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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24화 (24/200)
  • ◈24화

    대장간의 내부에서 정혁은 다시 자신만의 공간의 편안함을 느끼며 마련되어 있는 화로와 모루, 그리고 각종 제련 장비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전의 경험으로 이곳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과 다른 개념으로 흐른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바쁘게 움직여 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정혁은 크리스탈과 더불어 두 개의 목걸이를 손에 꽉 쥐었다.

    그는 모루 앞에서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영롱하게 빛나는 크리스탈 목걸이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잠깐만, 전에는 그래도 보석 속성이나 간단한 정보 정도는 식별되지 않았나?”

    팔짱을 끼고 정혁은 고민했다.

    보통 이 정도 준비가 되었으면 활성화 창에 의해서 다음 행동이 결정돼야 하는데 묵묵부답인 시스템 때문에 약간의 멘붕 상태가 이어졌다.

    그렇다고 아직 대장장이로서의 어떤 지식도 쌓지 않은 정혁이 그냥 알아서 제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설급 광물이라 제련하는 사람의 능력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정혁이 망치질을 해 봐야 뚝딱거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거 참….”

    정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금빛 마나로 뒤덮여 있긴 하지만 그것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조촐한 대장간이었다.

    “자식, 뭘 고민하냐.”

    그 순간 갑자기 정혁의 어깨에 손이 올라오더니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했다.

    “오랜만이다, 한.”

    얼음이 된 정혁의 귀에 익숙한 이름이 닿았다.

    한 알 수 없는 자는 정혁을 ‘한’이라고 불렀다.

    감히 옆으로 돌아볼 수도 없었다.

    마치 가장 안전하다 여기는 집에 누군가 침입한 것을 알게 되면 온몸이 굳어 버리는 것처럼 정혁은 당혹스러움과 불안함이 갑자기 밀려들어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래, 너답지 않게.”

    어깨동무를 했던 어떤 이가 정혁의 앞에 쑤욱 몸을 드러냈다.

    집채 같은 덩치, 완전히 드러낸 어마어마한 팔뚝, 웃을 때 보이는 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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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그의 앞에 선 자는 조 패더럴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

    “말도 안 되는 일이구만.”

    조는 피식 웃으면서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의자를 집어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다시 손가락을 까딱하자 다른 나무재질의 의자가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그것을 정혁에게 건네주고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뭐, 뭔데?”

    ‘이 공간은 오직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만 허락된 공간일 텐데?’

    게다가 조는 정혁을 ‘한’이라고 불렀다.

    정혁은 이게 무슨 일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독특한 대장간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죽고 나서 또 뭐가 있을 줄 알았나.”

    “죽어?”

    정혁의 눈빛이 당황에서 의아로 바뀌었다.

    “그래, 아주 화려하게 죽었지.”

    조는 싱긋 웃었다.

    그의 금이빨이 반짝인다.

    그중에 빈 공간이 하나 보인다.

    쉽게 죽을 양반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혁은 뭔가 공허한 마음이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우리가 있던 강철망치의 본점은, 뭐 사실 강철망치 자체가 오아시스에서 전부 사라졌다고 봐야겠지.”

    “결국은… 뭐 때문에?”

    “너 인마, 너 때문에.”

    조는 손가락으로 정혁을 가리키면서 큰 숨을 쉬었다.

    “어쩌다 내가 너를 난민촌에서 데려오게 됐는지, 왜 내가 그날따라 너 같은 놈에게 연민을 느꼈는지, 내 모든 것이었던 강철망치의 끝과 지금이 이 상황. 뭐랄까, 이렇게 되기 위한 어떤 뜻 모를 자의 계획과 같이 느껴지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아듣게 설명해 봐.”

    정혁은 고개를 저으면서 재차 물었다.

    “어떤 자들이 너를 찾았었다. 검은 말이 새겨진 넥타이를 맨 정장 무리가. 정확히는 네 특이한 칭호를 대며 사람을 찾았다. 굳이…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는 강철망치인데 다른 이에게 휘둘리는 삶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지.”

