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2화 (22/200)

◈22화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겨우 그들은 몸을 피했다.

“야, 근데 우리가 크리스탈을 찾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하늬안이 달리면서 물었다.

정혁은 하늬안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몰라. 가능성을 보고 가는 거긴 한데….”

“한데…?”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된다고 해도 기분이 좋진 않을 것 같아서.”

“무슨 개소리야?”

하늬안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녀에게 업혀 있는 아린은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고 경계 마법의 빈틈을 찾아 뚫으며 그들은 은행나무 군락지 초입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잘 들어. 분명히 그곳에도 아크의 병력들이 있을 거야.”

“얼마나? 윽, 난 구울, 그 시체 덩어리들하고는 싸우기 싫어.”

“왜?”

“징그러.”

정혁이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하늬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하늬안이 달리다가 정혁을 발로 걷어찼다.

정혁이 그대로 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아린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혁의 HP가 소량 닳았다는 경고창이 그의 눈앞을 잠깐 가렸다가 사라졌다.

정혁은 그러고 보면 이 빌어먹을 시스템은 그의 기분을 망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

“내, 내가 언젠간 네 검을 귀에 걸린 상태에서 원상복귀시키고 말겠어….”

정혁이 몸을 탁탁 털면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의 말에 하늬안은 코웃음을 쳤다.

“얼마 안 남았어요. 빨리 가요.”

아린이 둘을 재촉했고 그들은 다시 걸음을 이었다.

“하늬안, 맨손 전투는 좀 해?”

정혁이 달리면서 물었다.

“굳이? 이 두 녀석이 있는데 왜?”

“하게 될 수밖에 없을 거야.”

“절대 싫은데? 도망갈 건데?”

“아니. 아니, 아니.”

정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늬안은 어깨를 으쓱하곤 절대 그럴 일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가뜩이나 징그러운 시체 집합체들을, 그 역겨운 촉감을 느끼면서 맨손으로 싸워야 한다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건 싫었다.

‘대도 절과 멸이 있는데 굳이 그들과 맨손으로 싸울까.만약에 이 두 자루가 부러진다면 가차 없이 도망치고 말 테다.’

하늬안은 굳게 다짐했다.

“이제 곧이에요!”

아린이 소리치자 순간 빽빽하던 은행나무 군락지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고 광활한 공터가 튀어나왔다.

경계 마법지대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는 하늬안이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일전 아린이 안토안이라고 이야기했던 소위 은행나무 엘프들이 적이나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장소라는 이곳에는 이미 처형당한 수없이 많은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의 시체와, 시체를 밟고 기괴하게 서 있는 구울들, 공중에는 까마귀 편대의 대형 까마귀였던 것들이 뼈대만 남아 재창조된 본 크로우, 그들을 지휘하는 아크 제국의 흑마법사들과 전사들이 산개되어 있었다.

‘그렇구나.엘라를 잡기 위해 튀어나왔던 그렇게나 많던 구울 무리는 이미 이곳에서 한 번 수집되었던 것이었구나.’

게다가 두 흑마법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병력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어차피 이들이 합류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테고.

“젠장….”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적 앞에 그들은 위축되었다.

하늬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정혁에게 말했다.

“…튀어야 되지 않을까?”

“사면초가잖아.”

“그래, 하긴 어디로 튀겠냐.”

하늬안이 아린을 내려놓고 귀걸이를 풀어 양손에 쥐자 거대한 대도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너 이거 내구도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정혁이 하늬안의 검을 보면서 말하자 하늬안은 이빨을 깨물고 대답했다.

“너한테는 죽어도 안 맡길 거거든? 어차피 안 튈 거면 저리 짜져 있어.”

‘하여튼 성격하고는.’

그러나 정혁은 알고 있다.

이건 100% 객기다.

하늬안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구울들에게 취약해 보인다.

아마도 징그럽다고 대답한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전투에 있어서 심리적인 요소는 승패에 상당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전력에서도 상당히 밀리고 있는데 심리적으로도 부담을 안고 있다면 이번 싸움의 결과는 뻔하다.

“이제 말해 봐.”

하늬안이 검을 휙휙 돌리더니 고쳐 잡았다.

“이곳까지 죽을힘을 향해 달려온 이유가 뭐야?”

정혁은 아린을 바라보았다.

아린은 어느새 작은 단도를 꺼내 손에 쥐고 있었다.

오히려 아린의 눈 속에 두려움이 없었다.

녀석은 저들이 밟고 있는 저 땅 아래 어머니의 크리스탈이 있다는 사실 말고는 중요한 것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어머니의 유일한 흔적이 있는 곳을, 가슴 아픈 그 장소를 겨우 찾아왔는데 저들이 이곳을 더럽히고 있으니 바삐 저들을 치워 버리고 싶으리라.

‘그러고 보면 저 꼬맹이도 이렇게 결의를 다지고 있고 하늬안도 내키지 않는 싸움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나는 뭐지? 물론 아까 떴던 안내 창 메시지를 통해서 어느 정도 다음 플랜이 짜여 있긴 하다만 일단은 여기서 살아남아야 뭘 하든 할 거 아냐.나 참, 돌아 버리겠네.’

“진짜 돌아버리겠네.”

하늬안이 정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야. 싸가지.”

오랜만에 그녀가 정혁을 ‘싸가지’라고 불렀다.

