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31화 (31/200)
  • ◈31화

    엘라는 완전히 최상으로 돌아온 컨디션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골똘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하수인(?)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지면을 찬 것이 아니라 공중을 차고 올랐다고 해야겠다.

    그녀는 잘린 부위를 움켜쥐고 인상을 구기고 있는 제로니막스에게 단숨에 달려들어 주먹으로 이곳저곳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엘라가 인간형으로 있기는 하나 그녀의 주먹은 하나하나가 스스로의 굵은 가지를 엄청난 속도로 내리꽂는 것과 같다.

    이전에야 제로니막스가 쉽게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해진 상태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막을 것도, 보호해야 할 것도, 거칠 것도 없다.자연의 파괴자? 웃기는 소리. 여기서 면상을 구겨 주마.’

    엘라는 이를 갈며 계속해서 제로니막스에게 연타를 날렸다.

    제로니막스는 막고 또 얻어맞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로디아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있긴 했지만 당장에 제로니막스를 지원해 줄 입장이 되지 못했다.

    결의를 발산하고 있는 김창수의 기세는 로디아의 털끝까지 세우게 만들었고 조금도 빈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명이지만 천 명과 싸우고 있는 것만 같다.

    소환된 기생 은행나무들은 김창수 뒤의 거대한 검투사 현신에 의해 갈라지고 쪼개진다.

    강화된 본 크로우 기수들도 계속해서 밀리고 있다.

    김창수의 전투는 검무와 다름없다.

    춤 선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야수처럼 날카롭다.

    그럼에도 그는 전력을 다해 즐기고 있다.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으며 마치 이 모든 것을 정말 ‘게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자신만이 승리할 수 있는 그런 ‘게임’ 말이다.

    로디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변의 연속이다.

    그저 무시했던 대장장이와 검사, 아엘프 꼬맹이가 이변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군락지 입구에 있던 병력들은 어떤 괴이한 존재들로 인해서 소멸됐다.

    갑자기 제논의 기사단 길드 마스터가 이곳에 소환되었고 다 죽어 가던 엘라가 어찌 된 영문인지 되살아났다.

    거기에 황금빛 마나의 출현이라니.

    “망할….”

    로디아는 알고 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얻을 이득은 없다.

    오직 남은 것은 패배뿐인데 어떻게 하면 손해 없이 패배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제로니막스가 한 팔을 잃었다.

    마계로 돌아가면 자연 회복될 것이지만 그를 마계로 돌려보내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불도저같이 밀고 들어오는 김창수와 금방이라도 제로니막스를 찢어 죽일 것 같은 엘라의 협공 속에서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는군.]

    제로니막스의 음성이 가슴에 메아리쳤다.

    [죄송합니다. 다 제가 약해서 비롯된 일.]

    로디아가 자신에게 성큼 다가온 김창수의 양날 도끼를 피하는 동시에 검은 구체로 그의 움직임을 잠시 봉쇄하며 거리를 벌린다.

    호흡이 가쁘고 마나와 생명력이 거의 바닥에 이르고 있다.

    [그래, 네가 책임지는 거다.]

    제로니막스의 말에 로디아가 흠칫 허공을 바라보았다.

    엘라의 공격에 얻어맞으면서도 제로니막스는 올린 가드 아래로 로디아를 바라보고 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로디아.]

    “…하!”

    로디아의 탄성과 함께 공중에서 암흑 마나가 폭발했다.

    제로니막스의 기운이 사방으로 뻗치더니 검은 빛줄기가 제로니막스로부터 로디아까지 이어졌다.

    “그럴 순 없지!”

    김창수가 달려드는 본 크로우 기수의 허리를 가르며 재빨리 로디아의 복부를 향해 양날 도끼를 밀어 넣었다.

    그러나 이미 로디아는 천천히 그 형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후드가 벗겨지며 흉측한 그의 몰골이 드러난다.

    붉은 안광에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어딘가 쓸쓸한 미소가 보인다.

    로디아는 김창수를 그렇게 바라보다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건넸다.

    “그때 당신과 함께 갔더라면….”

    로디아는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빛줄기는 그대로 제로니막스에게 흡수되었고 어느새 잘렸던 팔이 생생히 재생되었다.

