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7화 (27/200)
  • ◈27화

    로디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감지되는 강렬한 기운에 흠칫하고 놀랐다.

    젠은 이미 나가떨어졌고 근처에 그를 보호해 줄 병력은 없다.

    제로니막스를 소환하기 전 전투 반경 탐색을 분명 완벽히 했었다.

    제로니막스에게 자신의 생명력과 마나를 보급해 주는 동안 취약해질 자신을 위협할 만한 적은 없었다.

    물론 아무리 취약해졌다고 해도 길 가는 어중이떠중이만큼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개의 생각을 동시에 가지면 집중력이 떨어지기에 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려거든 제로니막스의 중간계 강림에 집중해야만 했다.

    흑마법사의 소환수는 흑마법사의 전투 상태에 따라 그 힘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상한 대장장이와 검사, 그리고 아엘프 꼬맹이가 군락지에 침입해 있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렇게 큰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들은 곧바로 나머지 병력들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마치 짐승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듯 멍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곳에서 정리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장장이가 되돌아오더니 추락하는 엘라를 잡아 주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부터 찝찝했는데 이후에 벌어진 그의 행동 역시 분명 이상했다.

    사념이 많을 수는 없다.

    판단은 뒤로 미루고 지금은 자신이 뽑은 최상급 칼날에 집중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로디아였다.

    다만 찝찝하다.

    이 기운은 그도 과거에 느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동시에 부드럽다.

    추측이 옳다면 이곳에 갑자기 등장한 자는 대전쟁 당시에 그와 맞부딪쳤던 자다.

    지금은 제논의 기사단 길드 마스터로 자리하고 있는.

    “젠장.”

    로디아는 뒷덜미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급히 다른 곳으로 전음을 보냈다.

    ***

    정혁은 공중에 떠 있다.

    이렇게 한참을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있다.

    다른 이의 손에 멱살 잡혀서 말이다.

    김창수의 눈썹은 꿈틀거렸고 붉은 눈동자는 이글거렸다.

    정혁은 속으로 눈동자가 적색인 자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쥔 양날 도끼가 어깨 너머에서 반짝일 때마다 잡힌 멱살 때문에 삼키기 힘든 침을 꾸역꾸역 삼켰다.

    “들어 봐. 들어 보라니까.”

    “반말이나 찍찍 해 대고, 생각보다 많이 건방진 친구였군.”

    ‘아니, 이 새끼야.내가 너한테 자존심 상해서 어떻게 존댓말을 하냐!’

    자주 나오는 정혁만의 라떼다.

    ‘한’과 같은 시대에 오아시스에서 이름을 알린 플레이어들이라면 누구든 ‘한’을 거쳐 갔다.

    ‘한’도 사람인지라 90% 넘는 오아시스의 플레이어들에게 미움을 받긴 했어도 나머지 10% 정도는 조 패더럴처럼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도 있었다.

    물론 조는 플레이어가 아니었긴 했지만 말이다.

    김창수도 그런 인물 중 하나이다.

    김창수는 정의롭지만 그 속에 야욕을 숨긴 자다.

    오아시스에서 전투력으로 100위 안에 들었을 때 그는 떠오르는 루키로 전 대륙에 이름을 날렸고 그가 어디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소규모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랬기에 그는 거만했다.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참 많지만 정혁은 늘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하기를 즐겼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몰린 상대에게 내던지는 조롱의 순간은 짜릿했다.

    김창수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쯤 그는 ‘한’을 만났고 ‘한’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김창수는 처절하고 비참하게 무너졌다.

    다른 이들이 패배 후 이를 갈 때 다만 김창수는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 뒤로 꽤 오랜 시간 ‘한’을 따라다녔다.

    몇 번 그에게 닥친 기습을 막아 주기도 했고 그와 함께 행동하며 곁에서 그의 잔인무도함을 ‘배웠다’.

    전세를 읽는 법, 기회를 노리는 법을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마치 기록을 하는 듯 그는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밤마다 복기했다.

    어느새 ‘한’은 원치 않는 스승이 되었다.

    김창수의 체격이 날로 우람해지고 양날 도끼가 온전히 그의 수족이 되었을 때 ‘한’은 이제 그에게 완전히 압도적인 공포의 존재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장난이 아닌 어느 정도 신경은 써서 상대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때가 됐을 때 김창수는 ‘한’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이빨에 낀 오랜 찌꺼기가 빠진것처럼 개운해했다.

    김창수의 이후 행보는 놀라웠다.

    ‘한’과의 전투 이후 재야로 사라진 줄 알았던 김창수의 등장은 고정되어 유지되고 있던 랭킹 50위 이내의 순위를 통째로 뒤바꾸었고 상위 그룹들도 그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위 랭크 10위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불도저처럼 맹렬하게 밀고 나갔다.

    각 국가들은 높은 랭커들을 보유하고 있다.

    어떤 제국은 몇 명을 어떤 왕국은 한 명을.

    국가에 몇 명의 랭커가 있느냐에 따라서 세력의 범위가 달라진다.

    힘의 세계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최강의 적이 최악의 적으로 군림했던 시절에는 이런 논리가 이상하게 적용되고 있었지만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더욱더 명확하게 세계에 적용되고 있다.

    김창수는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제논을 지키는 하나의 울타리가 분명했다.

    그런 울타리에 간신히 정혁이 지금 걸쳐 있다.

    아니 붙잡혀 달려 있다고 봐야겠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잘 설명해야 할 거야.”

    김창수는 힘겨워하는 그를 보면서 바닥에 내던졌다.

