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20화 (20/200)
  • ◈20화

    엘라의 분노는 외부의 공격에도 아랑곳없었다.

    하늬안은 넋이 나간 아린을 들쳐 메고 정혁이 뛰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위급한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는, 믿고 싶지 않은 그의 능력을 다시 한번 믿어 보기로 한다.

    공중에 산개되었던 노란빛 은행나무 잎이 순식간에 발열한다.

    노란색 섬광이 되어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늬안은 급히 아린을 앞으로 던졌다.

    아린이 두 바퀴를 뒹굴며 아래로 떨어졌고 정혁은 당황해서 걸음을 멈췄다.

    [은행잎 섬광]

    정혁이 ‘한’이었을 때 익히 경험해 봤던 스킬이다.

    공중에 흩뿌려진 은행나무 잎은 하나 하나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

    엘라의 의지가 담긴 나뭇잎들은 일제히 엘라의 명령에 따른다.

    재앙급 스킬이지만 엘라의 무기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하늬안 역시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두 검을 등에서 재빨리 꺼내 허공으로 포효를 내뱉는다.

    [포효의 오라]

    - 시전자 주위에 음파가 기반이 된 보호막을 펼칩니다. 10초간 유지됩니다.

    정혁의 근거리에 음파 장막이 펼쳐진다.

    하늬안의 두 손에 강한 힘이 쏟아졌다.

    아무리 보호막이라고 해도 엘라의 전투력 앞에서 추가적인 방어 수단 없이는 온전히 그들을 보호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잔인하게 긴 10초가 흘렀다.

    보호막을 뚫고 들이치는 은행나무 잎들을 두 검으로 쳐 내면서 하늬안은 이미 몇 군데 베이고 긁혔다.

    정혁은 언제 구했는지 방어 마법이 부여된 망토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아린과 함께 덮고 숨어 있었다.

    배신감…! 그래도 한편으론 그들이 주 목적이 아니었기에 큰 데미지는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한차례 섬광이 구울들이 튀어나왔던 곳으로 밀려들어왔다가 마치 터지듯 공중으로 분산되었다.

    그제야 엘라의 고함이 멈췄다.

    [아퀴르! 델! 두에르다!]

    이때 정혁은 아차 싶었다.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를 자신이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한’이었을 때 뒷골목 왕 서방의 주리를 틀어서 얻었던 ‘만능 언어 해독기’.

    이로 인해서 몇몇 오아시스에서 자동으로 번역해 주지 않는 언어들까지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당연히 ‘만능 언어 해독기’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엘라하고 어떻게 대화를 해야…?’

    정혁은 전투고 나발이고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모멸감에 함께 덮었던 망토를 걷어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 진짜!”

    하늬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망토를 걷어찼다.

    ‘방어 마법까지 둘러져 있어서 본인이 아니면 꽤 무겁게 느껴졌을 텐데 역시 무식한 여자.’

    “이, 이 정도는 내가 충분히 막을 수 있거든!”

    ‘‘아, 그러기엔 너 피가 좀 많이 나는데…….’라고 말했다가는 하늬안보다 내 피가 더 많이 나겠지.어찌되었건 그건 나중 일이다.’

    일단 아크의 군대와 엘라 사이의 전투는 당연히 길어질 거라고 믿고 일단 달린다.

    ‘저곳에 엘라를 도울 키가 있을 거야.’

    “아린! 정신 차리고! 나침반 안테나 얼른 단단히 세워!”

    정혁이 아린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소리쳤다.

    하늬안은 인벤토리에서 치유 물약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벗어나자, 최선을 다해 달리는 거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그곳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아린이 지속적으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들의 뒤로 어마 어마한 굉음이 그들을 잡아먹을 듯 쟁쟁히 퍼지고 있었다.

    ***

    “생각보다 강하군요.”

    검은 후드 안으로 번뜩이는 붉은 안광의 남자가 자신만 한 길이의 검은색 지팡이를 쥐고 언덕 위의 앞으로 튀어나온 암석에 서 있다.

    그의 곁에서 머리까지 후드를 눌러 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남자가 한마디 했다.

