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6화 (26/200)
  • ◈26화

    어둠 속에 거대한 방.

    꽤 높은 천장에는 문양이 새겨진 두 개의 기가 길게 늘어져 있다.

    반쯤 걷어진 커튼 사이로 빛줄기가 방 안의 원탁 테이블을 비추고 석조 건축으로 이루어진 벽에는 몇 개의 책장에 책들이 수북하다.

    원탁 테이블에는 여러 전술 지도가 늘어져 있고 펼치다 만 책들이 널브러져 있다.

    뒤에는 나무 재질의 책상이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제논의 기사단’이라고 새겨진 웅장한 디자인의 명패가 있고 책상 위에는 발이 올라와 있다.

    의자의 삐걱거림과 함께 어둠 속에서 손이 빠져 나와 커다란 맥주잔을 쥐었다.

    몇 번의 벌컥거림과 더불어 한 번의 트림 소리.

    그리고 맥주잔은 왼쪽으로 내던져졌다.

    “골치가 아프군.”

    어둠 속에서 낮은 중년의 남자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드웨이크. 깨어 있나?]

    남자는 전음을 보내 드웨이크를 찾았다.

    원탁 바깥쪽에서 푸른 마나가 응집되다가 구체가 되더니 펼쳐지며 공간 워프 홀이 생겨났다.

    그 속에서 완전 무장한 드웨이크가 걸어 나왔다.

    의자의 삐걱거림과 함께 절그럭거리는 중장갑의 마찰음이 들렸다.

    거구.

    드웨이크도 충분히 거대했지만 그를 부른 이는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구의 남자였다.

    전신을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그의 가슴에는 거대한 사자가 울부짖는 문양이 위풍당당하게 새겨져 있었다.

    “역시.”

    남자는 이제 완전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적당히 자란 수염과 까무잡잡한 피부, 강렬한 적색의 눈동자는 기세가 등등했다.

    주황빛 머리카락이 꽤 길었는데 남자는 그것을 금방 뒤로 한 번 묶었다.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와 앞에 선 드웨이크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원탁에 걸터앉았다.

    “옛날 같았으면 앞뒤 안 가리고, 그렇지?”

    남자는 드웨이크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드웨이크 역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옛날이 언제요, 형님.”

    남자는 호쾌하게 껄껄 웃었다.

    드웨이크는 원탁에 밀쳐져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자리에 앉았다.

    그가 들고 있던 육중한 무기와 방패는 순식간에 손에서 사라져 없어졌다.

    “나라의 수비대가 된다는 게 즐겁지만은 않네.”

    “다 감수하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정치니, 이권 다툼이니. 여기는 그나마 덜할 줄 알았더니. 똑같구만, 인간이 있는 곳에는.”

    남자에게서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제논의 기사단은 험한 길을 헤쳐 온 오아시스의 쟁쟁한 길드 중 하나다.

    오아시스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새로 생성되는 길드나 국가는 기존의 쟁쟁한 국가나 길드들의 무력적 폭압 앞에 더 크지 못하고 적정 수준을 유지하며 공생하는 길을 택하곤 한다.

    그러나 제논과 그의 수비대가 되기로 결의한 제논의 기사단은 그 속에서도 잡초처럼 뿌리를 뻗고 결국 카탈의 최남부 지역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땅이 생겼다고 해서 국가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역도 전쟁도 감수해야만 하는데 아직 제논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남자는 답답한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중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

    “마중물 말입니까?”

    드웨이크의 말에 남자는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 카탈 북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지 않나?”

    “예.”

    “우리가 가만히 이곳에서 손 놓고 있으면 후에 우리는 어떤 대접을 받을 것 같나?”

    “…아마도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겠죠.”

    “그래, 이 사건 이후로 제논은 더욱 고립되고 말걸세. 어디가 승리하든 간에 말이지.”

    “활로를 찾고 싶으신 겁니까?”

    “…활로라….”

    남자는 큰 숨을 쉬었다.

    드웨이크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본래 길드 이름은 ‘제논의 기사단’이 아니었다.

    남자는 제논의 현 국왕과 꽤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가 제논을 건립할 때도 크게 기여 했었고 제논의 울타리 역할을 지금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길드는 제논의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별칭이 결국 길드 전체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길드의 가족들 모두 제논을 위해 각계각층에서 일하고 있지만 어쩐지 요즘 제논 안에서 이들을 점점 배척하려는 느낌이 들던 차였다.

    “생존 싸움에서 우리는 자꾸만 밀리고 있는 것 같아.”

    “예, 형님. 맞는 말씀입니다.”

    드웨이크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억지로 가슴에 품은 성난 짐승의 주둥이를 붙잡고 참고 있다는 걸… 그들이 알아야 할 텐데 말이야.”

    남자가 이를 갈았다.

    드웨이크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오랜 시간 그를 모셔 오면서 모든 행동과 성격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답답함이 어떤 방식으로든 곧 폭발할 거라고 생각했다.

    번뜩, 드웨이크는 하늬안을 생각했다.

    “하늬안으로부터 전음이 안 온지 꽤 되었습니다. 위치 파악도 안 되고 있습니다.”

    “하늬안? 빨강 머리?”

    “예, 그… 항상 덩치에 안 맞는 큰 검 차고 장난친다고 놀리시던 여자 말입니다.”

    남자가 진절머리 치더니 껄껄 웃었다.

    “여하튼, 그 녀석이 연락이 안 된다고? 네가 뭐 특이한 놈한테 붙여 놨다고 했잖나?”

    “맞습니다. 왈로에게 맹독염화 무기 세트를 제공해 준 대장장이에게 붙여 놨었습니다.”

