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33화 (33/200)
  • ◈33화

    “네, 뭐. 그렇게 부르셔도 됩니다. 대장장이라고 부르시는 것 보다는 낫네요.”

    여전히 본능적인 찝찝함.

    그를 존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의 자존심이 상한 정혁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그러시죠.”

    정혁은 인벤토리에서 정교한 나무 의자 두 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김창수는 입고 있던 전투의 흔적이 잔뜩 묻은 중장갑들을 하나하나 벗어 내렸다.

    언제 왔는지 어느새 김창수의 곁에 와서 선 하늬안에게 양날 도끼를 건네주고 하의 갑옷과 신발까지 모조리 벗은 김창수는 한결 가볍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안에 입고 있던 내의도 군데군데 찢어지긴 했으나 그래도 나름 정교하게 짜여 있는 면 재질의 옷으로 활동하기에 상당히 간편해 보였다.

    정혁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우락부락한 근육들이 오히려 옷을 찢고 나오려고 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으시죠.”

    “그래,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느낌이군.”

    하늬안이 두 개만 펼쳐진 의자를 보더니 정혁을 노려보며 인상을 구겼다.

    정혁이 눈치챘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

    “다소 당혹스러운 만남이긴 했으나 그래도 뭐,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았네.”

    “그렇죠.”

    정혁이 손을 깍지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는 말이지.”

    ‘음.그래, 그렇긴 하지.’

    김창수는 까슬까슬한 턱을 괴고 어루만지며 어떤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그 사이 정혁은 엘라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린을 잠깐 보았다.

    그들은 엔트어로 자유롭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들과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연의 수호자’라는 칭호 덕분인지 이해되지 않던 엔트어가 점점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엔트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떤 뜻과 뉘앙스인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제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건 생각해 보지 않은 돌발 질문이다.

    정혁은 다시 김창수를 쳐다보았다.

    실례일 수 있지만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김창수의 눈에는 여러 감정들이 섞여 있었고 그 안에는 굳은 결단 같은 것이 보였다.

    정혁은 결단의 의미가 과연 이것일까, 궁금했다.

    실례가 되더라도 묻고 싶었다.

    “제논을 버릴 겁니까?”

    정혁의 말에 하늬안이 작게 움찔하며 커진 동공으로 마치 기계처럼 천천히 앉아 있는 김창수에게 고개를 돌려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김창수가 너털웃음을 짓자 다시 재빠르게 정면을 주시했다.

    “자네 정말 앞뒤가 없구만.”

    “글쎄요. 그런 질문에 그런 대답을 드린 겁니다.”

    그는 껄껄껄 웃다가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모르겠네. 사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고.”

    김창수는 끝말을 흐렸다.

    그리곤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느낌을 받았나?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느낌말이야.”

    “제가 아는 김창수라는 사람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

    정혁은 마치 두 사람의 얼굴 위에 떠오른 물음표가 보인 것처럼 움찔 했다.

    ‘하긴 난 이제 고작 60레벨의 개쪼렙 플레이어인데 어디 감히 제논의 기사단 길드 마스터를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해 버렸다.아이씨….’

    “쟤, 쟤가 좀 그래요! 이상한 앱니다. 예.”

    하늬안이 황급히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뭐, 워, 워낙 유명하시니까. 제, 제가 조사도 많이 하는 스타일이고, 생각도 많고 뭐 그렇, 그렇습니다.”

    정혁 역시 급히 말을 뱉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하늬안, 너는 왜 당황하냐.하긴, 집안에 가장 큰 어르신이 이곳에서 생고생을 하셨는데 안절부절못하는 마음 이해한다.’

    “참, 이상한 친구야. 그래, 그렇다면 앞으로의 나, 김창수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정혁은 침묵했다.

    그러고는 똑바로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잠시의 정적.

    흩날리는 바람 속에 어느새 비릿한 냄새가 사라졌다.

    엘라의 자연 마법이 천천히 이 땅을 정화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정혁이 큰 숨을 들이쉬며 물었다.

