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도돈치아의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다.
정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높은 산마루에 올라 도돈치아를 바라보며 고함과 고통의 신음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것을 작게 느껴 본다.
분쟁 지역의 역사는 오늘로 마무리 되고 어쩌면 아크 제국의 손에, 혹은 자유 연맹의 손에 귀속될지도 모를 일이다.
세 번째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 멀리 도돈치아의 동쪽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은행나무 엘프들의 본진 병력들이 공격받고 있다.
새삼 놀라운 것은 아크 제국의 성장이다.
‘한’이었다가 정혁이 되어 깨어난 사이에 흐른 시간이 3년이다.
3차 대전쟁에서 ‘한’이 전쟁을 종결시키고 무력으로 평화 협정을 맺게 한 뒤, 그가 사라졌다는 소식과 함께 두 차례의 전쟁이 더 있었다고 했다.
‘한’은 괴상한 종교나 신을 믿으라고 헛소문을 퍼트리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을 질리도록 싫어했다.
그래서 한은 특히 이런 악질적인 선동으로 세력을 키우는 자들을 찾아 색출하고 전멸시키는 일을 즐겨 했는데 당시에 죽음과 고통의 교단을 만들고 섬기는 자들이 카탈 변두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다만 너무 소수라 무시했다.
그러나 그 이단 종교 집단이 지금은 제국이 되었다.
아크 제국은 대륙 카탈의 13을 잡아먹고 적극적으로 남하하고 있다.
아크 제국은 흑마법사들의 성지가 되었고 강한 흑마법사들을 훈련시켜 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려 하고 있다.
정혁이 조금 전에 만났던 대머리 흑마법사도 빙구 같았지만 실력만큼은 하늬안을 충분히 웃돌 정도가 되어 보였다.
정면으로 자유 연맹과 도돈치아 자치 세력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동쪽 엘프 본진을 공격한다.
다행히 아린을 잘 빼돌렸기에 은행나무 엘프 왕국 영토 내의 은행나무 군락지까지 돌입하긴 변수가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겠지만 이 정도의 병력 산개 전략을 아랑곳하지 않고 펼친다는 것은 아크 제국 자체의 강함을 오아시스 전체에 드러내는 셈이다.
이 일이 곧 6차 대전쟁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
정혁은 말고삐를 돌렸다.
남쪽으로 충분히 돌았다.
산마루를 내려가서 다시 동쪽으로 길을 터야 했다.
아린은 도돈치아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싸움이 후에 어떤 일을 초래하게 될까요?”
아린이 물었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에드리아에게… 너무 심한 말을 했을까요?”
“마음 쓸 가치도 없어.”
정혁은 아린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멸족이라고 했잖아요. 멸족.”
아린은 고민에 빠졌다.
정혁은 아린을 바라보다가 말을 몰았다.
***
며칠을 달렸는지 모른다.
지나치는 몇몇 마을과 도시에서 그리폰 기수와 와이번 기수를 만나긴 했지만 날아갈 수는 없었다.
까마귀 편대와 마주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발견한 말이 꽤나 명마여서 꽤 오랜 시간 달려도 쉽게 지치지 않았고 정혁을 잘 따랐다.
카탈 전체의 시선은 지금 분쟁 지역 도돈치아에 집중되어 있다.
아직도 도돈치아에서는 접전이 벌어지고 있단다.
지나치는 여관들, 잡상인들, 행상인들.
음유시인은 벌써 도돈치아 전쟁에 대한 노래들을 부르고 도돈치아 방향으로 진군하는 몇몇 길드들의 행군과 공중을 가르는 다양한 비행 기수들의 긴박한 움직임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오히려 정혁과 아린에게는 기회였다.
아크 제국이 원했던 빈집 털이를 정혁과 아린이 할 수 있을 테니.
그나저나 켕기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하늬안…….”
깊은 밤,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영토 근처 동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정혁이 잠시 밖으로 나왔다.
