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3화 (23/200)
  • ◈23화

    전투 지원을 위해서 꾸준히 마법을 외우고 있던 아크의 흑마법사는 난데없이 자신 쪽으로 돌진하는 웬 겁대가리 상실한 대장장이 때문에 마법 시전을 중지하고 목표를 바꿨다.

    정혁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흑마법사 역시 보랏빛 후드 안에서 분명 정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려 레벨이 식별될 정도의 저레벨 플레이어.

    흑마법사는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간단한 주문만으로 박살을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정혁이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운에 모든 것을 맡길 리도 없다.

    엘라와 있던 곳에서 알림 창이 떴었다.

    ‘이곳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크리스탈이 가진 힘은 얼마나 될까.저번의 맹독염화보다 훨씬 강력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해. 분명 저 흑마법사와 가까워지는 순간 ‘채광모드’가 활성화될 것이고 이 근처의 모든 적들은 그날처럼 빠르게 삭제할 수 있겠지.’

    정혁은 굳게 믿으며 더욱 속도를 냈다.

    흑마법사의 손에 암흑 마법이 응집되었다가 화살 모양을 이루며 3갈래로 퍼져 형체를 이루었다.

    ‘3연 암흑 화살!’

    정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따위 마법 ‘한’이었다면 맞으면서 웃어 줄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끔찍하게 찢겨 죽을 수도 있다.

    제발,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흑마법사의 시전이 끝나고 화살이 3갈래로 정혁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정혁에게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자신의 속도와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가 느리게 느껴졌다.

    “제발! 이 망할 시스템아!”

    그의 고함 소리와 함께 ‘띵’ 하는 알람과 더불어 파란 화면이 눈앞을 가렸다.

    [조건에 의해 잠들었던 원석이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 반응합니다! 채광하시겠습니까? YN]

    “그래!”

    [채광에 앞서 주변의 위협을 제거합니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 마나가 정혁의 두 손에서 빛나더니 거대한 모루 망치 두 자루가 그의 손에 등장했다.

    ‘얼레? 그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당황도 잠시, 마치 그날처럼 자신의 몸이지만 자신이 컨트롤하지 못하는 느낌이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오른손에 쥔 붉은 모루 망치의 상부에는 원뿔 모양이 3개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고 가운데 검은 띠가 둘려 센터에 붉은 용의 문양이 눌린 모습으로 박혀 있었다.

    왼손에는 흰색의 모루 망치에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파직거리는 빛줄기가 잔잔히 일고 있었고 파란색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 망치 후면에 박혀 있었다.

    “전투용인가?”

    ‘말은 할 수 있네 그래도.’

    라고 생각하며 정혁은 자신의 몸을 알 수 없는 흐름에 맡겼다.

    자신에게 흑마법을 시전 했던 마법사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자신에게 순식간에 달려든 정혁에 의해 척추를 가격당해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이를 시작으로 하늬안에게 집중되었던 아크의 병력들이 갑작스러운 기세에 놀라 분산되어 갔다.

    하늬안 역시 계속해서 휘두르고 있는 검 사이로 정혁의 기합을 느끼고서 싱긋 웃었다.

    ‘하여간, 이상한 놈이야, 저거.’

    깊이 생각할 겨를은 없다.

    하늬안도 겨우 숨통이 트였을 뿐.

    최대한 치명상을 피하며 왈로에게 몇 개 받아 놓은 회복 스크롤을 통해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데미지를 보완하지 않았다면 벌써 사망에 이르렀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적들과 싸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때의 흑마법사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지만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아크의 전투 방식은 혼자서는 결코 오래 상대할 수 없는 무식하지만 단순한 필승 전략이기에 하늬안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었다.

    물론 아린에게 소중한 보석인 줄은 알고 있지만 왈로의 무기만 봐도 정혁의 능력이면 자신의 무기에게 어마어마한 능력을 부과했다가 다시 원상 복구시킬 수 있다.