    “앞 뒤 안 가리는 놈인데 괜찮습니까?”

    “뭐든 말해 보게.”

    “제논의 왕과 당신은 의형제를 맺고 서로의 목숨까지 걸만큼 긴밀한 관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논의 왕이 되고 나서 많은 것이… 변했겠죠.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제논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뿐만 아니라 믿고 있던 왕까지도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늬안이 정혁에게 눈치를 주듯이 입을 움찔움찔했다.

    정혁은 하늬안을 잠시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길드 내의 여러 이야기들을 듣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떠나고 곁에 남은 이들도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대의와 의리를 중요시하는 당신에게는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일이었겠죠. 아니… 그렇다고 믿었을 겁니다. 애써 자위하며.”

    김창수가 정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그다음에 정혁이 뱉을 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을 겁니다. 가슴에 맹수를 품은 김창수가 이제 본능을 따르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제논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기회. 그리고 자신의 왕의 자질을 시험해 볼 기회. 만약에 이 기회에 왕이 옳지 못한 판단을 하고 또 정치 싸움에서 이익만 취하려 하거든….”

    “하거든?”

    “제논을 뒤엎을 생각이시겠지요.”

    몸을 정혁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던 김창수가 다시 몸을 당겨 팔짱을 끼며 등을 등받이에 기대려다가 무릎에 손을 지지하고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작군.”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등을 돌려 엘라와 아린이 대화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침 그 기회를 제가 드렸죠. 뭐, 의도한 건 아닙니다.”

    정혁이 약간 뻔뻔한 어투로 말하자 김창수의 어깨가 몇 번 들썩였다.

    헛웃음을 뱉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늬안. 오늘의 이야기는 잊어 주게. 앞으로의 이야기도.”

    “예, 마스터.”

    하늬안이 재깍 대답했다.

    김창수가 다시 몸을 돌렸다.

    “고맙군. 이런 이야기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 없어서 속에 진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야. 상쾌해.”

    “솔직한 대답을 드렸던 겁니다.”

    정혁의 말에 김창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잠시 바라본 그의 모습은 태산 위에 선 맹수 같다.

    거리낄 것 없는 맹수.

    이제야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목적이 생긴 맹수.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의 우리가 짊어져야겠지. 다만 확실한 것은 전쟁의 시위가 당겨진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세. 결코, 우리 길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의 굳은 결의가 느껴진다.

    김창수 본연의 마나가 아우라가 되어 퍼진다.

    피부가 떨리는 결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겐 자네가 필요할 것 같네. 지금 내가 보았던 자네의 능력은 분명히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거야. 왈로에게 무기를 만들어 준 것도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그래, 그 덕에 이렇게 지금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맞기도 틀리기도 한 말이다.

    거대한 야수 우리에 던져진 양 한 마리 신세였던 그때는 정혁에게 보험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긴 하다.

    몇 가지 풀어야 할 문제가 있지만 일단 든든한 엘라가 버티고 있다.

    엘라 하나만 해도 큰 전투력이다.

    김창수가 천천히 하늬안에게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아아, 더불어 해 주고 싶은 말은 우리의 편에 서지 않겠다면 글쎄, 내 생각엔 지금 자네를 이곳에서 죽이는 게 좋을 것 같네.”

    “예?”

    뇌정지.

    김창수의 결의가 살기로 변화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갠데?’

    당황하기는 하늬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증오하는 대상인 것은 여전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죽인다고?’

    “고작 60레벨의 플레이어의 능력이 에고 장비를 만들어 내고 전설급 광석이나 보물들을 캐내 장비를 재구성하며 특별한 능력을 부여한다면 모르는 사람은 헛소리라고 치부하겠지. 그러나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본 내 생각에 자네를 다른 쪽에 빼앗겼다간 장차 우리 길드에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아.”

    소름끼치는 살기는 엘라와 아린에게도 닿았다.

