엘라를 약간 넋 나간 얼굴로 보고 있었다.

    관찰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엘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더니 아스칼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그리곤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불렀다.

    “얘.”

    ‘어어, 저거 위험하다.’

    정혁이 재빨리 엘라와 아스칼 사이를 막아섰다.

    이미 엘라의 손이 아스칼의 뺨을 때리기 위해 올라가 있던 순간이었다.

    “자, 잠시만. 신기할 수도 있는 거잖아!”

    “싸가지 없는 건 너 하나면 충분하거든! 비켜! 너 말곤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어!”

    엘라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스칼이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다가 갑자기 뭐에 기분이 상했는지 큰 걸음으로 다시 앞으로 다가와 고함을 질렀다.

    “왜! 쳐다보는 게 문젭니까?!”

    “뭐?!”

    엘라가 정혁을 집어던질 기세로 밀어붙였다.

    다행히 박달수가 아스칼에게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구겼고 아스칼이 꼬리를 내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째 김창수와 하늬안을 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잠시 정혁의 머리를 스쳤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정혁은 사태를 진정시키고 아린에게 다가가 말했다.

    “준비됐다, 아린아. 자세한 건 도성을 향해 가면서 조율하자.

    상황도 여건도 지금이 딱 주인공 등장할 타이밍이거든?”

    “예?!”

    아린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정혁을 올려다보았다.

    “됐고 가자니까. 엘프 왕국 뒤집어엎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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