    “그래. ‘오아시스’라는 칭호가 붙은 양반.”

    남자는 코웃음을 치고는 목을 살짝 돌렸다.

    우득 하는 뼈마디 소리가 차가울 정도로 적막한 방 안을 작게 울렸다.

    “앞가림은 하는 친구라 괜찮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그 대장장이와 엮여 있으니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직감을 떨칠 수 없어서 말입니다.”

    “하기야, 자네 직감은 항상 들어맞곤 했으니.”

    그 순간.

    [들려? 들리나?]

    “?”

    남자가 순간 허공을 응시했다.

    드웨이크가 남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대답 좀 해 봐! 김창수!]

    “누구지?”

    긴급 전음이 온 모양이었다.

    드웨이크는 순간 본능적으로 정혁을 떠올렸다.

    길드 마스터에게 긴급 전음을 보낼 수 있는 권한은 마스터가 직접 권한 인수를 한 몇몇의 플레이어만이 가능하다.

    그날 드웨이크가 건네준 긴급 전음 채널 개설권을 그가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자초지종 생략하고 너 지금 한참 근질근질할 거 아냐! 여기로 와, 당장!]

    “당황스럽군.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장난은 그만하지.”

    남자는 전음 채널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급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야, 야 이씨! 여기 하늬안 다 죽어 가고 있다고!]

    “하늬안?”

    그의 말에 드웨이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이, 그 말에 책임져야 할 거야.”

    남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는 드웨이크에게 손바닥을 보이고는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드웨이크는 마지못해 의자에 다시 앉았다.

    [오기나 하고 말해!]

    “…….”

    [앞뒤 가리는 성격 아니잖아!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하하핫! 아마추어라.”

    남자는 호탕하게 웃고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얼굴을 들었다.

    “어디지?”

    [좌표 추적해서 이곳으로 당장 와 줘! 한시가 급해!]

    이런 당당함이라니.

    남자는 복잡 미묘한 감정 속에 긴급 전음 채널을 닫았다.

    아니, 사실 남자가 닫았다기보단 저쪽에서 먼저 채널을 닫은 것이 맞다.

    신생 왕국의 수비대라고 해도 남자는 이런 대우를 받을 만큼 이름 없고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제논이라는 왕국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을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분명 남자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방금의 전음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당돌한 건방짐은 오랜만이기도 했다.

    마치 그가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그의 성격을 완벽하게 긁어 놨을 뿐 아니라 신의를 중시하는 남자의 신념을 자극하기까지 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늬안이 위험하다고 하는군.”

    “하늬안이 말입니까? 아, 그전에 그 전음은.”

    “대장장이 녀석이겠지.”

    “…예.”

    “뭐, 속는 셈 치고 한번 가 보자구. 몸이나 풀 겸 말이지.”

    “가실 겁니까? 직접?”

    드웨이크가 놀란 듯 남자에게 재차 물었다.

    “아마추어라는 말을 들었는데 안 가면 진짜 아마추어 아닌가?”

    드웨이크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그리곤 곧바로 일어서서 그를 따를 채비를 했다.

    남자 역시 뒤로 돌아 자신의 책상 뒤에 있던 거대한 무기함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방 전체를 울리는 듯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키보다 큰 양날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자루의 길이와 두께도 상당했지만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날 선 도끼날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따라오지 말고 스크롤이나 주시게.”

    남자는 도끼를 가볍게 몇 번 휘둘러보고 등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곤 방패를 정비하고 있는 드웨이크에게 무언가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같이 안 가십니까?”

    “산책 가는데 굳이 너까지 따라갈 필요가 있나.”

    “아니, 형님 그래도…!”

    “그냥 주기나 하시게.”

    드웨이크는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품에서 적색 스크롤을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손에 쥔 스크롤에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고 곧 적색 기운에 휩싸였다.

    “갔다 올 테니 웬만하면 비밀로 해 줘.”

    “알겠습니다. 하늬안을… 부탁합니다.”

    “그래.”

    남자는 허공에 펼쳐진 공간 워프 홀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이렇게나 빨리 제논의 기사단 긴급 전음 채널 개설권을 사용하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혁에게는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린이 이곳으로 와 준다면 모르겠지만 분명 그곳에서 한바탕하고 난 뒤에 정신을 잃었을 것이 뻔했다.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큰 힘에는 반드시 그에 준하는 반동이 신체에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왈로의 무기에서 붉은 수정을 다시 이곳으로 끌어 온다고 해도 정혁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기를 만들 재료도 없고 채광을 이미 한 수정이기 때문에 채광 모드가 활성화되지 않을 것이다.

    방법은 하나.

    제논의 기사단 길드 마스터 ‘김창수’에게 긴급히 지원을 요청하는 것.

    정혁은 그렇다고 그 양반이 예, 하고 달려올 양반은 아니라는 것을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여러 떡밥을 뿌려야 했다.

    그 덕분에 김창수는 정혁의 요청에 응할 것으로 보인다.

    충분히 건방졌고, 동료를 이용했고,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게다가 이곳에서의 전투, 길드 마스터가 껴 있다면 이후에 충분히 여파가 클 것이다.

    그의 생각에 김창수는 이런 상황이 펼쳐지기를 바라고 있을 양반이다.

    이제 곧 저 앞에 제로니막스를 소환한 흑마법사가 있을 것이다.

    그와 김창수를 싸움 붙이기만 하면 되는데!

    정혁은 수풀을 조심히 헤치며 불쾌한 힘의 근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래, 불러서 오긴 왔는데 이건 무슨 상황이지?”

    그의 등 뒤에서 날선 목소리가 날아든다.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기세만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건 분명히 김창수다.

    “바로… 왔네?”

    정혁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