    그들의 주변으로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수없이 많은 광전사들이 흉터투성이의 상체를 그대로 내놓고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노란색 물결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달려드는 구울 떼를 가벼이 막아 내고 있었다.

    “너의 생각이 잘못됐다, 젠.”

    붉은 안광의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검은 후드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도돈치아의 상황은?”

    그의 물음에 젠이 로브 안에 넣었던 손을 펼쳤다.

    앞으로 보라색의 마법진이 그의 손동작과 함께 펼쳐지더니 이내 먼지처럼 흩어졌다.

    “도돈치아의 전세는 여전히 비등합니다. 그러나 곧 우리 쪽으로 기울 테지요. 은행나무 왕국 핵심 전력인 까마귀 전투병들을 우리 쪽 키메라 특공대들이 거의 대부분 정리한 것 같습니다.”

    젠이 마치 모든 전세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상세히 그에게 보고했다.

    “글쎄, 도돈치아가 수복되어서는 썩 유쾌하지 않겠구나.”

    젠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아크 제국의 3군 사령관 로디아 님께서 은행나무 엘프 영토의 전체를 손에 쥐시는 겁니다.”

    “설레발은 금물이다, 녀석의 빌어먹을 웃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니. 나는 오늘 반드시 이곳에서 저 오만한 고대 엔트를 무너트려야겠다.”

    젠은 머릿속으로 징글징글한 대머리의 흑마법사를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로디아 님의 뜻대로…….”

    구울은 구울이다.

    신체가 조각나도 그들의 몸 안에 깃든 흑마법은 사라지지 않기에 조각나도 가능한 부위끼리 결합되어 오직 입력된 명령에 의해 달려든다.

    그러다가 스스로 다른 구울들과 합쳐져 상급 구울로 변화하기도 한다.

    이 변칙적인 전술은 상당히 까다로운 고등 마법에 해당하는데 아크 제국의 흑마법사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엘라 역시 지루한 전투를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다.

    신체에 큰 데미지를 입지는 않고 있지만 마치 귀찮은 날파리들처럼 이것들을 떼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로디아는 엘라의 심정을 알고 있다.

    저 오래된 나무에게는 패배라는 단어가 지워진 지 오래일 것이다.

    오늘 이 세계의 위대한 흑마법사인 자신이 아크님의 존재를 만방에 알리게 되리라.

    저 엔트의 죽음을 통해서.

    로디아가 지팡이를 공중에 던져 올리고 두 손 가득 보랏빛 흑마법을 담아 올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광전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비탈을 따라 달려 내려가기 시작한다.

    광전사의 행렬은 끝이 없다.

    로디아의 마법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곤 이내 구름의 빛깔이 어두워지다가 공중에서 검은 돌덩이들이 엘라의 주변으로 떨어진다.

    땅속에 스며든 검은 돌덩이들이 바닥을 긁으며 엘라 주변의 은행나무들에게 옮겨 붙는다.

    [기생석의 저주]

    - 고위 흑마법

    -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생물들에 기생해 시전자의 의지에 따르게 한다.

    엘라 주변의 20여 그루의 은행나무들이 기괴하게 비틀어지다가 뿌리를 스스로 끊어 내며 일어선다.

    엘라만큼의 거대함은 아니지만 은행나무 군락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나무들이었기 때문에 크기가 남다르다.

    엘라의 고함 소리가 다시 한번 군락지를 뒤흔든다.

    왠지 구슬프다.

    그 사이 각자의 무기를 쥔 광전사들이 엘라의 주변으로 달라붙기 시작한다.

    은행나무 잎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소용돌이처럼 엘라를 보호하지만 어마어마한 군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미 산산조각 난 은행나무 잎들이 바닥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엘라가 몸을 한 번 털자 사방으로 작은 알갱이들이 떨어진다.

    알갱이들이 떨어진 곳에서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나고 달려들던 광전사들이 공중으로 분해되어 튀어 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는 숙여지지 않는다.

    만약 이들에게 정신이 있었다면 엘라의 기세에 눌려 사기가 진작 짓눌렸겠지만 사고를 배제하고 오직 한명의 명령 아래 움직이는 광전사와 구울 무리들은 주변 상황 따위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엘라의 패배.

