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9화 (19/200)
  • ◈19화

    정혁은 재빨리 하늬안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정혁의 힘이 통할 리가 없었다.

    하늬안은 달려드는 정혁을 가뿐하게 옆으로 밀치고서 계속해서 씩씩거렸다.

    “조, 조용히 해!”

    정혁이 작게 절규하듯 비명을 질렀다.

    근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리 없는 하늬안은 마음대로 고함을 쳐 댔다.

    행여 하늬안의 기척이 저쪽으로 전달된다면 어떤 봉변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사력을 다해 손가락을 입에다 마구 가져다 댔다.

    하늬안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지만 그녀의 눈에 섞인 증오와 원망은 더욱 불붙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근데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여기에 이미 도착해 있을 줄을.’

    아린이 그녀의 곁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하늬안은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 다시 정혁을 노려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는데?”

    “묻는 타이밍 하고는.”

    그녀의 날카로운 대답이 질문과 동시에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하늬안은 이곳에 도착한 지 3일 정도 지났다고 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편이긴 하다.

    물론 정혁이 아린과 함께 이동하느라 걸음을 못한 탓도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도착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그리고 곧 이 경계 마법 지대에 갇혔다.

    종종 공중을 날아다니는 까마귀 편대의 정찰을 피하고 마주치는 경비병들의 목숨을 빼앗으며 최선을 다해 버틴 것 같았다.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자력으로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하늬안은 정혁과 아린이에게도 우리가 오지 않으면 죽음밖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일찍 왔는데?”

    정혁의 물음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하늬안이 검을 들어 몇 번 돌리고 등에 다시 고정시켜 멨다.

    그리곤 정혁을 빤히 보다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아스칼이라고 자유 연맹에서 알아주는 무투 검사가 있어.”

    ‘알지, 아스칼.’

    아스칼은 정혁이 한이었을 때 필드에서 만났던 저렙 플레이어였다.

    친구가 검사가 좋다고 해서 검을 들긴 했는데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맨손 전투가 훨씬 좋을 것 같다고 했던 판금 갑옷 입은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멍청이였었다.

    ‘지금은 자유 연맹에서 활동하고 있구나.’

    “그 녀석과 함께 있던 마법사가 있었는데 그자가 죽었어.”

    “그런데?”

    “나 때문에.”

    “너 때문에?”

    그녀의 얼굴에 어두움이 드리웠다.

    자책감에 휩싸인 그녀였다.

    “나름대로 기본이 탄탄한 얼음계 마법사였는데 나를 도우려 왔다가 오히려 역으로 당하고 말았지. 나는 돕는다고 도왔는데 무기력했어. 이런 적은 정말 처음인데…….”

    “항상 이기면 네가 사람이냐.”

    정혁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뱉었다.

    ‘하긴 그 시절 나는 늘 이기면서 살았어서 공감이 되진 않네.’

    하늬안은 검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정혁을 쳐다보았다.

    원하는 게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어쩌면 내 무기가 문제일까?”

    어처구니.

    정혁은 작게 실소했다.

    “야, 장인이 장비 탓하는 거 봤냐?”

    정혁의 말에 하늬안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자책도 필요한 부분이다.

    어찌됐건 자신의 실수로 다른 사람이 현실 세계 기준으로 반년이나 플레이를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다시 복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자책에 빠져 있을 필요도, 또 괜히 무기 탓으로 돌리는 핑계도 필요 없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진하는 수밖에 없다.

    어디가 부족했고 어디를 보강해야 하는지.

    피부로 느끼고 움직여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기엔 정혁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적어도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는.

    “왈로에게 준 무기…….”

    ‘그럼 그렇지.’

    그녀의 탐욕스러운 눈망울.

    정혁은 잠시나마 하늬안이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고 오해했던 자신을 비난하며 하늬안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천천히 올려 보여 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린이 정혁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따라서 두 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보며 말했다.

    “이건 무슨 인사에요?”

    정혁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늬안한테만 할 수 있는 인사야. 잘 지냈냐, 뭐 이런 거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늬안의 주먹이 날아든다.

    [소량의 HP가 소모되었습니다.]

    ‘망할….’

    어찌 되었건 정혁은 그녀의 주먹 덕분에 정신을 차리게 됐다.

    장난 칠 시간이 없다.

    정혁이 고개를 저으며 아린을 쳐다보자 아린이 그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직도 요동은 동일해요. 빨리 가 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같은데…?”

    “지금 이 소리 들려요?”

    정혁과 하늬안이 숨을 죽였다.

    주변의 소리에 집중해 본다.

    풀벌레 소리, 으슥한 숲 어딘가를 지나가는 동물 혹은 잡몬스터의 움직이는 소리.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는데?’

    “몰라, 무슨 소리?”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땅 밑의 무언가가 위로 뚫고 올라오는 느낌이랄까요?”

    아린은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맞아요!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동이 퍼지고 있어요. 엄청 강한 파동으로 울리고 있어요!”

    이건 분명 아엘프인 아린에게만 느껴지는 진동일 것이다.

    온전한 인간인 정혁과 하늬안에게는 아직 어떤 진동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혁이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엘라, 그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얼른 말에 타라. 하늬안 뛰어 올수 있겠어?”

    정혁이 하늬안에게 묻자 하늬안은 등 뒤의 무기 고정 상태를 다시금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했다.

    아린과 정혁이 말에 올라탔다.

    상황이 좋지 않다.

    크리스탈의 기운을 따라 경계 마법 지대를 파훼해 나가면서도 정혁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아크 녀석들의 기운이 얼마나 독하기에 군락지 초입 부분에 침범했다고 해서 그녀가 뿌리까지 들어 올린단 말인가.

    정혁이 ‘한’ 이었을 때 그의 기세에 밀리자 그제야 뿌리를 들어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던 엘라였다.