    잠깐이겠지만 맹독염화만큼의 전설급 무기가 탄생할 수 있을 거고 그것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일격에 이곳의 모든 징그러운 적들을 베어 넘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잠깐만…!’

    순간 하늬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물론 검을 휘두르는 일을 멈추진 않았으나 아까 정혁이 물어봤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분명 정혁은 그녀에게 맨손으로 싸움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대도 절과 멸이 있거니와 검사인 그녀가 굳이 무투를 할 이유가 없어 당연하기 그럴 일 없다고 말하긴 했는데 하늬안이 생각해 보니 정혁이 무기를 제련해서 오려면 그에게 자신의 무기를 건네줘야만 했다.

    그렇다는 건 정혁이 그때처럼 이상한 공간에 들어가 무기를 바꿔 올 때까지 그녀는 맨손으로 이들과 맞서야 했다.

    맨손으로 저 끔찍한 몰골에 주먹질을 해야 했다.

    “끼야아! 죽어도 싫어!”

    왠지 모르게 기합이 더 들어간 하늬안이었다.

    정혁은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적들을 압살했다.

    오른손의 망치에서는 용광로의 불길만큼 뜨거운 열기가 휘두를 때마다 일렁이며 상대를 집어 삼켰고 왼손의 망치에서는 전류가 흐르는 물방울이 상대의 전신에 압도적인 전력을 관통시켰다.

    정혁은 이게 그냥 자신의 상태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울들은 사지가 분쇄되어 무너져 내렸고 흑마법사들은 점점 그들을 재생시키는 데 마나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자 하늬안을 상대하던 전사들이 일제히 빠져 정혁에게 달려들었다.

    그 덕에 하늬안의 움직임은 한결 더 편해졌지만 그 공백을 채운 것은 더 많은 일그러진 구울들뿐이었다.

    그것보다도 제발, 정혁이 자신에게 무기를 달라고 하지 않기를, 아니, 달라고 해 주기를, 아니 아니, 달라고 하지 말기를…! 에라이! 혼란한 마음속에서 그녀는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이제 정혁 쪽에 흑마법사들이나 구울은 없었다.

    불과 몇 분만에 그보다 월등히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과 소환된 몬스터들이 ‘삭제’당한 것이다.

    저쪽에서 전사 플레이어들이 달려오기 시작했지만 잠시의 공백에 시스템 창이 다시 정혁의 시야를 가렸다.

    [주변의 위협이 사라졌습니다. 채광하시겠습니까? YN]

    “채광 시작!”

    두 손에 묵직하게 환상적인 감각을 되살려 주었던 두 자루의 훌륭한 모루 망치는 사라지고 이제 그의 손에 황금빛 곡괭이가 쥐어졌다.

    전사들이 다가오는 속도는 이제 그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려졌다.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는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만 같았다.

    곡괭이질 몇 번과 함께 구덩이가 파이고 그 안에서 넝마에 뒤덮인 시체가 나왔다.

    정혁은 그때부터 곡괭이를 치우고 손으로 주변을 파내기 시작했다.

    왜인지 몰랐다.

    그 시체가 뭐랄까, 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를 보호하고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상한 현상이다.

    오아시스는 게임이다.

    어떤 사체도 오랫동안 한자리에 머물 수 없다.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몇 분 이내에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이 시체는 마치 현실처럼 여전히 한곳에 묻혀 있었다.

    정혁으로서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시체는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초록빛 크리스탈이 박힌 목걸이였다.

    그리고 그에 공명하듯 시체의 목에도 역시 동일한 크리스탈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정혁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볼품없는 목걸이와 초록빛 크리스탈 2개를 발견했습니다. 전설급 보석의 발견으로 오아시스의 대장간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아린.’

    정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린은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정혁에게 달려오려는 제스쳐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서는 열댓명의 아크 전사들이 광기어린 눈으로 그를 참수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황금빛 마나에 의해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난 정혁에게는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었지만 이 순간에도 그에게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순수히 자신의 목숨을 생각하지 않는 아린의 마음이 작게 느껴진다.

