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8화 (28/200)
  • ◈28화

    [군주시여. 잠시 힘을 분산해도 되겠습니까?]

    지상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전불패의 전사와 흑마법사 군단장의 사활을 건 전투였다.

    공중에서는 엘라와 제로니막스의 전투가 한참이었으나 순간 로디아의 전음에 의해 그들의 전투가 잠시 중단되었다.

    중단됐다기 보단 제로니막스가 엘라의 옆구리를 걷어차 그녀를 멀리 날려 보내고 틈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왜? 한창 재밌는데.]

    제로니막스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저 녀석.]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그래, 혼자 가능하겠나?]

    [그런 질문조차 부끄럽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그들은 전음으로 간단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이 엘라가 섬광처럼 제로니막스 앞으로 나타났고 그는 급히 팔로 안면을 막아 엘라의 발길질을 버텨 냈다.

    다시 바닥의 은행나무 잎들이 춤추며 위로 솟는다.

    “이제야 비등해졌네, 서로의 상황 말이야.”

    “아갈머리 여물어.”

    조롱하듯 뱉은 제로니막스의 말에 엘라는 냉소적으로 대답하고 곧바로 은행나무 잎들을 제로니막스 주변으로 둘렀다.

    제로니막스가 마나를 펼쳐 대기를 진동시키자 하나둘씩 힘을 잃어 가는 것이 보이긴 했지만 그를 둘러싼 은행나무 잎들이 너무 많았다.

    잎들은 곧 제로니막스의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었고 엘라는 틈을 노려 그것들을 연쇄적으로 폭발시켰다.

    공중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산발적으로 퍼져갔다.

    정혁은 도저히 그가 끼어들 수 없는 전투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전세는 나쁘지 않다.

    김창수의 등장 덕분에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던 제로니막스와 엘라의 싸움도 이제는 서로 비슷해졌다.

    그와 동시에 공급원인 로디아가 김창수와 혈투를 벌이고 있다.

    사실 로디아에게는 불리한 싸움이다.

    제로니막스가 집어먹고 있는 그의 마나의 양도 상당할 터.

    아무리 생명력까지 사용한다는 흑마법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그의 패배가 확실하다.

    김창수가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나름 실력 있는 오아시스의 네임드이다.

    ‘균형은 분명히 무너질 것이다.로디아가 무릎을 꿇는 순간 저 사슬과 같은 연결고리도 끊어질 것이고 제로니막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서 다시 마계로 돌아가야 할 테지.’

    정혁은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제로니막스의 기운 때문에 정혁은 오아시스 대장간에서 나온 뒤로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이전보다는 ‘대장장이’로서 강해진 느낌을 받았다.

    [대장 기술 숙련도 : 250]

    상태 창을 살펴보니 숙련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지난번 전설 무기 제조 시에는 숙련도가 50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 보면 그건 약간 튜토리얼 같았어.”

    정혁의 느낌이 맞다면 왈로의 무기를 만든 과정은 그의 숙련도로는 어림도 없는 제작 과정이었다.

    광물이 식별되고 상태가 확인되고 그 이후에 재구성하는 과정까지 50의 숙련도로는 아마 불가능했으리라.

    시스템에서 일종의 제약 해제를 걸어 맛보기를 보여 준 거라고 결론짓지 않는 이상 납득하기 힘든 과정이었다.

    지금은 레벨도 올랐다.

    숙련도를 올리는 과정에서 경험치가 자동으로 습득되어 지난 일련의 과정 동안 올랐던 레벨 30에서 현재는 60으로 뻥튀기됐다.

    조 패더럴과의 시간은 이 정도 레벨 업으로 설명하기 힘들만큼 고난 속이었다.

    오아시스 대장간에서 느꼈던 시간을 이곳으로 대입해 보면 대략 15일 정도는 지난 것 같다.

    정말 오리무중이다.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오아시스 대장간 안에서의 시간과 바깥 시간을 계산해 전략적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장간은 훌륭한 도피처가 될뿐더러 이상하게도 해당 장비가 필요한 사람의 상황이 급박해지기 전에 등장하는 시스템 버프가 있는 것 같다.

    전부 추측이긴 하지만 정혁은 이런 추측에 신뢰를 더하고 있다.

    조 패더럴를 만난 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정혁의 마음을 조금 아프게 했지만 조가 정혁을 한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큰 이득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제 누구도 죽일 수 없는 공간에 있다.

    그곳에서 정혁이 등장할 때 항상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숙련도가 오르면서 작았던 대장간의 규모도 커졌다.