“첫 만남도 거지 같았고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긴 한데, 그래도 미운 정 정도는 들었다고 생각하거든? 네가 우리 길드에 도움을 준 것도 있고 나도 목숨을 빚져서 여기까지, 지금 이 빌어먹을 상황까지 왔는데 다음을 이야기해 줘야 내가 지푸라기라도 잡을 거 아냐.”

눈앞의 적들은 금방이라도 그들에게 달려들 듯했다.

하늬안은 그들을 주시하면서도 정혁에게 어떤 답을 원하는 것 같았다.

정혁이 말을 주저하자 하늬안이 재차 말했다.

“내가 도돈치아에서 개 같은 일을 겪어서 그래. 너, 그거 할 수 있는 거지?”

“뭐?”

“무기 말이야.”

정혁은 하늬안의 통찰력에 놀랐다.

“목적은 저 은행나무 엔트였다며, 그런데도 아린을 재촉해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하늬안이 아린을 흘깃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걸로 뭘 해 보려는 거 아냐.”

맞다.

지난 키메라의 전투 때처럼 오아시스의 대장간을 열 수 있는 조건부 스킬이 활성화될 것이다.

이전의 안내창과 동일한 경우기 때문이다.

소유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는 보석이 희귀하지 않을 수 없다.

붉은 수정처럼 전설급 재료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안내 창 역시 떴겠지.

“야, 근데 그거 하지 마라.”

“?”

정혁이 다시 하늬안을 바라보았다.

“그거 쟤 거잖아.”

그녀의 말에 정혁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그럼 무슨 지푸라기를 잡고 싶은데? 지금 상황에?”

정혁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지랄. 꼬맹이 거 뺏어서 뭐하냐. 내가 바라는 건 저 녀석이 자기 엄마 물건을 되찾는 거야. 선한 목적, 그것을 통한 기적! 그걸 믿자구.”

“무조건 죽을걸?”

정혁이 하늬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넌 알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이라는 놈과 싸워서 살아남은 여자라 이거야.”

하늬안이 인상을 구기면서도 자랑스레 말했다.

‘내가 봐 준거야, 이 자식아…….’

정혁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코앞까지 밀어붙이고 베고 넘기면서 싸우는 게 내 스타일이라 저딴 역겨운 놈들과 한판 붙는 건 죽어도 싫지만. 내가 제논에서 배운 건 할 땐 해내는 의지야. 해낸다는 의지!”

하늬안은 눈빛을 빛내면서 의지를 다지는 듯했다.

“아린아. 부탁 좀 하자. 너 네 어머니 크리스탈 찾으면 그거 좀 빌려도 되겠냐?”

“빌린다니요?”

하늬안의 따가운 눈총이 뒤통수에 꽂혔지만 정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린에게 대답했다.

“다 생각이 있어, 당장에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번 전투만 잘 버텨 내면 반드시 원상 복구시켜 줄게.”

은연중에 아린에게 약속했던 것이 떠올랐다.

왜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녀석에게 크리스탈을 찾아 줄 거라고 했으니까.

하늬안이 짜증나게 하긴 했어도 이 순서가 맞는 거다.

그때 왈로의 무기를 재구성하고 나서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했던 것처럼 제발 저 크리스탈이 그런 역할을 해내 주기를 바랄 뿐.

지금 이 전력으로 저들과 싸운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말도 안 된다.

“뭔진 모르지만… 일단 알겠어요. 오히려 여기 함께 있어 줘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정혁은 다시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아린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엘프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 속에 어쩌면 감춰져 있었을 아린 본연의 성품이 지난 여정을 통해서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진흙탕에서 핀 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래! 씨바. 뭐라도 어떻게 해 보자!”

하늬안이 기합을 넣는 정혁을 보면서 헛웃음을 치고는 그를 뒤로 밀쳐 내며 앞으로 내달렸다.

“무기도 없는 대장장이 나부랭이는 빠져, 너도 꼬맹아!”

그녀는 순식간에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맹렬한 고함]

- 개인의 숙련도에 비례하여 신체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킵니다.

- 인원의 제한 없이 주변에 있는 적의 전투력을 일정 수준 떨어트립니다.

적들은 당신을 바라봅니다.

하늬안의 고함이 다른 때보다 더욱 강하게 사방을 울렸다.

아린 역시 그 기합에 반응하듯 검을 굳게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정혁은 급히 녀석을 붙잡아 세웠다.

“자 자, 진정하고!”

“네? 아니, 지금 하늬안 님 혼자!”

“우리에게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 집중해 봐, 크리스탈! 그게 어디에 있는지!”

“저들을 물리쳐야 찾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아린! 날 믿어! 가장 중요한 건 그거야, 네 어머니의 크리스탈!”

‘제발! 그게 돼야만 다음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구, 이 꼬맹아!’

정혁이 진심 어린 눈으로 아린을 바라보자 아린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하늬안의 고함 소리와 구울들의 괴상한 비명들, 그리고 아크의 전사들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단 몇 분이지만 몇 시간은 지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하늬안 역시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적들과 섞여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저 흑마법사 아래인 것 같아요.”

아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끊임없이 시체들을 재조합하고 있는 흑마법사가 한창 마법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많은 병력들이 하늬안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다가가려면 지금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확실한 거지?”

아린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정혁은 허리를 몇 번 풀어 주고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는 흑마법사를 향해 달려 나갔다.

정혁이 믿을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때, 그 키메라 때와 같은 스킬 활성화가 발동하기를.

마치 전성기 시절의 자신의 모습과 같았던 기적 같은 채광 과정이 이루어지기를!

밑져야 본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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