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5화 (25/200)
  • ◈25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장간에서 조 패더럴과 함께한 행복(?)한 숙련도 올리기 작업을 통해 정혁은 겨우 목걸이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대장간 안에선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큰 이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와 함께한 시간은 그것이 착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끔찍했다.

    조는 마치 그가 ‘한’에게 당했던 것들을 그대로 돌려주려는 듯 열성적으로 정혁에게 다양한 기술들을 주입시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강조한 것은 체력이었다.

    몇 날 며칠을 망치질해도 지치지 않을 만큼의 체력이 중요하다면서 ‘라떼’를 혼자서 수십 잔 들이켰다.

    그 덕분에 점점 넝마 조각이 되어 가던 정혁에게 크리스탈의 재구성과 관련된 알림 창은 사막의 단비처럼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몇 번의 망치질과 함께 제작된 목걸이는 정혁이 ‘한’이었을 때도 소문조차 들어 보지 못한 엄청난 물건이 되어 있었다.

    목걸이는 본래의 주인인 아린에게 자연스럽게 귀속되었고, 그것을 아린에게 건네주자마자 아린의 품 안에서 초록빛 따스한 빛이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엘프의 영령이 깃든 선조의 목걸이]

    - 아엘프 ‘아린’에게 귀속됩니다.

    크리스탈 자체에 각각 아린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접근 자체가 힘들었다.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물품을 제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일반적인 대장간에서도 80% 이상의 실패 확률을 인지하고 시도하는 편이다.

    어차피 능력 자체가 이런 방면에 있어서는 사기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이점을 가지고 있는 정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그만큼의 숙련도가 필요했을 뿐.

    아린은 폭발 속에서 초록빛 아우라와 함께 바닥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하늬안은 정혁을 붙들고 옆으로 착지했다.

    순간 정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정혁이 내려오자마자 느끼고 있는 것.

    그건 지독히도 강한 악마의 숨결이었다.

    수없이 많은 악마와 싸웠던 그였기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

    고위급, 그것도 군주급 이상이다.

    역시 예상대로 엘라를 상대하기 위해 악마를 소환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엘라의 승리를 기대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늬안, 뭐 안 느껴져?”

    “무슨?! 그것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아니, 그리고!”

    하늬안이 정혁에게 가까이 다가와 자그맣게 말했다.

    “싸움 기술도 없는 아린한테 만들어 줘서 어떻게 하게?”

    정혁은 하늬안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잘 봐 둬. 넌 정말 나 때문에 크게 횡재하게 될 테니까. 꼭 갚아라.”

    정혁은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숲 쪽으로 달려갈 채비를 했다.

    이미 근처의 땅들이 보랏빛으로 오염되어 가는 듯했다.

    “야, 어디 가!”

    “엘라에게!”

    “야 이씨!”

    정혁은 다급히 숲으로 뛰어갔다.

    하늬안은 정혁이 달려간 쪽을 바라보다가 남은 아크의 병력이 자신과 아린 쪽으로 모여드는 것을 눈치채고 떨어진 검 두 자루를 황급히 쥐었다.

    아린을 바라보니 그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자리에 꼿꼿이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쳐 버리겠네.한 녀석은 경계 마법 지대의 숲으로 혼자 뛰어가질 않나, 한 녀석은 저기서 울고 있고.’

    하늬안이 허공을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아린! 괜찮은 거야?”

    하늬안이 아린에게 다가가려 하자 그가 손을 뻗어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아린은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번쩍 뜨고는 주변의 자신을 둘러싼 적들을 바라보았다.

    곧 아린의 두 손에서 초록빛 마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모인 마나는 가슴에 영롱히 빛나는 목걸이의 빛과 연결되어 삼각형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아린의 몸은 두 손을 천천히 펼치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레아– 엘– 아르테.”

    ‘고대 엔트어?’