    엘라가 정혁과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당장에 왈로만 봐도 그렇지. 자네의 무기는 왈로에게 족쇄일세. 언제 풀릴지 모르는 족쇄. 불안한 폭탄 같은 것. 자네가 완전히 우리의 편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이고 편안해지는 편이 나아.”

    김창수는 하늬안에게 건넸던 양날도끼의 자루를 쥐었다.

    그가 몇 번 양날 도끼를 위협적으로 휘둘렀고 정혁의 뒤로 엘라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공중에 섰다.

    “…그러지 않는 게 좋아.”

    엘라는 다소 차갑게 말했다.

    김창수는 엘라는 올려다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살기가 서서히 거둬진다.

    “당장 이곳에서 그런 일을 벌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네. 나도 지쳤고 하늬안도 지쳤지. 반면에 에고 장비로 변한 저 존재의 힘은 상당해.”

    아니.

    그렇지 않다.

    에고 장비는 결국 소환수와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결속한 자가 사라진다면 장비 본연의 모습을 잃는다.

    그 이후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에고 장비로 남을 것인지 사라질 것인지.

    빈틈이 이렇게 많은 지금 김창수가 엘라의 결속자인 정혁의 목을 베는 데에는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김창수의 손에는 어마한 위압감을 가진 양날 도끼가 쥐어져 있다.

    저것을 지금 휘두를 때, 그 찰나의 순간에 과연 엘라가 정혁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다시 기회가 온다면 나는, 아니 우리 제논의 기사단은 자네를 죽일 걸세. 반드시 죽일 거야.”

    살인 예고도 이런 살인 예고가 없다.

    소름이 정혁의 온몸에 돋는다.

    ‘한’이었을 때 정혁은 길드 몇 개가 덤빈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에 비하면 비교할 가치도 없을 만큼 나약한 그가 과연 저 경고를 웃으며 넘길 수 있을까.

    절대 안 된다.

    무조건 죽을 것이다.

    결국 그만 죽으면 강대한 엘라의 공격도 끝일 테니.

    “그런 선택지를 선택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네.”

    김창수가 양날 도끼를 내려놓았다.

    꾸웅- 소리를 내며 양날 도끼의 머리가 땅을 파고든다.

    “이러면 나가린데….”

    정혁이 작게 신음하듯 한마디 뱉었다.

    김창수가 의자에 앉으며 껄껄 웃었다.

    그리곤 박수를 한 번 쳤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의도로 보였지만 이미 잔뜩 날이 선 이곳을 되돌리기엔 어려워 보였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는 말게. 나는 이제 돌아갈 거야. 하늬안도 함께 갈 거고.”

    하늬안은 정혁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가 같이 간다는 말에 다시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김창수는 하늬안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결정하는 시간을 그리 오래 주지는 않겠네. 정세는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야.

    부디 왕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는 것까지 봐 주고 제논으로 와 주기를 바라네. 북쪽으로 올라갈 생각은 하지 말게. 이유는 자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정혁은 묵묵히 김창수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저 김창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만 가지. 혹시 이곳의 경계 마법을 잠시 해제시켜 줄 수 있겠나?”

    그의 말에 정혁을 엘라를 보았고 엘라는 씁쓸하게 입맛을 살짝 다시곤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룬 마법이 몇 번 바뀌어 가며 반짝이다가 빛줄기가 공중으로 퍼져 올라가 사방으로 산개했다.

    김창수는 장비들을 챙겨 인벤토리에 넣고 양날 도끼만 등에 단단히 고정한 뒤 하늬안에게 귀환 스크롤을 건넸다.

    하늬안은 스크롤을 받고 물끄러미 정혁을 바라보다가 먼저 사라지는 김창수를 따라 스크롤을 활성화시켰다.

    그녀와 김창수는 활성화된 스크롤에 저장된 마력에 따라 공간 워프 홀을 열고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제야 정혁은 큰 숨을 쉬며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몸을 다시 의자에 앉힐 수 있었다.

    “제기랄.”

    그의 작은 탄성이 적막 속을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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