    엘라의 고꾸라짐만이 그들에게 입력된 명령의 전부인 것이다.

    “이제 곧…….”

    “네, 로디아 님.”

    로디아가 붉은 안광을 더욱 강하게 번뜩였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띄워졌다.

    무언가, 강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젠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몸은 전장 한가운데로 이동되어 순식간에 사방으로 마방진을 펼쳤다.

    거대한 보랏빛 막이 둥글게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엘라가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원형 보호막이 생성됐다.

    보호막에서 보랏빛 줄기들이 하나둘씩 뿜어져 나왔다.

    마치 사고를 가지고 있는 듯 보호막의 줄기들이 아크 제국의 병력들에게 달라붙었고 그뿐만 아니라 엘라에게도 접근하기 시작했다.

    구울과 광전사들은 더욱 거대한 광기에 휩싸여 덩치부터 전투력까지 급증하는 듯했다.

    엘라에게 다가오는 줄기를 은행나무 잎들이 계속해서 쳐 내긴 했지만 그때마다 줄기들은 둘 셋으로 분열되어 더욱 많아졌다.

    아래로는 뿌리를 갉아먹는 수없이 많은 미친 적들이, 위로는 각각의 가지들에 파고드는 보랏빛 줄기까지 사방에서 덮쳐 오는 공격에 엘라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로디아는 엘라를 지켜보면서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저 엔트와 대결했던 전설적인 존재 ‘한’.

    그의 데이터가 없었다면 은행나무 군락지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런 고대 엔트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은행나무 군락지에 모인 아크 제국의 병력만 오만 명이다.

    저 엔트 하나를 잡기 위해 사만 오천의 세뇌된 광전사 플레이어들과 구울 오천이 모였다.

    은행나무 엘프 왕국에 투입된 만 오천의 병력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중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전설적인 플레이어 ‘한’은 저 무식한 엔트와 단신으로 전투를 했다.

    그것도 비등하게.

    로디아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오직 ‘한’만이 보았던 그 장면을 이젠 그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의 실체를.

    엘라는 이제 거의 대부분의 가지에 보랏빛 줄기가 닿아 엮여 있었다.

    수족처럼 움직이던 모든 나뭇잎들이 더 이상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했고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 쌓여 있었다.

    물론 그만큼 많은 수의 구울과 광전사의 시체가 사방에 낭자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은 여전했다.

    계속해서 그녀의 뿌리를 자르고 넘긴다.

    엘라의 시선이 언덕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불쾌한 마나가 계속해서 감지된다.

    공중에 떠있는 저 불결한 플레이어의 마나 역시 불쾌하지만 훨씬 강대하고 더 강력한 마나는 언덕에 있다.

    저곳을 공격해야만 이 전투의 마지막 장으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머문 언덕에서 강력한 마나가 응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엄청나게 커다란 창의 모습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을 묶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했다.

    언덕 위에 길게 뻗은 창의 자루 쪽에 차원 문 하나가 열리기 시작하더니 차원 문에서 거대한 손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롱기누스의 창”

    거의 엘라 크기만큼 거대한 창이 차원 문에서 나온 어떤 괴상한 손에 쥐어지더니 그것이 천천히 뒤로 당겨졌다가 튕겨지듯 순식간에 앞으로 뿜어져 나간다.

    창이 앞으로 튀어 나가는 순간 마치 충격파처럼 강력한 파동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창은 정확히 엘라의 중심부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이 위아래 없는 새끼가.”

    - 짜악

    로디아는 자신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어떤 여인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으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로디아 님!!”

    롱기누스의 창은 허공을 갈라 저쪽 너머로 사라졌고 젠이 마법을 해제하며 로디아가 날아간 쪽으로 순식간에 워프했다.

    로디아는 붉은 안광을 거두고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는 젠의 부축에 몸을 일으키며 귀까지 찢어질 듯 끔찍한 미소를 지었다.

    “엘라…!”

    그들의 앞에는 노란색 단발을 하고 초록빛 마나를 두르고 있는 여린 피부의 여성이 갈색 가죽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공중에 부유한 채 서 있었다.

    “드디어.”

    로디아의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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