    ‘아린.적어도 네게는 자신보다 더 너를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구나.’

    정혁은 씁쓸하게 다시 시체를 바라보았다.

    넝마 조각이 된 옷가지 사이로 여기저기 찔린 상처들이 다시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체의 얼굴을 들어 크리스탈 목걸이를 벗겨 올리고 시체가 손안에 힘껏 쥐고 있었던 또 다른 크리스탈 목걸이를 들었다.

    두 개의 크리스탈 목걸이를 쥐는 순간

    정혁의 마음속에 두 크리스탈 목걸이 주인이 경험했던 그들의 삶의 감정들이 밀려들어 왔다.

    옳지 않은 만남과 갈등, 그리고 결심과 사랑.

    그 결과 태어난 생명.

    발각되고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야 했던 순간.

    사라진 남편과 남겨진 아이.

    아이에게 반드시 보여 주고 싶었던 아이의 본향.

    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죽음.

    남겨진 남자.

    마지막 순간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아이와 아내의 마지막 유품.

    치열한 싸움과 끝.

    [소환하시겠습니까? YN]

    다시 한번 시스템의 알람이 정혁의 시야를 가렸다.

    굳이 이렇게나 상세히 이들의 마음을 알아야만 할까.

    먹먹한 마음이 송곳처럼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래야만 더 완벽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건가?’

    정혁은 다시 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래.이건 하늬안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했던, 그걸 반드시 알려 주고 싶었던 너의 부모가 네게 남긴 유일한 선물이야.’

    “소환해.”

    정혁은 황금빛 마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아린은 당황했다.

    방금까지 그의 앞에 있었던 정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그에게 경고를 보내려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방금까지 정혁이 있던 자리에 우르르 쏟아진 전사들의 기술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들의 씩씩거림 속에 목표가 자신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이었다.

    “으아아아!”

    아린은 냅다 뒤로 돌아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사 하나가 붕 뛰어서 아린의 앞에 지면을 울리며 착지했다.

    아린의 얼굴이 사색이 됐지만 그럼에도 손에 쥔 단도를 집어던지진 않았다.

    한입거리도 안 될지언정 포기하고 죽음을 맞진 않을 것이다.

    아린은 굳게 다짐했다.

    “하여튼 간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싸가지야!”

    그 순간 하늬안이 고함을 내지르며 아린 앞에서 그를 위협하던 전사를 반으로 갈랐다.

    그녀는 충분히 지쳐 보였다.

    하늬안은 순식간에 사라진 정혁 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아마 자신의 대검을 가지고 갔을 텐데.

    끔찍한 시간이겠지만 그때처럼 어떻게든 맨손으로 5분 정도 버텨 준다면 그 이상의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자.반드시 돌아올 거야.’

    정헉이 이 상황에서 아린까지 두고 갈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라는 자그마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늬안 혼자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모르긴, 무조건 사라졌겠지.’

    “아린아, 너 뭐 할 줄 아는 거 없…겠지?”

    하늬안이 지친 얼굴로 겨우 미소를 띠며 아린에게 물었다.

    아린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네….아는 마법 같은 것도 없구요.”

    하늬안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괜찮아. 누나 곁에만 딱 붙어 있어. 그 자식이 오면 다 해결될 거야.”

    하늬안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곱씹어 봤다.

    시간이 지나고 좋으나 싫으나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비상식적인 대장장이 따위에게 자신의 미래까지 맡기게 되었다.

    물론 저변에는 제논의 기사단 길드 자체의 이익을 위함이라는 마음도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왠지 그가 돌아온다면 결코 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자. 그럼 아린아. 이제 우리 힘껏 버텨 보자. 나한테서 떨어지지 말구!”

    하늬안이 아린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바닥에 잠시 꽂아 넣은 검을 뽑아 어깨에 올려 걸치며 주변을 에워싼 적들을 바라보았다.

    “하, 여전히 더럽게 많네.”

    그녀는 다시 한번 기합을 넣고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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