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32화 (32/200)
  • ◈32화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대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보존되었던 은행나무 군락지는 이제 더 이상 군락지의 모습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은행나무들은 살아 뿌리를 내렸다.

    정혁은 엘라와의 말다툼 끝에 그녀를 겨우 꼬리 내리게 하고서 다시 무기화를 해제시켜 주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정혁을 노려보며 이빨을 부득부득 갈고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오염된 대지에는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고 엘라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에 생명의 씨앗을 다시 심었다.

    언젠가 자신처럼 만 년의 세월을 견딘 어떤 나무가 또 다시 엔트의 삶을 살며 이곳을 지켜 주기는 바람으로 말이다.

    물론 영겁의 세월 고통 속이겠지만 사명은 분명 이곳에 뿌린 어떤 생명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것이다.

    엘라가 그랬던 것처럼.

    “에고 스태프로군.”

    엘라가 사라지고 뒤에 있던 김창수가 정혁에게 천천히 다가와서 말했다.

    정혁이 흠칫 김창수를 보고 놀라긴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거니와 판단해 보면 이제부터 모든 대화의 우위는 정혁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창수의 눈에는 분명 에고 장비를 제작할 수 있는 대장장이로 비칠 것이다.

    ‘설정상 크나큰 오류라고 여길 것이고 오아시스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하겠지.그러나 어쩌겠나.’

    어찌 생각해보면 정혁이 오아시스 자체의 큰 버그 같은 존재일뿐더러 요즘은 어떤 이유에 의해서 오아시스가 그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많이 들고 있었다.

    에고 장비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

    또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대장장이.

    오아시스 전체에 걸쳐 전례에 없는 대사건이긴 하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난처하게 되셨죠?”

    정혁이 조금의 감정을 담아 김창수에게 사과했다.

    사과라니, 스스로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가 있어서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도리로서 당연한 절차였다.

    “뭐, 아닐세, 자네의 이야기에 동의한 나의 판단이었을 뿐.”

    김창수는 그저 싱긋 웃어 줄 뿐이었다.

    정혁은 그의 말투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다.

    “자네 말이 모두 맞네. 나는 전투에 배고팠지. 우리 길드는 왕정의 비린내 나는 정치 싸움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 결코 아니었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가리고 막으며 지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네.”

    하늬안과 아린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늬안은 김창수와 눈을 마주치더니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살짝 고개만 까닥거림으로 인사를 했고 아린은 이렇게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한 인간은 처음 봤다는 듯이 눈동자를 빛내며 여기저기 그를 살펴봤다.

    김창수는 그런 아린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을 뵙습니다.”

    갑작스런 김창수의 행동에 아린도, 정혁도, 하늬안도 동시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정혁이 하늬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고 하늬안은 깜짝 놀라 자신도 무릎을 꿇었다.

    정작 본인은 꼿꼿이 서 있었으면서 말이다.

    “에? 예? 무슨 짓입니까? 하늬안 님! 왜 이러세요!”

    방금까지만 해도 동경해 마지않을 만큼 강해 보이는 사내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던 아린이 더욱 크게 당황했다.

    “저도 들었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처음 봅니다. 엘프는 죽어서도 자신의 땅과 왕을 섬긴다고 하지요. 그들을 직접 통솔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엘프의 왕이라고 합니다. 전 대륙에서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는 엘프 왕국은 총 세 곳. 그중 어디에도 진정한 왕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곳에 계신 당신이 은행나무 엘프 종족의 진정한 왕입니다.”

    김창수의 묵직한 목소리가 적막한 이곳을 찬찬히 메운다.

    아린은 손을 올려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이 목걸이 때문이라면 누구든 이 목걸이를 차는 자가 왕이 될 거에요. 저는 단지 정혁 님에게 받았을 뿐인데.”

    “아니, 그건 아니야.”

    정혁이 팔짱을 끼며 끼어들었다.

