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9화 (29/200)
  • ◈29화

    “쿨럭”

    김창수가 피를 토하며 구덩이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의 중갑은 뜯겨 나갔다.

    속살이 훤히 내비쳐 속에서부터 올라온 피멍이 보였다.

    훤히 내비치는 속살은 금방 속에서부터 피멍이 올라왔다.

    호흡이 조금 불안정했고 정신이 약간 아득했다.

    그러나 김창수는 알고 있다.

    이는 제로니막스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아니다.

    그의 전력이었다면 방금 전의 주먹질로 이미 김창수는 죽음에 이르러 로그아웃되었을 것이다.

    날이 잘 갈려 있다고 생각했다.

    제논에 몸을 담고 외부의 큰 전투에 가담하지 않게 되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을 그저 검 집 안에 담겨 있는 날카로운 검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든 주인이 뽑는다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베어 버릴 수 있는 그런 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새 김창수의 검날은 많이 낡고 썩어 있었다.

    이 정도 기습은 현역 시절이었다면 제대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런 빈틈 자체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대상이 군주급 악마라 할지라도 대응 정도는 충분히 해 냈어야 했다.

    김창수는 양날 도끼의 자루를 땅에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제로니막스가 팔짱을 끼고 공중에서 서 있다.

    그의 아래에서 로디아가 빙글거리며 웃는다.

    로디아.

    아크 제국의 빌어먹을 파급력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저런 녀석들의 탄생이다.

    종교라는 것은 신기해서 단지 게임 속일 뿐인데도 이곳을 마치 현실로 착각하게 만들고 더불어 이곳에서조차 무언가를 믿게 만든다.

    오아시스의 세계 너머의 마계에 존재하는 악마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이들의 힘을 이용해 제국을 세웠다.

    신도들을 흑마법사로 탈바꿈 시키며 그들을 더욱 잔인하게 교육시킨다.

    종교가 사실적 믿음으로 확신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잃고 오직 맹신만이 남게 된다.

    로디아는 그런 케이스다.

    김창수는 로디아의 과거를 안다.

    시골 청년 같은 순둥이였다.

    현실 나이로도 16살 밖에 되지 않는다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녀석은 마법을 쓰고 싶다고 해서 마법사의 길을 선택했고 김창수가 소개해 준 마법사의 길드에 들어가 천천히 성장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법사에게 들은 말로는 이상하게도 로디아가 일정 수준 이상을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마법은 어렵고도 심오해서 그것의 원리와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에 따라 발동에 차이가 있다.

    로디아는 길드 내에게 천천히 따돌림을 받기 시작했고 이는 곧 그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그렇게 길드를 떠났다.

    그리고 아크 제국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믿음을 얻는 과정, 저 정도 되는 악마를 소환해 내는 흑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난이 따랐을 것이다.

    김창수는 피가 묻은 입을 훔치며 허리를 펴고 다시 섰다.

    양날 도끼 자루를 움켜쥐고 거만하게 서 있는 제로니막스를 바라본다.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피가 전신을 돌고 이제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느낌이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과 중갑의 기분 좋은 무게, 도끼 자루를 쥔 손에 생긴 굳은살의 느낌까지.

    모든 것이 다시 그를 전장의 폼 나는 싸움꾼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다시.시작이다.’

    김창수가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로디아의 전면에 나타난다.

    이미 발길질이 로디아의 오른쪽 얼굴로 날아든다.

    제로니막스가 그 사이에 나타나 발길질을 막는다.

    그러나 김창수는 이를 예측한 듯 나머지 발로 도움닫기를 해 제로니막스의 복부를 걷어찼다.

    제로니막스가 조금 뒤로 물러섰다.

    로디아는 기운을 모아 본크로우 기수들을 재생성시키고 싸움에 가세하게 만들었다.

    김창수는 양날 도끼를 공중에 높게 뻗었다.

    그러자 공중에서 양날 도끼를 향해 푸른색 기운이 떨어졌다.