    하늬안은 떠오른 아린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의 입에서 엘라가 외쳤던 언어와 비슷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흠칫했다.

    그녀는 주변에 모이는 마나와 떨리는 공기 속 진동이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는 아크 쪽 병력들도 동일했다.

    흑마법사들의 마법과 동시에 구울과 전사들이 일제히 아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날아든 마법은 아린에게 씌워진 마나 보호막에 의해 막히고 달려드는 모든 병력들은 아린을 둘러싼 신비로운 병력들에 의해 틀어 막혔다.

    “은행나무 엘프…?”

    반투명한 형체가 아린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한다.

    어느새 하늬안이 있는 곳까지, 그리고 공중에서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아득히 들리는 것만 같다.

    그들은 군대다.

    군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완벽히 무장한 은행나무 엘프들의 군대가 아린의 지휘 아래 마치 지하에서 일어난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 정도라고!?”

    하늬안은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오백에서 많게는 천 명쯤 되어 보이는 엄청난 병력이 순식간에 소환되었다.

    엘프는 자연에 속한 존재들이라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곤 했다.

    자연이라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그런 그들이 되살아나 전투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은 흑마법에 의해 억지로 되살리는 방법 말고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마치 아린을 왕으로 모시듯 그들은 숙련된 군사의 모습으로 완벽한 방어진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공중에는 은행나무 엘프의 자랑인 까마귀 편대가 위용을 떨치며 창을 쥐고 있었다.

    아크 병력들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플레이어들은 더욱 그랬다.

    이미 한 차례 부딪침이 있었지만 도륙된 것은 그들 쪽이었다.

    형체가 없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중심의 아린을 공격해야 하지만 그들도 이미 많은 전투 탓에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첩첩으로 쌓인 엘프 병력들의 방어벽을 분쇄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린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까마귀 편대가 그가 안전하게 착지할 때까지 경계를 계속했다.

    아린은 곧바로 초록빛 마나를 끌어올려 앞으로 펼쳤다.

    ‘그’의 은행나무 엘프 군대가 아크 병력들에게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놈들이 혼비백산이 될 차례다.

    하늬안은 멍하니 이 놀라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어떤 음유시인에게 모든 장면을 전달해야 시대를 노래할 명곡이 될까.

    아니, 이 장면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구울들은 이미 정리가 되었고 전사들은 의미 없는 휘두름 속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어 간다.

    남은 흑마법사 둘은 어떻게든 시체 방벽으로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사지가 뜯어진다.

    괴팍하다고 소문난 만큼 군대는 자비가 없다.

    군대는 오직 아린의 명령 아래 목표를 명확하고 깔끔하게 처리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적어도 오백 이상의 병력 앞에 백여 명 남짓한 아크 제국의 잔여 병력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지막 적까지 정리되었을 때 아린이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머물던 은행나무 엘프의 병력들도 먼지처럼 사라졌다.

    아린을 감싸던 초록빛 마나의 흐름도 잠잠해지고 목걸이의 빛도 사라졌다.

    아린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늬안은 그에게 다가가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먹였다.

    아린은 겨우 목을 축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걸이의 능력이야?”

    “잘… 모르겠어요. 목걸이를 걸자마자 많은 것들이 갑자기…….”

    하늬안은 작게 공명하는 크리스탈 목걸이를 잠시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따뜻한 기분이 그녀를 감싸곤 곧 사라졌다.

    아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하늬안은 그를 붙잡고 다시 정혁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이상한 놈이라는 건 확실하다니까.”

    ***

    정혁은 강한 충격과 함께 바닥 깊숙이 몸이 파고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처음 정혁의 몸으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떴던 빨간색 강렬한 HP 경고창이 눈앞을 가려 왔다.

    다행히 엘라가 추락하면서 지면에 걸어 놓은 충격 완화 마법 덕을 정혁도 같이 본 것 같았다.

