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30화 (30/200)
  • ◈30화

    파도처럼 쏟아지는 황금빛 마나에 제로니막스가 급히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가 극히도 싫어하는 마나의 종류였다.

    시간의 주관자에게 속한 마나, 사용하는 자들도 드문데 이런 마나를 위협적이지도 않은 녀석이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마나의 파도는 곧 엘라에게 흡수되기 시작했고 정혁은 놀라운 광경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나에 둘러싸인 엘라가 토큰을 놓치자 정혁은 급히 토큰을 주워 품에 넣었다.

    [에고 장비 ‘은행나무 엘라’ 지팡이를 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에고…?’

    에고라는 것은 자아라는 뜻으로 이런 것은 누군가가 제작할 수 있는 범위 밖의 물건이다.

    어떻게 등장하는지 아직 밝혀진 바도 없거니와 어떤 대장장이도 이걸 만들 수는 없다.

    다른 이의 혼을 장비에 넣을 수 있다니.

    이런 행위가 가능한 직업은 없다.

    게다가 오아시스에서는 이런 에고 장비들이 없어진 지도 오래 되었다.

    그들은 어째서인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에고 스스로 자아를 포기하고 세상에 다시 회귀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혁의 손에 에고 장비를 만들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니.

    “이게 뭐지?”

    엘라의 물음이 들렸다.

    정혁은 엘라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엘라는 전신의 상처가 회복되어 있었다.

    다만 만질 수 없는 형체를 유지한 채 공중에 부유할 뿐.

    [대화의 시간은 5분입니다. 5분 동안 대상의 동의를 얻어야만 제작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동의를 얻어라? 그러니까 엘라보고 “야! 내 에고 무기가 되라!” 뭐 이딴 식으로 요구하란 말이야? 이게 말이냐, 방구냐.’

    정혁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어떤 설명도 없다.

    다만 아래에 타이머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었어.”

    엘라가 한달음에 정혁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엘라의 손가락이 정혁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아마도 그녀는 정혁을 만질 수 있는 것 같았다.

    “나, 나도 잘 몰라.”

    “몰라? 이런 짓거리를 해 놓고 모른다고?”

    엘라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두 팔을 벌려 자신을 보라는 듯이 소리쳤다.

    “죽음에 임박해서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야! 네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

    성난 엘라의 고함을 뒤로 하고 정혁은 생각에 잠겼다.

    ‘이거 근데 생각해 보면 꽤 엄청난 스킬이다.발동 조건은 오리무중이긴 하지만 제작이 되기만 한다면? 자그마치 만 년 된 고대 엔트의 정신이 담긴 무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본디 에고 장비들은 성장하는 장비이다.

    플레이어에게 귀속되어 얼마만큼 생사고락을 함께했는지에 따른 경험치로 장비도 그 정신도 함께 자라난다.

    세계에 이름을 떨친 몇몇 플레이어들에게는 항상 에고 장비들이 함께했다.

    물론 ‘한’은 그런 것 필요 없다는 입장이었다.

    쎄쎄쎄하는 동네 꼬마들이나 쓰는 거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지금의 정혁은 쎄쎄쎄 구경만 하고 있는데도 HP가 닳는 입장이니 이런 행운을 놓칠 수 없다.

    만약에 이런 행운들이 계속해서 쌓인다면? 그건 진짜 잭팟이다.

    앞서 말했지만 에고 장비는 성장하는 장비다.

    즉, 생긴다고 바로 강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마치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어떤 인물이 될지 모르듯이 에고 장비도 마찬가지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다 커 봐야 안다.

    그러나 이미 엄청나게 강한 정신이 깃든 에고 장비라면 말이 다르다.

    이미 세계에서 알아주는 자의 에고가 장비 속으로 이식된다면 굳이 성장하기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그걸 스킬로 가지고 있으면서 추후에도 사용할 수 있다면? 정혁의 입이 귀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엘라는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까.’

    저 자존심 강한 늙다리 엔트를 말이다.