    이는 빛줄기가 되어 김창수의 전신을 감싸고 그의 뒤편에 어떤 존재가 천천히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투사의 결의.”

    김창수의 말과 함께 중장갑을 입은 검투사가 그의 뒤에 거대하게 버티고 선다.

    한 손 방패와 양날 검을 쥔 거대한 투사의 모습은 하반신이 없이 상반신만으로 김창수를 보호하고 있는 듯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김창수의 말에 제로니막스가 싱긋 웃더니 뱀 혀를 길게 빼며 몇 번 입맛을 다셨다.

    “결전의 투사여. 아쉽구나.

    너와의 전투 역시 즐겁겠지만 지금은 본래의 목적이 더욱 중요하단다.”

    제로니막스가 손을 뻗자 무수히 많은 검은 줄기들이 뻗어나가 주변에 산개한 본 크로우 기수들에게 닿았다.

    마치 영양분을 공급하듯 무엇인가가 꿀렁거리며 본 크로우 기수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점점 고통스러워하다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정화되지 못한 대지에 있던 모든 은행나무들이 기괴하게 뒤틀리더니 뿌리를 들고 일어섰다.

    본 크로우 기수들은 본 크로우와 결합되어 더욱 거대해졌고 그보다 더 커다란 타락한 은행나무들이 김창수를 향해 전진했다.

    다구리 앞에는 장사 없다는 드웨이크의 농담이 떠오른다.

    김창수는 피식 웃었다.

    그 말이 진짠지 아닌지 지금 판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김창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들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있었다.

    거대한 은행나무들의 습격은 김창수 뒤의 검투사가 맞대응하고 있었고 김창수는 본 크로우 기수들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도 그들 하나하나를 베어 넘기면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로디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로디아는 김창수의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로니막스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로니막스는 주변의 모든 생물체에 자신의 기운을 넘겨 김창수를 공격하게 만들고 나서 천천히 허공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엘라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

    제로니막스의 시선이 김창수에게 돌려졌을 때 정혁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를 찾으러 달려갔다.

    군락지의 경계 마법은 해제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이곳을 더 이상 군락지로 불러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난장판이 되었다.

    대지 곳곳은 전부 오염되어 있었고 엘라의 정화 마법은 끊어져 오염 전이가 확산되고 있다.

    거무죽죽해진 토양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온다.

    분명 생기가 가득했던 곳.

    마계의 악마들이 오아시스에 현신하면 늘 이렇게 되고 만다.

    엘라는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정화와 경계 마법을 유지하며 제로니막스와 싸우는 것은 아무리 만 년이 된 고대 엔트이자 인간화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존재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상대는 고위 악마도 아닌 군주급 악마.

    어쩌면 엘라의 성격이 패배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엘라는 어디 있을까.’

    정혁의 마음은 조급했다.

    분명히 넝마 조각이 돼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제로니막스가 다시 엘라를 찾을 때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반드시 그녀의 숨을 끊으려 할 것이다.

    오직 그 대답만.

    고대룡 젠트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만 알아 내면 된다.

    물론 제로니막스가 엘라를 짓밟은 꼴을 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혁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는 아니다.

    또한 아무리 김창수가 강하다 해도 단신으로 제로니막스를 이길 수는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장에는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목표를 달성해야만 한다.

    ‘엘라를 찾아서 대답을 들어야만 해.’

    [오아시스 대장장이에게 탐이 나는 재료가 등장합니다. 히든 스킬을 활성화합니까? YN]

    ‘응?’

    갑작스레 시스템 창이 정혁의 시야를 가렸다.

    ‘히든 스킬? 탐이 나는 재료?’

    정혁은 잠시 멈춰 서서 이 시스템 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에 잠겼다.

    창 너머로 보이는 깊고 넓은 구덩이에 엘라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까지 흐름을 봤을 때 이런 시스템 창은 항상 정혁에게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겨 주었다.

    왈로의 무기, 아린의 목걸이만 봐도 그렇다.

    본인의 스펙을 올려 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상황을 호전시키는 큰 영향을 주긴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절망적인 상황도 이 시스템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을까?’