전투원이 필요하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사실 진작 영토 내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기에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비전투원 둘이서 날고 기어 봐야 군락지 근처에 접근하기 전에 경계병에 의해서 발각되고 말 것이다.
‘발각이 된다 하더라도 이를 제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꼭 필요할 때만 없단 말이지.’
절대 하늬안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바득 바득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한’이었을 때 정혁이 그녀와 보낸 10일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늬안이 포효의 검사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한’ 덕분이었다.
과거 신명나게 하늬안을 괴롭히던 때에 하늬안은 자신을 죽일 듯 죽이지 않는 ‘한’에게 욕이란 욕은 다 뱉었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포효 스킬들을 터득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하늬안은 ‘포효의 검사’라는 최종적인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포효를 했다기보단 비명을 질렀다라는 표현이 더 맞긴 하다.
정혁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달맞이꽃을 꺾었다.
꺾이자마자 고개를 숙인 달맞이꽃에서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아린 표 나침반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의 말로는 이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경계 마법 지대가 펼쳐질 것이고 미로처럼 얽힌 마법지대를 통과하면 곧 베일에 싸인 군락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군락지에 들어가기만 하면 분명 엘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 똑같아 보이는 은행나무라 하더라도 엘라만큼은 다르다.
엘라는 군락지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날씨에 관계없이 항상 밝은 노란색의 잎을 간직하고 있다.
엘라의 자의가 아니라면 나뭇잎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엘라라고 불리는 고대 엔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계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은행나무 엘프 종족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녀를 만나 본 사람도 거의 없을 테고.
정혁은 문득 궁금했다.
오랜 세월을 살았던 고대 엔트 엘라는 과연 정혁을 알아볼까? 한의 모습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가 정혁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린이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초저녁에 잠들었던 아린은 눈을 비비며 정혁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뭔가 이상해요.”
“잠꼬대냐?”
정혁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아린이 작게 인상을 쓰고는 달빛이 내려오는 숲 사이의 공간을 찾아 그곳에 섰다.
그래도 엘프라고 어느 정도 자연과의 교감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상해요.”
“뭐가?”
아린의 목소리에 두려움과 걱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정혁은 느낄 수 있었다.
근처에는 어떤 기척도 없다.
그들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린은 무엇을 감지하고 있는 것일까.
“은행나무 군락지의 제 크리스탈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아린은 눈을 감았다.
보다 깊은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것 같았다.
“은행나무 군락지가…….”
“군락지가?”
정혁이 걱정스럽게 말하며 아린에게 다가갔다.
아린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 달빛이 서려 안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군락지가 공격받고 있어요!”
“야이씨!”
정혁이 고함을 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동굴에서 짐 챙겨!”
휘파람 소리와 함께 숲 속에서 말이 달려 나왔고 아린은 재빨리 동굴로 들어가 배낭 짐을 챙겨 메고 정혁의 것을 건네주었다.
“아크 놈들이야?”
정혁이 아린을 말 위에 올리며 물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크리스탈에서…….”
정혁은 아린의 말을 마저 듣지 않고 말 위에 급히 올랐다.
그리곤 고삐를 챘다.
말이 빠르게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크리스탈에서!?”
“크리스탈에서 제게 일정한 간격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군락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강해지던 신호가 갑자기 불규칙적이고 산발적으로 변했어요. 마치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변수를 계산해 봐도 정답은 아크 놈들 밖에 없었다.
안전하게 접근하려는 방법을 정혁에게 빼앗겼으니 무력으로 밀어붙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은행나무 엘프 왕국이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단 며칠 사이에 은행나무 군락지까지, 그들의 영혼의 안식처까지 빼앗길 수준은 아닐 텐데.’
은행나무 군락지는 왕국 영토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엘프 왕이 있는 도성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친화적인 엘프들이지만 문명이 섞인 그들의 삶에는 자연과 일정한 타협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손길도 닿지 않게끔 은행나무 군락지는 그들의 삶의 터와 거리가 떨어져 있다.