    그러고 나면 곧 인간형 정령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엔 정말 대화가 통하지 않는 수준으로 폭주할 텐데….’

    아린의 신호대로 그려 본 지도에서 안토안은 은행나무 군락지 초입, 그러니까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은 남쪽에서 북으로 가로질러 올라가며 은행나무 엘프 영토를 통과했고 지금 군락지의 남쪽에서 신호를 따라 북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 안토안에 도착하기 전에 뿌리를 들고 이동하고 있을 엘라를 먼저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것도 문제네.”

    정혁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우드벨로 신원을 보장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한’이 아니다.

    분노한 엘라를 만나게 된다면 하늬안은 아마 두세 합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아린이 아엘프이긴 하나 엘라는 순수한 엘프들에게 그나마 협조적일 뿐 아린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종이 쪼가리 같은 정혁의 몸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무수히 많은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시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땅이 울리는 것 같은 진동도 함께 느껴졌다.

    주변이 영롱한 노란빛으로 반짝이고 다른 나무들과는 두께와 퍼진 가지부터가 스케일이 다른 ‘나무’가 움직인다.

    압도.

    정혁은 이미 본적이 있는 광경임에도 완벽히 압도되었다.

    하늬안 역시 걸음을 멈췄다.

    “저… 저게 뭐야?”

    말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아린 역시 처음 보는 경이로운 광경 앞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아무에게도 엘라를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고 이런 이야기를 해 봐야 괜한 오해만 더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늬안은 아마 전설로 알고 있을 이야기.

    아린은 듣도 보도 못한 충격적인 현실.

    “은행나무지 뭐야.”

    정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는 말에서 내리고 아린이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말의 엉덩이를 때려 다른 곳으로 보낸 뒤 아직도 얼어 있는 하늬안을 툭툭 쳤다.

    “우린 저 녀석을 만나야 해.”

    그러자 하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혁과 자기를 손가락으로 번갈아 지목해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내가?”

    “왜? 자신 없어?”

    그의 말에 자존심이 약간 상한 듯 하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없다기보단…….”

    ‘없겠지.당연하지. 압도적이잖아. 엘라 앞에서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는 플레이어가 몇이나 되겠어.’

    “싸우자는 건 아니야. 저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최대한 젠틀하게 다가가 보자.”

    “나무한테 젠틀하게 다가가는 방법을 나는 배워 본 적이 없는데?”

    하늬안이 당황하며 말했다.

    타당했다.

    정혁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어쩌자는 거야 그래서.’

    “말장난은 집어치우고 빨리 가자. 지금 아크 놈들이 코앞에까지 와 있다고.”

    “아크으?!”

    하늬안이 두 번째로 놀랐다.

    ‘아, 이것도 말 안 했구나.오늘따라 커뮤니케이션이….’

    정혁은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간략하게 하늬안에게 전달했다.

    급히 경계 마법 지대로 돌입한 이유와 엔트가 이동하기 시작한 이유를.

    “그러니까 아크 제국이 은행나무 군락지를 타락시키려는 것을 막기 위해 저 말도 안 되는 엔트가 움직이고 있다는 거지?”

    “맞아.”

    하늬안이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듯 턱을 만지다가 정혁을 노려봤다.

    “너는 이번에도 특별히 놀라는 기색이 없네?”

    “허비할 시간이 없다니까. 일단 저 엔트를 멈춰야 해. 싸움으로 번지게 되면 답이 없어.”

    그의 말에 하늬안이 일단 알겠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곤 정면을 주시했다.

    문제는 저 거대한 덩치를 어떻게 멈추느냐는 것.

    이미 분노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멀리서도 느껴졌다.

    “아린아 너는 최대한 떨어져 있어야 한다. 크리스탈은 반드시 되찾을 수 있도록 해줄게.”

    정혁이 아린을 돌아보며 말했지만 아린은 넋이 나간 듯 그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강력한 폭발음이 정면에서 터져 나왔다.

    검은 불꽃 수십 갈래가 엘라에게 적중했다.

    육중한 몸이 충격과 함께 움직임을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암흑 마법이 뿜어져 나온 곳에서 수천의 엘프 구울들이 달려 나왔다.

    엘라의 전신에서 거대한 진동이 일었다.

    순식간에 공중이 엘라에게서 뿜어져 나온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어떠한 공격도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분노에 찬 몸서리였다.

    정혁은 숨이 턱 막혀 왔다.

    호흡이 어려울 정도의 증오가 엘라에게서 느껴졌다.

    뒤이어 하늬안의 포효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함 소리가 은행나무 군락지 전체를 뒤흔들었다.

    어마어마하게 깊고 서글픈 포효였다.

    엘라의 몸으로 역겨운 구울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구울들은 엘라에게 붙자마자 나뭇결들을 뜯어 헤치며 안으로 파고들었고 이내 하나씩 자신의 몸을 터트렸다.

    엘프 구울이 터지면서 오염된 피가 엘라의 전신을 적셨다.

    그럼에도 엘라의 포효는 계속됐다.

    지금.

    ‘우리가 이 전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일 좋은 방법은 엘라가 아크 제국과 부딪치기 전에 그녀와 독대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어그러졌다.

    전투는 시작됐고 쳐들어온 아크 제국의 병력들이 산화하든지 아니면 엘라가 죽든지 해야 전투가 마무리될 것이다.

    그들이 끼기엔 이미 너무 큰 불이 되어 버린 상황.

    [알람 : 멀지 않은 곳에서 오아시스의 대장장이가 탐낼 만한 보석이 감지됩니다!]

    순간 시스템의 알림창이 정혁의 시야를 가렸다.

    정혁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하늬안을 바라보았다.

    “하늬안!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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