    정혁이 주위를 둘러본다.

    혹시 파헤쳐진 구덩이들 사이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는지.

    어쩌면 이전의 전설급 보석들을 챙길 때처럼 자신의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되거나 혹은 엄청난 무기들을 손에 쥘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로니막스가 엘라에게 다시 다가왔을 때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엘라가 회복할 만한 시간 말이다.

    정혁은 잠시 시스템 창을 옆으로 제쳐 놓고 일단 엘라에게 달려 내려갔다.

    엄청난 기합 소리가 뒤에서 쩌렁쩌렁 울리고 뒤를 돌자 푸른빛이 땅으로 내리꽂히는 것을 보았다.

    김창수가 고유 스킬을 발동한 모양이다.

    시간이 없다는 느낌이 찝찝하게 다가온다.

    엘라는 이미 회복기에 들어간 것 같았다.

    온몸이 찢어지고 갈라졌다.

    여렸던 피부가 다시 나무처럼 딱딱해졌고 갈라진 곳에서 피가 아닌 진액 같은 것이 끈적끈적하게 흐르다 말라붙었다.

    주변만 간신이 초록빛 잔디가 돋아나고 있다.

    정혁은 엘라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다행히 들렸다.

    아린도 제대로 들지 못했던 그였는데 아마도 숙련도의 영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당장에 피할 곳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성한 나무들을 찾아볼 수 없다.

    성한 대지도 없다.

    한 걸음 이동하려고 하자 땅에서 얇은 나무뿌리가 정혁의 발을 휘감았다.

    떼어 보려고 해도 떼어지지 않는다.

    마치 엘라 스스로 이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세리만- 티엔- 두르다.”

    엘라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뜨고 정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서도 맑은 진액이 조금 스며 나왔다.

    “야, 진짜 미안한데 난 고대 엔트어를 모르거든. 뭐 다른 선택지 없냐? 공용어 이런 거, 아는 거 없어?”

    정혁이 다급하게 엘라를 내려놓고 말했다.

    “감히… 건방지게 나를… 들어?”

    ‘이걸 마 그냥 집어 던질까.’

    정혁은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가 꾹 누르며 대답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뭐 하나만 묻자. 이거, 이거 봐 봐.”

    그가 급히 품에서 토큰을 꺼냈다.

    토큰을 보자 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들어서 정혁의 손에 있던 토큰을 쥐었다.

    그녀의 눈에 작은 눈물이 맺혔다.

    “이걸, 어떻게 너 따위가…”

    엘라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어디서 났는지 알 것 같아? 그게 중요해!”

    정혁이 엘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엘라가 기겁을 하면서 몸서리쳤다.

    “도리나테!”

    ‘욕이다.이거 분명히 욕이야.’

    그 순간 정혁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아 오르더니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놈이다.놈이 다가온다.’

    “어차피 죽을 거야. 너도, 나도.”

    엘라는 작게 실소하며 다가오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꼬맹이가 엄청난 걸 가지고 있구나.”

    제로니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서 들으니 뛰는 심장조차 멈추게 만들고 싶을 만큼 악하고 비열한 목소리였다.

    위압감은 말할 것도 없다.

    흑마법사의 체력이 다하고 엘라와의 전투에서도 많은 힘을 쏟았을 텐데 여전히 쌩쌩했다.

    호흡이 가빠질 만큼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그의 어깨를 누르기 시작한다.

    움직일 수가 없다.

    제로니막스는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와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정혁과 그 아래 누워 있는 엘라의 옆에 서서 빙글거리며 웃는다.

    엘라의 손에 쥐어져 있는 토큰을 제로니막스가 턱에 손가락을 괴고 유심히 바라본다.

    “그거네, 고대룡의 초대장?”

    그의 혀가 징그럽게 입술을 핥고 지난다.

    정혁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는 옆에 치워 뒀던 시스템 창을 앞으로 펼쳐 승낙 버튼을 활성화했다.

    그 순간 정혁의 품에서 강렬한 황금빛 마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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