    "무슨 말을 해도.”

    정혁은 피식 웃었고 조 역시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만큼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가?’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지. 어차피 떠날 세상, 큰 거 한 방은 남겨 주자는 생각에 라테를 깨워 버렸어. 덕분에 뭐, 적당히 아수라장이 됐을 테고 나는 라테의 불꽃에 휩싸였다. 짜식, 꽤 뜨겁더라고.”

    조는 양손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정혁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왔다. 이상했다. 다른 이의 대장간에 가 본 지도 한참 되었지만 이곳의 대장간 용품들과 구성, 그리고 흐르는 마나가 뭐랄까, 너를 떠올리게 했다. 정혁이 아니라 ‘한’ 말이다. 그렇게 이곳에 적응을 마친 순간 네가 온 거지.”

    조는 양 주먹을 앞으로 살짝 뻗어 갑자기 주먹을 펼쳤다.

    “짠- 하고 말이야.”

    유머가 는 건지, 청승맞다고 해야 할지.

    “얼씨구.”

    “그래! 이 자식아! 그거!”

    조는 반갑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주 반가운 반응이구만. 잘 지낸 거냐. 어떻게 정혁의 몸이 된 거냐. 3년 동안 나를 유일하게 괴롭힐 수 있던 자가 없어져서 여간 심심한 게 아니었다.”

    정혁은 알 수 없는 감정에 다시금 휩싸였다.

    그리움이라고 해야 할까? 조는 차가운 기계 같았던 ‘한’과 약간의 친분을 쌓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정혁이라는 본연의 몸 안에서 약자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과거 자신의 영광을 기억하며 그를 걱정했던 친구를 만나게 되니 가슴이 몽글거리는 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여튼 그가 정혁의 몸으로 오아시스에 오고 나서는 뭔가 많이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

    “자초지종은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고.”

    “뭐, 그래. 늘 그래 왔으니.”

    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의자를 치워 냈다.

    의자는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목적이 있겠지. 이곳에서는?”

    그의 물음에 정혁은 모루 위를 가리켰다.

    “저걸… 제련해야 될 것 같은데.”

    그의 손가락을 따라 조는 모루로 향했고 그 위에 있는 두 개의 크리스탈 목걸이를 들었다.

    그는 찬찬히 크리스탈을 살펴보았다.

    “상당하군.”

    어떻게 보면 정혁의 계획대로이긴 했다.

    상세한 내막은 이해되지 않으나 어떤 힘에 의해서 조 패더럴은 이곳으로 ‘소환’된 것 같다.

    그는 일종의 NPC다.

    상상 이상의 자유도를 가진 오아시스에서 NPC는 죽는다고 부활되지 않는다.

    이제 오아시스 최고의 대장장이는 다른 이로 바뀔 뿐, 강철망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져야 할 조 패더럴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다른 힘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혁의 바람대로 말이다.

    대장장이로서의 기술이 하나도 없는 그였기에 배울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조는 괴팍하기는 해도 그에게 훌륭한 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여기는 일반적인 대장간도 아니거니와 조는 왜인지 몰라도 정혁을 정혁이자 ‘한’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걸 네가 할 수 있다고?”

    크리스탈의 파악을 끝냈는지 조는 정혁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거의 쓸모없는 몸뚱이를 가진 ‘한’ 이잖아.”

    “야, 무슨 말을!”

    정혁이 욱했다.

    하지만 사실이다.

    왈로의 무기를 재구성할 때처럼 알림 창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 같았다.

    ‘근데, 그 키를 모르겠단 말이야.’

    “숙련도를 좀 높여야겠다.”

    조는 턱을 만지면서 말했다.

    “숙련도?”

    “일단 이 구역은 네 스스로 창조한 공간이자 너에게 할애된 공간이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의 숙련도가 빠르게 획득될 거라고 예상된다. 내가 교육한다면 아마 금방 이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숙련도를 얻을 수 있을거야.”