    화로의 개수와 모루, 각종 제련 장비들이 나무 쪼가리에서 강철들로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황금빛 마나가 모든 것들을 변화시켜 주었고 이는 조의 흥미를 더욱 끌게 만들었다.

    어쩌면 조는 그곳에서 정혁에게 도움이 될 다양한 장비들을 고안하고 제작을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린은 목걸이를 잘 사용할 수 있을까?’

    선조의 목걸이를 제작하면서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 되었을 때 정혁이 궁금했던 것은 과연 누구에게 귀속될 것인가였다.

    왈로의 무기의 경우 그의 무기를 받아 붉은 수정을 각인하는 것으로 재구성이 이루어졌지만 선조의 목걸이는 재구성의 수준이 아니라 제련과 제작의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타인에게 귀속이 될지 아니면 행운이 깃들어 정혁에게 귀속이 될지 궁금했다.

    물론 크리스탈과 목걸이의 주인을 봤을 때 정혁의 것은 절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만약에 이 작품이 정혁의 것이 된다 해도 정혁은 그것을 아린에게 양도할 생각이었다.

    테스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두 번이지만 본인을 위한 무기나 장비를 제작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내심 이 오아시스 대장간에서는 다른 이들을 위한 물건들밖에 만들 수 없는지를 판단해 보고 싶었다.

    지금이야 그가 힘이 없어서 그렇지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고 전략적으로 각종 광물들을 채취해 다닌다면 소위 ‘고급 장비 둘둘 버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적 제약들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한’처럼 나 혼자만 세계최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한’을 되살리고 자신은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번의 목걸이 제작을 통해서 약간의 참담함을 맛보았다.

    어떤 알고리즘인지는 몰라도 생성되는 장비들은 제작자가 아닌 장비와 관계있는 자들에게 귀속되었다.

    이렇게 된다면 점점 가능성만 낮아질 뿐이다.

    지금도 버거운 타인과의 관계 유지와 결속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을 맺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정혁은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 자신을 보호해 주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집단.

    ‘그런 건 진짜 젬병이긴 한데….’

    수풀 사이에 완벽히 숨어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정혁의 위로 점점 어떤 무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본 크로우?”

    정혁이 위를 올려다보니 어느새 아크 제국의 마수에 잠식되어 버린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자랑스러운 까마귀 편대와 기수들이 죽은 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 근방에 모든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은 하늬안이 있던 곳에 밀집되어 있을 텐데 거기가 뚫린 걸까? 아린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걸까?’

    이들은 분명 로디아를 지원하러 왔을 것이다.

    ‘로디아가 그새 다른 곳에 지원 요청을 했구나.김창수 저것도 지 혼자 오지 말고 좀 애들 좀 데려오지, 진짜.’

    한숨을 내쉬고 있는 정혁의 곁으로 하늬안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녀는 쓰러진 아린을 옆에다 뉘이고 정혁의 곁에서 같이 엎드려 숨었다.

    “아린은 상태가 왜 저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길어질 것 같으니 하지 않겠어.”

    하늬안의 표정이 오묘했다.

    무언가 억울한 것 같기도 분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정리는 된 거지?”

    “그래, 이 녀석이 깔끔하게.”

    하늬안이 누워 있는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본 크로우 편대가 이곳으로 향하는 걸 보고 왔어.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아니나 다를까.”

    하늬안은 멀리서 격돌하고 있는 두 사람을 주목하며 말했다.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저 양반을?”

    그녀는 이곳에 김창수가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하늬안은 예전부터 제논의 왕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이러한 불만은 제논의 기사단 안에서 알게 모르게 속 불로 지펴져 확산되고 있었고 이는 김창수도 눈치채고 있었다.

    제논의 기사단은 전투 집단이다.

    여러 이익집단들이 모여 각자의 색깔로 길드가 창설되지만 제논의 기사단은 그들이 제논의 수비대로 임명되기 전부터 오직 승리를 갈망하는 싸움꾼들의 모임이었다.

    그런 그들이 제논에 귀속되고 나서 제논 왕정이 자꾸만 옹졸한 생존 게임으로 치닫자 내부에서 자신들의 소속 목적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고 이는 점점 길드원들의 이탈로 번졌다.

    내부에서 여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김창수가 제논의 국왕과 인연이 있는 사이라도 이런 원망들을 더 이상 감수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행보는 하늬안의 심장을 들뜨게 만들었다.