    ‘한’이었을 때 엘라와 싸우면서도 그녀는 끝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드 벨을 준 것도 나중에 결판을 내자면서 건넨 ‘결투장’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한’이 그녀가 아까워서 살려 준 것인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코웃음 치기 일쑤였던 양반이다.

    - 짝!

    고민이 한창이던 정혁의 뺨을 무언가가 세차게 후려갈겼다.

    번쩍, 정혁이 맞은 뺨을 부여잡고 인상을 구기며 엘라를 바라보았다.

    “야. 장난하냐? 빨리 이거 안 끝내? 다 됐고 그냥 날 놔 달라고!”

    분노가 치밀었다.

    ‘뺨을 맞아? 내가? 아니 그것도 죽어가는 녀석을 살리려고 하는 내가? 물론 내 이득 때문에 붙잡아 놓은 거긴 하지만 말이야.이… 자슥이….’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냐? 늙다리 나무때기야.”

    “뭐?!”

    엘라는 생전 처음 듣는, 아니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모욕에 얼굴이 붉어졌다.

    오랜만이다.

    이런 느낌.

    과거 싸가지 없던 인간 나부랭이에게 느꼈던 모욕적인 기분.

    그때 이후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찌나 화가 치미는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엘라였다.

    저 두 손이 계속해서 자신의 뺨을 후려칠 거라는 생각에 정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아래에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다.

    이제 3분 남짓.

    이 안에 성공해야 한다.

    “느, 늙다리 나무때기? 너 이거 누구한테 들었어. 이, 이런 모욕적인 말을!”

    엘라가 말을 더듬었다.

    ‘그래! 맞다!’

    엘라는 워낙 고귀한 자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살아서 이런 저급한 말을 들으면 뇌 정지라도 온 것처럼 당황의 늪에 빠지곤 했었다.

    ‘한이었을 때엔 내가 더 강했으니 이런 말을 들어도 심리적 데미지는 덜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거의 하룻강아지가 꼬리 말고 호랑이한테 짬타이거 자식이라고 놀리는 격이니 치가 떨릴 만하지.’

    ‘근데 이게 옳은 작전이긴 할까? 에라이씨.모르겠다.’

    “그래! 늙다리 나무때기! 자존심도 없이 말이야, 나름대로 오랫동안 자연을 수호하고 살아왔던 존재가 자연의 숙적에게 무릎 꿇고 도망가는 꼴을 보니 차암 한심도 하다!”

    “너, 너 이 자식이!”

    손바닥에서 주먹으로 바뀌었다.

    정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망이잖아! 도망! 다른 기회도 충분히 있는데! 이렇게 도망치면 뭐가 바뀌냐! 주변을 둘러봐! 네가 일생을 바쳐 지켜 왔던 이 군락지가 모두 초토화됐다!”

    엘라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증오 가득한 눈망울이었지만 그 사이로 천천히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기생 마법에 휘둘려서 정신을 놓치고 흑마법의 종이 된 네 수도 없이 많은 자식들! 동료들! 이 모든 것들을 등지고 아싸라비아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고 가겠다고?”

    “…네, 네가 뭘 알아! 그동안의 나의 노고를! 고충을!”

    “몰라, 나도! 알게 뭐야!”

    “알게 뭐야?!”

    정혁은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엘라의 고함은 그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감히 ‘알게 뭐야’라고 지껄여? 내가 만 년 동안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이 군락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 지낸 그 시절의 고통을 네가 알아? 이렇게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는 것도 얼마나 제약이 큰지 네가 알아? 이제야 나에게 자유를 주겠다는데 오만 방자한 인간 따위가 감히 그런 말로 나를 조롱해? 네가!?”

    엘라의 주먹이 정혁의 볼을 향해 날아왔다.

    “자, 자유! 그거 내가 줄게!”

    흐어어어어-

    ‘정말 숨 막힌다.압도적인 강함이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정혁이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저 주먹에 머리와 몸이 분리됐을 것이다.

    정혁이 자유라고 외치는 순간 그녀의 주먹이 정혁의 뺨 바로 옆에서 멈췄다.