    “내가 만든 장비는 항상 대상이 정해져 있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귀속이 돼. 애초에 목걸이의 원재료였던 두 개의 크리스탈은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것이었고 그 때문인지 목걸이를 제작하자마자 바로 너의 것으로 지정되었어. 결코 타인에게 양도될 수 없고 양도된다고 해도 양도받은 자에겐 단순한 목걸이일 뿐이야. 지금 네가 가진 능력 자체를 가질 수는 없어.”

    “그렇다는 건….”

    “그래. 네가 바로 그 ‘왕’이야.”

    아린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큰 숨을 몇 번 쉬었다.

    여러 감정들이 가슴 안에서 충돌하는 듯했다.

    “놀라운 일입니다.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순혈도 아니고 왕의 적통도 아니며 동족들이 비난하는 아엘프가 왕의 사명을 받게 되다니 말입니다. 이 역시 어떤 뜻이 있겠지요.”

    김창수의 말에 아린은 에드리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대로는 멸족할 거라 했었다.

    은행나무 엘프에게 뭔가 다른 활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꽉 막히고 종족 중심적이며 세계에 흐름에 늘 문을 닫고 지냈던 은행나무 엘프들에게 지금의 모든 사건은 존재 자체의 경종이 될 것이며 여기서 더 나가지 못한다면 결국은 아린의 말 대로 멸족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물론, 어려우시겠지요. 지금 도돈치아의 은행나무 엘프 군대가 어떻게 됐는지 또 도성의 상황은 어떤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쁘면 나빴지 좋진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은행나무 군락지 역시 이 모양이 되었으니. 이 모든 사태를 수습 하는 데 본인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아엘프로서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는 일 까지 생각해 보면 헤쳐 나갈 문제가 한둘은 아닙니다.”

    김창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하늬안도 눈치껏 몸을 일으켰다.

    “그건 내가 도와주지.”

    그들의 곁으로 일을 마친 엘라가 다가와 말했다.

    그녀는 공중에 살짝 뜬 상태로 고고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단발머리의 노란색이 더욱 아름답다.

    전투로 인한 상흔은 전부 사라져 있고 갈색 가죽 재질의 딱 붙은 옷은 깔끔히 광이 난다.

    초록색 마나가 여전히 그녀의 곁을 운행하며 존재 자체의 위용을 뻗친다.

    언뜻 보기엔 엘프의 외형을 닮아서 매우 아름답고 동시에 고상하다.

    “드웨라– 룬– 엔트리쉬아, 고마– 티에르– 안 도리니.”

    “엔노– 트위에.”

    엘라와 아린이 간단히 고대 엔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들과 너의 차이다.”

    엘라가 다시 공용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은 나의 말을 들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나의 존재를 그저 전설로만 알고 있을 뿐 나를 실제로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너의 존재를 내가 보증한다. 뿐만 아니라.”

    엘라가 마나를 보내 아린을 감싸자 목걸이가 반응하며 천천히 빛을 발산했다.

    그와 동시에 아린의 머리에 왕관과 왕의 망토가 형상화되어 보인다.

    “이 모습을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을 백성은 없다. 왕은 경외함이다. 왕은 존경이며 왕은 존재 위의 존재다. 그것을 악하게 이용할 자에게 세계는 스스로 왕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다. 너는 선택받았고 그것은 혼란의 막을 연 이 시대에 은행나무 엘프들을 위한 선물이 될 것이다.”

    ‘근데 참, 되게 무게 잡네.’

    정혁이 피식 웃으면서 거의 꼰대에 가까운 문체를 펼치고 있는 엘라를 바라보았다.

    뭐 어찌 되었건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아린을 이용하기 위해 만나고 여기까지 왔으며 덕분에 아린이 왕의 재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또 한 번의 사건으로 은행나무 엘프 왕국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이어지게 되었고 제논의 기사단과 긴밀한 관계를 얻게 됐다.

    그는 잠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이 최초로 얻게 된 에고 장비를 살펴보기로 했다.