    아니었다면 엘라 자체의 충격 데미지로 정혁이 사망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재빨리 회복 물약을 들이키고는 엘라를 옆에 눕혔다.

    허공에는 녀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즐겁다는 듯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로니막스.”

    정혁이 이를 갈았다.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괴상한 종교 같은 것을 증오하는 정혁이었기에 인간을 끊임없이 홀리고 분쟁을 일으켰던 악마라는 족속들을 자연스럽게 싫어하게 됐다.

    실제로 ‘한’이 존재했을 때에 악마들은 쉽게 오아시스의 대륙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한은 마음 같아서는 마계를 박살 내고 싶었지만 시스템상 마계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한 플레이어가 개인의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어서 그럴 수 없었다.

    제로니막스.

    모든 자연의 적.

    엘라를 상대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완전한 반대 성향의 적이다.

    자연계의 적들을 워낙 많이 상대해 봐서 약점도 잘 알고 있을뿐더러 영악하기 그지없다.

    정혁은 겨우 어느 정도의 체력을 회복했다.

    엘라 역시 정신을 차리고 위로 날아오르려다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정혁을 바라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엘라가 바로 손을 뻗어 정혁을 휘둘러 치려고 했다.

    ‘미친! 이거 즉살이다!’

    정혁은 기겁을 하며 몸을 돌려 겨우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은 손사래를 사력을 다해 피했다.

    가까이 닿은 풍압만으로 소량의 HP가 깎였다.

    “에, 엘라? 날 알아보겠어?”

    정혁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조 패더럴이 자신을 알아본 것처럼 어쩌면 엘라도 자신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미친, 안 꺼져?”

    엘라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곤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제로니막스는 웃으면서 공중으로 떠오른 엘라를 반겼다.

    “젠장.”

    정혁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렇다.

    그에게는 엘라의 말이 고대 엔트어로 들릴 뿐이다.

    뉘앙스로는 전혀 그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다.

    저 왈가닥에 재수대가리 없는 엔트가 꼭지가 제대로 돌았으니 성질이 꺼질 때까지 미친개처럼 달려들 게 뻔했다.

    그러면서도 정혁은 주변을 살폈다.

    저 정도의 악마라면 반드시 근처에 고위 흑마법사가 있을 것이다.

    그 흑마법사의 모든 마나를 태워 가면서 이곳에서 숨 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주변의 대지는 이미 제로니막스의 저주 마법에 의해 보라색으로 오염되어 가고 있었다.

    주변에 부러져 쓰러진 은행나무들과 기생 마법으로 인해서 기괴하게 변한 채 꺾어져 있는 은행나무들도 있었다.

    몇 안 되는 은행나무들을 지키는 싸움을 해 갈 것이다.

    전력으로 부딪쳐도 쉽지 않을 판국에 지킬 것이 있는 상태에선 더 힘들다.

    오염을 막는 정화 마법이 사방에 펼쳐져 있는 것만 봐도 엘라는 충분히 많은 힘을 오염 확산에 쏟아붓고 있다.

    ‘변수를 어떻게든 내가.’

    정혁을 이를 굳게 물었다.

    ‘어떻게 얻은 기횐데.단숨에 랭킹 1위로 도약할 수도 있는 고대룡을 만날 수 있는 토큰을 쥐고 있는 난데. 이렇게 죽기 살기로 도와줬는데 아무것도 모르기만 해 봐 진짜.’

    공중에서 치열하게 격돌하는 엘라와 제로니막스를 바라보다가 정혁은 몸을 돌려 언덕 위를 보았다.

    희미하게 제로니막스와 연결된 마나의 고리가 보였다.

    마치 회색빛 체인과 같은 마나 고리는 악마와 계약한 자들에게 보이는 특유의 형태였다.

    굉장히 강할 것이다.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저 흑마법사와 싸울 방법이 뭐가 있을까? 방법이 있을까? 이런 몸뚱이로?’

    정혁은 최선을 다해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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