그래서 겹겹이 경계 마법지대를 펼쳐 놓고 미로화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도돈치아의 엘프 본진은 패배하여 후퇴했을 것이다.
아크의 입장에서 도돈치아를 자유 연맹에게 내주더라도 은행나무 엘프의 영토를 대신 차지할 수 있다면 그리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후퇴하는 은행나무 엘프의 병력들을 쫓아 그들의 영토까지 진입해서 왕국 도성을 포위했으리라.
거기에 전력을 나눠 군락지까지 진군했을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을 정신력을 지닌 그들이 영혼의 안식처인 은행나무 군락지를 향해 순순히 길을 내줬을 리가 없다.
경계 마법은 고위 마법사들의 마법으로도 쉽게 해제되지 않는다.
이 마법은 엘라의 고대 마법이 뒤섞여 있어서 지식이 기반 되지 않으면 결코 뚫지 못한다.
마법은 공식이다.
누가 더 복잡하고 어렵게 꼬아 놓았는지에 따라 그것을 해제하는 사람이 테스트를 받는다.
하물며 고대 엔트의 마법이 섞인 경계 마법지대를 감히 누가 쉽게 해제할 수 있을까.
“혹시…….”
정혁은 말고삐를 다시 채며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상상을 해 봤다.
아크 제국은 엄밀히 악마를 추종하고 있다.
악마들도 세력이 나뉘긴 하지만 대개 오아시스를 정복하고 싶어 하는 야욕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엘라라는 존재는 오아시스를 침범하고 타락시키기 위해 제거해야 할 핵심적인 목표일 수 있다.
엘라는 오아시스에 남은 몇 안 되는 엔트니까.
이들이 만약에 고위 악마를 소환할 수 있다면 고대 엘프의 마법을 해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진 않을 것이다.
은행나무 엘프들이 사력을 다해 막아도 생명력 자체를 착취하는 고위 악마의 암흑마법을 당해 낼 수 없다.
“진짜, 본캐마렵네…….”
정혁은 입맛을 다셨다.
“본…캐요?”
아린이 한마디 거들었지만 정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진짜 개판이 됐다.
정혁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깨달았다.
역시 세계에는 개망나니여도 모두를 짓누를 강한 자가 필요하다.
‘내가 없어지니 별의 별게 다 날뛰고 지랄이잖아.’
정혁은 이빨을 깨물었다.
‘당장에 힘은 없지만 엘라를 먼저 만나 설득을 잘 해 본다면 어떨까? 그녀가 나를 알아봐 준다면 좋겠는데.크리스탈이 있는 곳은 군락지의 초입 부분이라고 들었다.
안토안…이라고 했던가? 그곳에서부터 불안정한 신호가 들어오고 있다면 근접했거나 이미 그곳에 당도했다는 것이겠지.’
“이제 곧 경계 마법 지대로 돌입해요!”
아린이 소리를 쳤다.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은행나무 엘프의 마력에 의해 거대하게 펼쳐진 마법 지대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곳에 엮이게 된다면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혹은 은행나무 엘프들에게 발각되어 퇴출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혁은 아린 덕분에 미로처럼 얽힌 공간 사이사이에서 해답과 같은 틈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자, 잠깐만요!”
순간 아린이 정혁을 저지했다.
그들의 앞에 어떤 사람의 형체가 서 있었다.
두 자루의 대도, 달빛을 받아도 숨길 수 없는 붉은 머리카락.
“하늬안 님?”
아린이 반갑게 소리쳤고 정혁은 거의 폐인에 가까운 하늬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옷 여기저기 헤진 상태로 은행나무 엘프 경비병들과 여럿 전투를 치른 듯 주변엔 회수하지 않은 아이템들이 널려 있었다.
하늬안은 달려오는 그들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겁나 늦었잖아!”
그녀의 포효가 귓전을 때리며 요란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