    상태 창을 호출하고 그녀의 상세 스탯을 열였다.

    [은행나무 엘라 – 에고 장비 ‘지팡이’]

    - 고귀한 은행나무 ‘엘라’는 만 년 동안 은행나무 군락지를 지켜 오던 고대 엔트였습니다.

    그녀의 순수한 결정에 의해 그녀의 정신이 담긴 지팡이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제 오아시스의 전체에 자신의 위용을 떨칠 것입니다.

    ‘설명이 뭐 이렇게 대단해?’

    정혁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 ‘오아시스 대장장이’ 정혁의 훌륭한 작품입니다.

    - ‘역사적인 출발’ 세계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 ‘오아시스 대장장이’에게 ‘자연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부가적으로 적용됩니다.

    - ‘오아시스 대장장이’에게 귀속됩니다.

    - ‘오아시스 대장장이’가 인정한 인물에게 대여할 수 있습니다.

    - ‘특정한 인물’에게 대여 시 더욱 큰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정혁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지팡이라 함은 마법을 사용하는 자에게 더욱 큰 능력을 부여할 것이다.

    물론 자유도가 높아 특정 직업에 귀속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오아시스에서 누구나 기본적인 마법 정도는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마법에 몰두한 자들에게는 그 정도의 마법은 마법이라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 지팡이를 어떤 이에게 대여해 준다면 그에게는 큰 전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큰 힘을 맛본 순간 왈로처럼 힘의 노예가 되겠지.

    정혁이 쿡쿡거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하늬안은 그런 정혁의 사악한 기운에 돋아 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일전에 어디선가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거슬리는 것.

    ‘부가된 칭호’.

    오아시스 시스템상 어느 순간 각성의 시간이 지나면 단 하나의 칭호가 선택권 없이 부여된다.

    시기도 모르고 조건도 알 수 없다.

    누군가는 200레벨이 지나고 나서도 칭호가 없으나 누군가는 고작 2~3레벨에 칭호를 받기도 한다.

    강함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이 칭호를 한 개 넘게 가지는 플레이어가 있다는 사실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것도 ‘오류’인가 혹은 ‘혜택’인가.

    [칭호 : 자연의 수호자]

    - 자연의 어머니가 당신을 지켜봅니다.

    - 자연의 만물에게 당신은 존경받습니다.

    - 야생의 몬스터들의 공격에서 벗어납니다.

    - 원한다면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시.별다를 건 없다.’

    ‘그럼 그렇지’라고 정혁은 생각했다.

    물론 좋은 칭호이긴 하다.

    몬스터들의 공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마도 자연계 몬스터들에 한정일 것이다.

    자연의 어머니가 지켜본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고 그나마 엘프들이나 정령들에게 선빵 맞을 일은 없을 테다.

    여전히 전투형 칭호는 아니다.

    부가적인 능력을 조금 더했다고 해야 하나?

    다만 한 가지 기대되는 것은 앞으로 에고 장비를 획득 할 때마다 이런 부가 칭호가 더 붙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좋은 부가 칭호를 얻어 이렇게 뚱땅거리며 장비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투를 통해 그 짜릿함을 몸소 다시 경험 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인다.

    고민해야 할 것들이 많다.

    아직 궁금한 점들도 많다.

    다만 희망적이다.

    점점 더 희망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뒤가 켕기는 것 같다.

    오아시스가 점점 정혁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다.

    그 신이라는 작자는 분명히 정혁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단순히 엿이나 먹이려고 ‘한’을 없애고 ‘정혁’을 집어넣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흘러가는 모양새와 세계의 흐름이 다소 이상하다.

    정혁에게 부여된 이제까지 허락되지 않았던 시스템의 혜택 역시 이상하다.

    운영하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오류와 버그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든 사건들이 벼랑 끝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정혁이라고 불러도 되겠나?”

    김창수의 목소리가 고뇌 속의 정혁을 다시 현실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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