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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21화 (21/200)
  • ◈21화

    실로 경이로운 생명체가 아닐 수 없다.

    오아시스에서 엔트가 인간화한 모습을 본 플레이어가 몇이나 될까? 그뿐만 아니라 이 생명체와 경합할 수 있는 이는 또 몇이나 있었을까?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압도되는 기운을 로디아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기뻤다.

    “웃어?”

    그녀는 다시 한번 로디아의 코앞으로 날아들어 반대쪽 뺨을 후려갈겼다.

    젠이 미쳐 막을 새도 없었다.

    로디아는 그대로 날아가 은행나무 두세 그루를 박살내며 바닥에 처박혔고 젠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초록빛 아우라가 호흡을 가쁘게 만든다.

    이것이 진정 엘라의 힘이란 말인가.

    젠은 탄식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즐거워하는 것 같은 로디아의 기운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얘.”

    젠의 앞에 엘라가 섰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노란색 단발이 아름답게 찰랑이고 하이 엘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피부와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초록빛 눈동자는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마치 나뭇결과 같은 무늬가 그려진 갈색 가죽 재질의 상하의와 갈색 구두까지 완벽에 가까운 생명체다.

    더불어 주변을 침묵하게 만드는 마나의 흐름은 온 신체가 경고를 보내는 듯하다.

    “주둥이 안 여니? 대답이 없네?”

    젠이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말씀하시지요, 고, 고귀한 자여.”

    “고귀한 자여?”

    그녀가 피식 웃는다.

    그와 동시에 아래에서 나무뿌리가 위로 치솟아 올라와 젠의 전신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포박된 젠이 황급히 눈동자를 굴려본다.

    마나를 모아 봐도 반응하지 않는다.

    “이런 거 잘하더만. 당하니까 어때?”

    엘라가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서 젠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한다.

    나무뿌리가 점점 압박을 더해 온다.

    - 뿌득, 뿌드드득

    “크아아아악!”

    젠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팔과 다리가 천천히 비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엘라의 주변으로 보랏빛 마나가 응집하기 시작했다.

    “얼레?”

    엘라는 로디아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면서 주변의 보랏빛 마나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건드려 상쇄시켰다.

    “안 죽었어?”

    “아, 아쉽게도요.”

    그 순간 로디아가 있던 곳에서 악마의 손과 같은 것이 길게 튀어나와 엘라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서서히 어둠 속에서 로디아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의 발아래에서는 마법진이 활성화되고 꺼졌던 붉은 안광이 더 강렬하게 타오른다.

    여전히 입가엔 징그러운 미소가 번져 있다.

    어디선가 로브가 날아와 자연스럽게 그에게 걸쳐지고 후드가 깊이 그의 얼굴을 가린다.

    어둠 속에 잠긴 로디아의 얼굴엔 이제 붉은 안광만이 보일 뿐이다.

    엘라는 자신보다 높이 떠 있는 로디아를 올려다본다.

    ‘인간들이란.’

    인간들의 오만함은 항상 이런 식이다.

    나무는 늘 재료의 삶을 살았다.

    발이 달린 생물들은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지만 나무는 그럴 수 없다.

    이미 내린 뿌리를 들고 일어서는 것은 애초에 나무들에게 허락된 섭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무는 재료가 되도록 허락된 것일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다만 저 간악한 무리들이 나무들의 몸을 태우고 썰고 다듬고 가공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좋은 것들을 만들 줄 안다는 것이 문제일 뿐.

    엘라는 주변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증오와 분노를 키웠다.

    지금의 군락지보다 훨씬 더 많은 군락들이 카탈 대륙 내에 있었지만 이제는 이곳뿐이다.

    더 이상 바람에 날아오는 은행잎을 통해 전해 듣는 흥미진진한 동료들의 이야기는 없다.

    사고를 가진 엔트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들은 스스로 나무 그 이상이 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아파서였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묵인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엘라는 단지 그것이 싫어서 그 오랜 세월을 자신 안에 자연의 마나를 담아냈다.

    어떻게든 이 비합리적인 삶을 바꿔 보고 싶었다.

    어느 날 그녀는 움직일 수 있었고 어느 날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또 어느 날 그녀는 그녀 스스로의 모습을 바꿀 수도 있었다.

    다만 이렇게 큰 힘을 사용하면 오랜 시간을 잠들어야 했다.