    정혁의 HP가 소량 감소했다.

    ‘제논 새끼들… 다 똑같아….’

    그는 뒤로 돌아 공중을 바라보았다.

    제로니막스와 엘라가 격렬히 싸우고 있었다.

    전세는 이미 제로니막스 쪽으로 많이 기울긴 했다.

    엘라는 은행나무 군락지의 정화 마법을 유지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이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로니막스는 본연의 최장기를 마음대로 뽐내는 중이었다.

    어렴풋이 저 악마가 제로니막스라는 것을 김창수는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 어딘가 저 악마를 부리는 흑마법사가 있을 것이고 군주급 악마를 부리는 흑마법사는 아크에서 꽤나 강한 축에 속하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호각으로 싸우고 있는 저 엘프와 비슷한 여성은 누구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전혀 느껴보지 못한 마나를 가지고 있고 외부적으로 식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곳 역시 생소하다.

    마치 무슨 마법에 쌓인 것처럼 자신의 위치가 제대로 확정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일단, 하늬안이 위험하다고 한 건 거짓말. 쏘리.”

    “허, 참.”

    그는 정혁의 태도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미안합니다.”

    정혁은 태도를 바꾸었다.

    물론 속으로 욕을 서른 바가지 쏟아내며 말이다.

    김창수는 팔짱을 끼고 정혁의 앞에 섰다.

    ‘말해 봐라 이건가?’

    “내가 너를, 아,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다 제논을 위해서 야…요.”

    김창수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근육 돼지가 진짜….’

    “솔직히 말하죠. 소식은 들었겠죠? 북부의 아크 제국이 남하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어쩌면 이번 도돈치아의 일과 더불어 자유 연맹과의 대립은 카탈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초석일 수 있어요.

    신호탄? 그 이상일 수도 있구요.

    만약에 자유 연맹이, 그럴 확률은 적지만 자유 연맹이 아크 제국에 완전히 먹힌다면? 어떻게 할 거죠, 제논은?”

    “…흐음.”

    정혁의 말에 김창수는 손가락을 턱에 대고 몇 번 문지르며 작게 소리를 냈다.

    “너무 먼 이야기를 하는군.”

    김창수는 입맛을 다시고 대답했다.

    회피성 대답이었다.

    “먼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논에게 닥칠 미래가 될 가능성이 없진 않습니다.”

    사실 그렇다.

    제논은 지금 너무 소극적이다.

    왕은 무능력하고 신하들의 국정 개입이 더 심해진 상태다.

    카탈의 남부는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 아니다.

    물론 항구 도시가 두 곳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해양에 진출해 특별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대로는 고립되고 말 것이다.

    고립은 곧 내부에서의 반란을 유발할 것이고 머리를 잃은 나라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김창수가 바라는 제논의 미래는 그런 하찮은 결말을 맺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무리를 해서라도 세상을 향한 돋움을 해야 한다.

    흐름은 물결이 되고 물결은 파도가 된다.

    파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파도에 올라타 함께 강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또 다시 흐름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건방지게도 너는 우리에게 ‘기회’라는 것을 준다는 듯이 이야기 하는군.”

    정혁은 정곡을 찌르는 김창수의 말에 진땀을 흘렸다.

    맞는 말이다.

    정혁이 제논이라는 왕국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김창수의 존재다.

    그나마 익숙하고 믿을 만한 인물.

    “우리 제논에게 바라는 것이 있나?”

    김창수는 어깨를 풀면서 말했다.

    “…없다고 하진 않겠습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등에 짊어진 도끼를 꺼내 우람한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나도 그리고 너도 서로 잃을 것이 없는 도박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곧 언덕 위를 바라본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흑마법의 고약한 파동.

    “그래, 대장장이. 어디 한번 네 장단에 놀아 보도록 할까.”

    김창수는 순식간에 정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거구가 말이다.

    ***

    - 카캉!

    로디아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전격의 칼날을 급히 펼친 마나 보호막으로 겨우 막아 냈다.

    보호막에는 벌써 금이 갔다.

    직감적으로 안다.

    다음 참격은 더욱 강할 것이다.

    지금은 인사 정도겠다.

    “로디아.”

    “오랜만이군요.”

    로디아의 붉은 안광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말투 역시 한없이 불쾌했다.

    “후드 뒤집어쓴 모양이 여전히 건방지군.”

    김창수는 어깨에 도끼를 기대며 그와 제로니막스 사이에 연결된 회색 사슬 같은 것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았다.

    “나름대로 강해졌구나.”

    “옛날의 저는 아닙니다.”

    “하기야, 그때는 볼품없었지.”

    김창수의 말에 로디아 주변의 기운이 더욱 깊게 침전했다.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당신 같은 인물이 이런 곳에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 겁니까?”

    “거, 안 될 건 또 뭔가.”

    “아크 제국이 제논을 바라볼 겁니다.”

    “어차피 차차 짓밟힐 수순이었을 뿐. 보이나, 이 발아래.”

    김창수가 자신의 발아래 기어가는 지렁이를 살짝 밟아 본다.

    지렁이가 사력을 다해 꿈틀거렸다.

    “유명한 속담이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물며 밟힌 지렁이도 꿈틀한다는데.”

    김창수가 로디아에게 단숨에 달려들었다.

    “나는 지렁이도 아니거니와.”

    로디아가 지면에서 시체 덩어리를 끌어올려 벽을 만들어 세운 것을 김창수가 분쇄하며 소리쳤다.

    “꿈틀거리는 순간 그곳은 사지가 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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