    “뭐라고?”

    엘라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자유. 그거 줄 수 있다고.”

    ‘젠장, 시간이 얼마 없다.1분 30초.’

    “들어 봐.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너는 이 세계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어. 네가 보고 싶었던 곳, 원하는 것, 마음껏 인간형으로 돌아다녀도 된다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 있다면 분명 만날 수 있다구!”

    “어떻게 가능하지?”

    ‘진짜 말해…?’

    “그… 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입 안 열어?”

    “내, 내 에고 장비가 되, 되면 돼!”

    한마디 뱉고서 정혁은 재빨리 두 손을 올려 얼굴을 가드했다.

    가드를 하나 마나 소용은 없었겠지만 어찌 됐건 정혁이 예상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뻗었던 주먹은 다시 가져오고 팔짱을 껴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일단 네놈과 계약 같은 것을 하면 난 자유의 몸이 된다는 거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만 뭐, 당장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닐 테니.’

    “그래! 맞아!”

    “지금 내 옆에 보이는 저 알 수 없는 네모 박스에 동의를 하면 되는 거냐?”

    ‘얼레? 엘라에게도 보이는 건가?’

    “그, 그럴걸?”

    “…만나고 싶은 자가 있긴 하다. 만약 이 세상에 남게 된다면 마지막 남은 미련 같은 거지.”

    ‘어째 느낌이 쎄하다.’

    엘라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왜? 왜 붉어지지?’

    “그 사람도 만날 수 있을까?”

    정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엘라의 눈빛에 약간의 설렘과 기대가 담겨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엘라가 만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 년 동안 살았던 나무에게 임팩트를 줄 만한 사람.

    역사적으로 없다.

    비역사적으로는 ‘한’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는 건.

    ‘아냐.안 돼. 그럴 수 없어.’

    “그, 그런 이유라고?”

    엘라의 눈동자에 선한 기운이 순식간에 가시고 다시 증오와 분노가 가득 담겼다.

    엘라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건 부, 부가적인 것일 뿐이지. 네 말대로 내 새끼들 박살 낸 저 더러운 악마 종자와 다시 싸울 수 있, 있다면. 동의해 주도록 하마.”

    “허, 참.”

    정혁이 콧방귀를 뀌자 엘라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아, 알았어. 일단 승낙하고 생각하자.”

    시간이 없다.

    10여 초! 엘라는 정혁이 보고 있는 시스템 창을 정확히 바라보더니 창에 손을 댔다.

    정혁은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창 위에 손을 댔고 둘의 손바닥이 맞닿았다.

    엘라는 약간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지만 절차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듯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두 손 사이로 황금빛 마나가 뭉쳐졌다가 흩어지며 각자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 첫 번째 에고 장비 ‘은행나무 엘라’ 지팡이가 귀속됩니다.]

    [첫 번째 세계 퀘스트 ‘역사적인 출발’이 완료됩니다. 남은 에고 장비 15]

    [칭호 ‘자연의 수호자’가 오아시스 대장장이에게 부여됩니다.]

    ***

    - 콰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로디아가 피를 토했다.

    황금빛 마나가 공중에 치솟아 올랐다가 사라지더니 초록빛 마나가 되돌아와 지면에 내리꽂혔다.

    순식간에 따뜻한 바람이 사방으로 퍼지고 오염된 대지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거무죽죽했던 땅에 뿌리들이 퍼져 나가고 푸릇한 여러 풀이 자라난다.

    제로니막스는 일격을 맞고 한쪽 팔이 날아갔다.

    잠깐의 순간이었는데.

    하찮은 인간 녀석이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바라보던 그 찰나에 갑자기 엄청난 빛이 치솟았다가 기분 나쁜 자연의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은행잎 창의 공격에 반응도 못 해 보고 한쪽 팔을 잃었다.

    지상에는 아까의 인간 녀석과 기세등등한 엘라가 서 있었다.

    “넌 뒤졌다. 이 새끼야.”

    엘라는 손마디를 두둑거리며 공중에 떠 있는 제로니막스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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