    사실 지금의 그녀는 몇 년 전 어떤 남자와의 결투 이후로 완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태다.

    당시 꽤 오랜 시간을 엘프화하여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남자와 사력을 다해 싸웠고 결국은 군락을 지켜 낼 수 있었다.

    그것도 승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직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해도 악한 기운을 펼치고 있는 저 흑마법사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엘라가 그를 따라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그녀의 발에 무언가가 휘감겼고 버틸 수 없는 힘에 끌려 엘라는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어둠과 안개, 먼지구름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제 소개를 올리지요, 고귀한 자여.”

    공중에서 로디아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엘라는 곧바로 땅을 딛고 일어서 마나를 모아 사방으로 퍼트렸다.

    주변이 빠르게 정화되어 가다가 강력한 어둠의 장막 앞에 부딪친다.

    그 장막 앞으로 단단한 발이 등장한다.

    마치 커튼을 걷어 내듯 정리되지 않은 손이 불쑥 등장했다가 장막을 걷으며 앞으로 모든 몸을 드러낸다.

    “저는 아크 제국의 3군 사령관 로디아 제로니막스입니다. 당신의 앞에 그는 아시겠지요?”

    로디아의 이죽거림이 이어진다.

    참을 수 없다는 듯 흥겨워 보인다.

    어둠 속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악마였다.

    그것도 군주급의 악마.

    엘라가 치를 떨기 시작한다.

    “제로니막스…!”

    자연 파괴자 악마 군주 제로니막스.

    마치 양의 뿔처럼 말아진 뿔에 흰자는 존재하지 않는 검은 눈동자, 뱀의 혀와 땋인 머리카락.

    그 어떤 갑옷도 입지 않았는데 이는 마치 단단한 그의 몸과 덩치가 스스로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을 반증하는 것과 같다.

    악마 특유의 보랏빛 피부와 더불어 손 마디마디에 흉물스럽게 튀어나온 뼈들이 마치 아대를 차고 있는 것 같다.

    길게 뻗은 꼬리의 끝에는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이 부푼 초록빛 포자 주머니가 달려 있다.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키의 위용.

    그리고 불쾌한 웃음과 손을 비비는 제스처.

    엘라는 그런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곧바로 돌진했다.

    “어이, 로디아!”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엘라의 초록 마나에 감긴 주먹을 한 손으로 막아 내며 군주 제로니막스가 로디아를 올려다보았다.

    로디아는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며 대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오랜만에 나들이에 손님이 너무 거창한 거 아니냐?”

    제로니막스는 그녀를 막고 있던 손을 비틀어 엘라의 돌진을 빗겨 피하고는 몸을 두 바퀴 돌려 그녀에게서 멀리 착지했다.

    그가 주먹을 두둑거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대가가 상당할 텐데 괜찮겠어?”

    제로니막스가 빙글거리며 로디아를 바라보았다.

    안광은 여전히 현현했지만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그였다.

    “마음껏 뛰놀 수 있게 버텨 보라고!”

    강한 폭발음과 함께 제로니막스가 순식간에 앞으로 공기를 차 엘라가 있는 곳까지 튕겨지듯 다가가며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의 주먹은 거의 엘라의 얼굴만 했다.

    엘라는 몸을 틀어 피해 내고 오른손을 공중에 휘둘렀다.

    그러자 아래에 떨어져 있던 무수히 많은 은행나무 잎들이 마치 파도처럼 날아와 제로니막스의 온몸을 덮쳤다.

    “잎창”

    엘라의 주문과 함께 하나의 소용돌이가 되어 완벽히 갇히게 된 제로니막스를 향해 사방에서 은행잎이 각각의 독특한 창의 모양을 이루더니 곧바로 관통하듯 날아갔다.

    그의 몸으로 열댓 개의 창이 관통되어 보랏빛 핏방울을 뚝뚝 떨어트렸고 로디아는 입에서 붉을 피를 왈칵 쏟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즐거운 듯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창은 다시 은행잎이 되어 사그라들었다.

    제로니막스가 기합을 불어 소리를 치자 그를 두르고 있던 은행잎 소용돌이도 완전히 파쇄되었다.

    “역시! 여억시!”

    희희낙락한 제로니막스의 표정에 엘라는 이를 갈았다.

    ‘저 여유로운 표정.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경멸스러운 표정!’