    잠깐 마나 폭발로 뒤로 물러섰던 엘라가 침을 뱉으며 다시 공중을 박찬다.

    “아니 아니, 오늘은 아니야.”

    제로니막스가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딱이고는 양손을 번갈아 좌우로 움직이다가 한꺼번에 사방으로 펼쳤다.

    수많은 소환진이 허공에 뿌려진다.

    엘라가 비웃으며 제로니막스에게 주먹을 날리는 순간 거대한 닻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내리 꽂히며 그대로 엘라에게 들이받았다.

    엘라는 그것을 치워 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신으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제로니막스가 아래를 흘깃 본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아린이 제로니막스를 올려다보고 있다.

    “미치광이 은행나무와 잠에서 깨어난 엘프 왕을 혼자서 상대할 순 없지.”

    사방에 펼쳐진 소환진이 소용돌이처럼 적갈색으로 요동친다.

    허공에서 거대한 작살을 들고 있는 무덤지기들과 말을 탄 데스 나이트, 스컬 아처, 본 크러셔, 언데드, 트롤 무리가 소환진을 뚫고 나온다.

    언뜻 봐도 수천은 넘어 보였다.

    “나도 나름 마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군주라구?”

    제로니막스가 실실 웃으면서 일행을 조롱하더니 턱을 쓸어 만지면서 아쉽다는 듯이 말을 맺는다.

    “그래도 결속이 해제되었으니 나는 이만 마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구나.”

    순간 제로니막스가 사라졌다가 당황한 정혁의 옆에 나타났다.

    엘라가 깜짝 놀라 바닥에 산개한 은행나무 잎들을 일제히 들어 올려 정혁에게 보내려는 찰나에 제로니막스의 귓속말이 이어졌다.

    “너도 참, 재밌는 놈이야 ‘한’?”

    은행나무 잎들이 일제히 제로니막스에게 달려들었으나 이미 그곳에는 제로니막스가 없었다.

    정혁은 돋아 오는 소름을 간신히 참았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했다.

    ‘언제부터 안 거지? 갑자기? 처음부터 알았다면 분명히 나부터 공격했을 텐데? 왜지? 어째서 알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웠으나 정혁이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소환된 악마 군대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엘라는 재빨리 정혁에게 은행나무 잎을 이용해 보호막을 씌워 주었다.

    그리곤 다가와서 말했다.

    “가만히 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정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엘라를 믿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라는 그를 중심으로 근처에서 달려드는 악마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김창수도 마찬가지였다.

    투기는 여전했고 달려드는 적들을 지치지도 않고 분쇄했다.

    포효하는 사자 그 자체였다.

    누가 오더라도 그는 항상 포식자의 위치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하늬안은 아린을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미 지쳐 있는 몸이지만 그래도 한 시간여 만에 벌어진 온갖 말도 안 되는 사건들 속에 숨어 있으면서 하늬안도, 아린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아린은 주변에 펼쳐진 상황을 보며 침묵했다.

    그의 가슴에 분노가 일렁인다.

    아무리 아엘프라 할지라도 은행나무 군락지는 그에게 고향과 같다.

    더불어… 아버지의 무덤이다.

    목걸이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고 아린이 허공에 천천히 떠오른다.

    아린의 머리에 영롱한 초록빛의 아우라가 깃들더니 곧 왕관의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은행나무 왕가의 무늬가 새겨진 망토가 어깨 뒤로부터 아래로 서서히 형상화되어 내려가고 아린의 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드레아 – 엘 – 아르테 – 반티아도라!”

    엘라가 곧바로 아린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악마 찌꺼기가 은행나무 왕 뭐시기 하길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아린의 고함은 쩌렁쩌렁했다.

    작은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초록빛 마나가 번쩍이며 사방을 덮었고 지면이 뒤흔들리는 것 같더니 아래로부터 무장한 은행나무 엘프의 군대가 천천히 지상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기수들이 은행나무 엘프들만의 세 갈래 화살이 장전된 거궁을 쥐고 있거나 투창을 감싸 쥐고 허공을 가르며 등장한다.

    소환된 악마 군단의 수에 버금가는 은행나무 엘프 군대가 이곳에 등장했다.

    아린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에스테네르게!”