    “교육?”

    “뭐, 경험해 봐서 알잖아?”

    조가 손가락을 우득거리며 정혁을 향해 그 징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금이빨이 반짝인다.

    “젠장.”

    “전세 역전이다, 한.”

    ***

    “허억, 어윽”

    하늬안은 복부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력을 다해 아린을 보호하고 있긴 하지만 더 이상 비축한 스크롤도, 물약도 없다.

    두 자루의 무기는 내구도가 거의 한계에 달했다.

    기력이 다해서 포효도 쓸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주변의 적들은 쟁쟁하다.

    그들은 하늬안와 아린을 둘러싸고 있다.

    다행히 아크 쪽 플레이어들은 수가 많이 줄긴 했다.

    전사들도 몇 안 남았고 흑마법사도 두 명 정도가 전부다.

    정혁이 사라지기 전에 흑마법사들을 거의 도륙 내어서 구울의 숫자가 줄긴 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구울들의 통제권이 전부 저 두 명의 흑마법사에게 인계되어 버린 듯했고 전사들도 최우선으로 남은 흑마법사를 보호하며 전투를 이어 갔기 때문에 수는 줄어도 전투의 기세는 여전히 아크 쪽에 있었다.

    “징한 년.”

    아크 쪽 전사 플레이어가 어깨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침을 뱉었다.

    하늬안은 검을 바닥에 내리꽂고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너희들이야 말로 징하다, 진짜.”

    만약 도돈치아에서 아크 쪽과의 전투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전세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늬안의 성격적인 문제긴 하지만 그녀는 상대를 얕잡아 보는 습관이 있어서 항상 전투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는다.

    아크 녀석들은 그저 정신 나간 광신도 단체 정도로만 여겼기 때문에 아크 제국이 남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용맹한 자유 연맹과 그 외의 세력들이 알아서 북쪽 전선을 지켜 낼 거라 생각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실제로 전선에서 마주한 아크 제국의 힘은 대단했다.

    특히 고도의 흑마법과 흑마법사들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곳에서의 싸움도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이전에 경계 마법 지대에서 힘을 많이 뺐기에 지금이 더욱 벅찬 감이 있지만 말이다.

    ‘게다가 지켜야 할 대상도 있고.’

    하늬안은 아린을 바라보았다.

    아린은 그녀의 뒤에서 단도를 움켜쥐고 있다.

    이미 두 번 그녀의 뒤를 막아 주기도 했다.

    누굴 죽인 적이 있을까 싶은 녀석이 징그러운 구울 앞에서도 결의를 잃지 않고 있다.

    하늬안은 아린을 보며 빌어먹을 꼰대 은행나무 엘프들보다 훨씬 그릇이 큰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자식은 도대체 언제 올 생각인 거야.자기가 무슨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극한의 상황에 뿅 하고 나타나려고? 길드로 돌아가기만 하면 팀장이고 뭐고 다 날려 버릴 거야.’

    하늬안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생각해 보면 이만큼 고생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도와주라고 했지 정혁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한 적은 또 없잖아.아니지, 죽으면 귀속된 무기도 다 원상 복구되려나?’

    하늬안은 복잡한 머리를 흔들어 다시 정리했다.

    ‘지금은 우선 전투다.버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순간 대지가 갑자기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후방에서 강렬한 폭발이 터져 올랐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밟고 있는 땅이 울렁거리다가 아래에서부터 흑마법이 분출돼 터져 올랐다.

    하늬안은 재빨리 아린을 감쌌고 아린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정혁이 일전에 들었던 방어 마법이 깃든 망토를 꺼냈다.

    망토로 최선을 다해 데미지를 흡수했지만 공중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들이 공중에 튀어 올랐을 때 황금빛 마나가 그들을 감싸더니 이공간이 열리며 그 속에서 정혁이 튀어나왔다.

    뭐랄까, 지나간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이공간에서 튀어나온 정혁은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온 듯 보였다.

    정혁은 공중에서 당황하는 아린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준비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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