    하늬안은 김창수를 자주 만나지 못했다.

    폼 나는 싸움꾼이라는 전설은 들리는 말뿐이었고 그녀는 한 번도 김창수가 제대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기사단 내부의 팀장 정도 되는 플레이어들 말고는 김창수가 직접 길드원들을 관리하진 않았기에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김창수의 모습은 낯설기도 하면서 동시에 매우 강렬했다.

    공중에 모인 본 크로우 편대가 일제히 강습 작전을 실행했다.

    장창 기수들이 창을 들고 강하하고 공중에서 궁수들이 두세 발씩의 화살을 동시에 날려 보낸다.

    김창수는 정면에서 밀려드는 저주의 파도를 그의 양날도끼로 갈라 버리고 날아오는 화살들을 도끼를 회전시켜 튕겨 낸 다음 측면의 장창 기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 버렸다.

    주인을 잃은 본 크로우의 주둥이를 한 손으로 붙잡아 강하하는 속도를 이용해 그대로 뒤에 있던 바위에 들이받게 만들었다.

    로디아는 계속해서 자신의 힘을 제로니막스에게 주입하면서도 빈틈을 노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본 크로우 편대가 등장하자 저주의 파도를 날리고 나서 훌쩍 김창수의 사정권에서 이탈했다.

    그가 본 크로우의 기수들에게 둘러싸일 수 있도록 말이다.

    “어딜!”

    그러나 마법사들과의 싸움에 거리 이격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김창수는 순식간에 본 크로우 편대의 집중 공격을 파쇄하고 로디아의 등 뒤로 접근했다.

    로디아는 급히 보호막을 펼쳐 아래서 위로 쳐올리는 양날도끼의 검기를 막아 보았지만 견고하지 못한 보호막이 깨지면서 후드 윗부분이 찢어졌다.

    후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붉은 안광의 로디아의 모습은 꽤 참혹했다.

    코는 뭉개져 없었다.

    입은 오른쪽이 볼을 가르고 찢어져 기괴했으며 얼굴의 반은 화상 자국으로 가득했다.

    머리는 듬성듬성 볼품없이 자라 있었다.

    로디아의 기괴한 모습에 김창수는 흠칫 놀랐으나 빗나간 공격을 만회하고자 왼발을 옆으로 내질렀다.

    로디아는 그것을 받아 치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허공에서 다시 후드 망토가 튀어나와 그를 감쌌다.

    완연한 어둠속에 붉은 안광이 다시 번뜩였다.

    “꽤 망가졌구나.”

    김창수가 어깨를 돌리면서 공중에 뜬 로디아를 올려다보았다.

    절그럭거리는 방어구 소리가 꽤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로디아는 불쾌했다.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분노를 더욱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 올려 주변에 흩뿌려진 본 크로우와 기수들의 시체를 일으켰다.

    그것들은 이미 김창수에 의해 분해된 상태였지만 일정한 형태 없이 대지에서 올라와 김창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도끼를 쥐고 두어 번 회전하며 모든 시체 더미들을 더 이상 달라붙을 수 없게 더 작은 조각으로 분쇄시켰다.

    그 사이 로디아가 만들어 낸 암흑 구체가 갑작스레 김창수의 얼굴 앞에 나타났다.

    “다크 익스플로전.”

    구체는 로디아의 주문과 함께 내부에서부터 꿀렁거리더니 곧바로 폭발해 버렸다.

    곧장 하늘로 검은 빛줄기가 솟구쳤고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다만 김창수가 서 있는 곳만은 멀쩡했다.

    그는 어느새 왼팔에 펼쳐진 방패로 자신을 가린 뒤였다.

    방패는 그가 손을 털자 다시 축소되어 팔의 중갑 방어구 형태로 변했다.

    “지루하군.”

    김창수의 말에 로디아가 그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하늬안은 느꼈다.

    왠지 로디아가 그를 비웃는 것만 같다고.

    그 찰나에 김창수의 오른쪽 측면에 제로니막스가 등장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김창수가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제로니막스의 저주가 담긴 오른 주먹이 김창수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마치 하나의 폭발 같았다.

    주먹질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폭음과 함께 김창수는 오른쪽으로 튕기듯 날아갔다.

    하늬안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정혁이 사력을 다해 그녀를 막았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제로니막스와 격렬히 싸우던 엘라는 그곳에 없었다.

    아마도 끔찍한 일격을 맞은 모양이었다.

    정혁은 한숨을 쉬며 한마디 짧게 뱉었다.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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