    인간들의 마음에 깃든 악을 더욱 강렬한 욕망으로 바꾸는 타락한 종족 악마에게 휘둘려 꽤 오래전 인간들은 대륙의 모든 자연과 적이 된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전쟁의 불길로 바뀌었고 바야흐로 모든 대륙의 모든 종족들이 편을 나누어 사력을 다해 싸웠던 대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오아시스 역사상 대륙의 존재들이 주가 되었던 첫 번째 대전쟁.

    이를 통해 왕국, 제국, 연맹의 개념이 생기고 인간을 제외한 종족들도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 응집하기 시작했으며 평화라는 위장된 가치 속에 야욕을 숨기며 오아시스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얼음판 위의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때 엘라가 알고 있던 엔트들이 거의 전멸했고 선봉에는 저 악마 제로니막스가 있었다.

    그는 유난히 생기의 색이라고 여겨지는 초록을 싫어했다.

    어쩌면 그녀가 그 당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은행나무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언제나 웅장히 서 있었던 그녀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던 여러 엔트들은 그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모두들 지금의 그녀와 견줄 만큼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너무 아쉬운데?”

    다시 제로니막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주먹이 휘둘러질 때 마다 공기를 찢는 폭음이 이어졌다.

    그것을 피해 내면서도 엘라 역시 틈틈이 반격을 가했다.

    엘라와 제로니막스는 그렇게 서로 뒤엉켜 눈으로 쫓아가기도 어려운 사투를 이어 갔다.

    “뒤져 이 새끼야!!!”

    엘라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여전히 여유 있는 쪽은 제로니막스였다.

    “뭐 피차 비슷하지? 나는 저 하수인에게 너는 이곳의 은행나무들에게 힘을 전달받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나!”

    순간 제로니막스가 빈틈을 치고 들어가 엘라의 정수리를 내리 찼다.

    엘라는 충격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다가 다시 한번 중심을 잡고 버텨 섰다.

    하지만 제로니막스는 이미 6개의 암흑 구체를 공중에 뿌려 올린 뒤였다.

    6개의 구체는 공중에서 몇 번 회전하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곧 군락지 주변으로 떨어졌고 폭발했다.

    엘라가 고통에 차 비명을 질렀다.

    폭발이 다가 아니었다.

    대지는 그대로 보랏빛 액체에 뒤덮여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엘라는 점점 이성을 잃어 갔다.

    로디아는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아 냈다.

    계속해서 울컥거리는 핏덩이들이 쏟아졌지만 아직 더 참을 수 있었다.

    즐거웠다.

    ‘보고 싶다!’

    ‘한이라는 인물도 이기지 못했던 저 고대의 잔재를 내 힘으로 이겨 보고 싶다.더불어 완벽하게 타락시켜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연구하고 싶다! 뜯어내고 싶다! 고운 살결 하나하나까지 모두 표본으로 삼고 싶다!’

    그의 야욕은 곧바로 제로니막스의 힘에 강한 영양분이 되었다.

    제로니막스 사고마저 훌륭한 자신의 하수인의 의지 덕분에 더욱 신이 나고 있었다.

    “오래 살았잖아? 미련은 없고?”

    제로니막스가 폭발하고 있는 엘라를 바라보면서 그녀를 조롱했다.

    엘라는 그와 동시에 입을 꾹 다물고 제로니막스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잠시, 엘라의 마나가 잔잔히 퍼져 나갔다.

    오염된 대지를 넘어 은행나무 군락지 곳곳으로 자연의 마나는 스며들기 시작했다.

    정화였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대지를 정화해 나갔다.

    “그걸 유지하면서도 나와 싸울 수 있다는 거야? 건방지네?”

    제로니막스가 보랏빛 구체를 다시 응집해 더욱 거대하게 만들어 엘라에게 쏘아 보냈다.

    엘라는 눈을 감은 채로 구체의 위치를 정확하게 간파해 두 손으로 구체를 받아 손안에서 작게 압축시켰다.

    엘라는 구체의 힘을 상쇄시키려 했지만 제로니막스는 히죽 웃으면서 손가락을 튕겨 구체를 터트렸다.

    엘라는 맥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엘라!”

    정화되고 있는 대지에서 누군가 그녀를 부른다.

    추락하는 엘라를 지상에서 가까스로 받아 낸 그가 엘라를 바라본다.

    정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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