    그의 고함과 함께 모든 은행나무 엘프들이 일제히 악마들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형제가 없는 적과 마주한 악마들은 그저 빈 공간에 의미 없는 공격을 퍼부을 뿐이다.

    일전에 봤던 장면이지만 하늬안은 넋을 놓아 버렸다.

    김창수도 엘라도 정혁도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볼 뿐이었다.

    김창수는 결의를 거두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당당히 서 있던 거대 검투사의 형체가 흐려지며 사라졌다.

    엘라 역시 정혁을 보호하기 위해 감싸 두었던 은행나무 잎 보호막을 회수하고 모든 은행나무 잎들을 자연에 흩뿌려 소산시켰다.

    손댈 것이 없었다.

    이미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몇몇의 은행나무 엘프 병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명 소리는 악마들의 목청에서만 터져 나왔다.

    어떤 표정도 없이 은행나무 엘프 군대는 악마들을 깔끔하게 처리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도 네 작품이야?”

    엘라가 물었다.

    정혁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혈통도 아니고 순혈도 아닌 아엘프 꼬마가 은행나무 엘프의 왕이라니. 젠트라도 놀랄 일이군.”

    그녀의 말에 정혁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멈추고는 엘라를 바라보았다.

    ‘젠트라? 젠트라?!’

    “그래! 젠트라!”

    정혁이 급히 엘라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엘라의 주먹질이 이어졌다.

    대량의 HP가 닳았다.

    정혁은 곧바로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아이…씨.”

    ‘하늬안이 양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정혁은 인벤토리에서 회복 물약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팔짱을 낀 채 상당히 불쾌해 하는 엘라를 노려보았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말이지.’

    정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스태프.”

    그의 말과 함께 엘라가 황금빛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어?…어어?!”

    이번에 팔짱을 낀 쪽은 정혁이었다.

    정혁은 더욱 사악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어이, 어이. 기억하라구. 늙다리 나무때기야. 이제 내가 네 주인이야.”

    “뭐? 뭐 이 새끼야? 다시 한번 지꺼어어어얼! 끼야아아악!”

    엘라가 당황해서 정혁에게 몇 보 걸어오려다가 마나에 완전히 휩싸이며 외마디 비명을 남겼다.

    그리곤 정혁의 키보다 조금 큰 은행나무 스태프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상부는 뭉툭하게 두 개의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노란빛의 은은한 룬 문양들이 조각되어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얇아지는 형태의 고품격 스태프였다.

    [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엘라의 목소리가 정혁의 귀에 귓속말처럼 들렸다.

    “왜. 뭐?”

    뻔뻔한 정혁의 말투가 엘라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이게 네가 말한 자유야? 이게?]

    “그럼! 내 스태프로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싫어, 절대 싫어! 그냥 돌려놔! 그딴 하고 싶지 않아!]

    “아니, 누구 만나고 싶으시다면서요.”

    [그, 그건.]

    정혁이 피식 웃었다.

    한창 티격태격하고 있는 정혁을 김창수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정혁은 스태프를 양손에 쥐고서 스태프에다 대고 계속 말을 하고 있다.

    “드웨이크 말대로 참 이상한 자야.”

    김창수가 고개를 저으면서 한마디 하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경악할 만한 전투가 벌어진 이곳에서 김창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일은 저질러졌다.

    제논을 대표하는 길드의 마스터가 아크 제국이 연관된 전쟁에 손을 댔다.

    게다가 본의 아니게 아크 제국의 주요 전력에 해당하는 플레이어를 죽게 만들었다.

    이는 곧 카탈 대륙에 큰 파도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전쟁의 불씨는 당겨졌다.

    이곳에서는 일단 아크 제국의 패배가 확정되었지만 도돈치아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른다.

    이제 제논은 전쟁에 참여해야만 하고 자유 연맹은 제논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큰 지분을 내주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왕국이니, 국가니 하는 것을 증오하는 집단이니.

    그렇다면 이곳에서 김창수가 해결해야 할 일은 은행나무 엘프의 왕과의 연합과 저 괴이한 싸이코 사내를 제논으로 불러들이는 것뿐이다.

    김창수는 다시 한번 정혁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마치 언젠가 만난 적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조금 들었다.

    “가끔은 그 싸가지 없던 녀석이 보고 싶긴 하네.”

    그는 ‘한’을 떠올리며 양날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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