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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17화 (17/200)
  • ◈17화

    에드리아의 어머니는 의식이 없었다.

    땅굴 안으로 은행밤에서부터 흘러들어 온 매캐한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에드리아는 사력을 다해 땅굴 위를 파 댔고 불행 중 다행으로 지반이 약한 곳을 건드려 흙 천장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무너지는 흙덩이 속에서 위로 뻗은 손을 누군가 잡았을 때 안도가 되기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러나 이내 아린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를 껴안았다.

    “아린!”

    “에… 에드리아?”

    그러나 곧 에드리아는 당황하는 아린의 곁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호흡은 하고 있지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은행밤은 화마에 휩싸여 있다.

    “아버지…….”

    에드리아가 은행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혁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평소 은행나무 엘프들의 행실과 더불어 아린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크게 불쌍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들을 구해 준 아린의 생각을 고쳐 주고 싶었다.

    “아린, 자리를 피하자.”

    정혁이 아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에드리아가 고함을 쳤다.

    “어딜, 저급한 인간이 엘프의 손을 잡아!”

    아린과 비슷한 나이의 어린 엘프였지만 그녀의 얼굴과 신체에서 풍기는 느낌은 웬만한 성인 엘프 못지않았다.

    그 ‘재수 없음’은 말이다.

    “역시는 역시.”

    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린은 정혁과 에드리아 사이에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정중히 정혁에게 말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정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만의 계산속으로 돌아갔다.

    “에드리아.”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에드리아를 아린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에드리아는 화가 난 얼굴로 아린을 쏘아보며 말했다.

    “긍지를 가져야지, 아린! 저런 것들과 같이 다닐 필요 없어!”

    아린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에드리아는 분함을 참지 못해 어깨를 들썩이다 차분한 아린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화를 삭혀 갔다.

    아린은 그녀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무 말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했다.

    “에드리아, 나는.”

    아린이 운을 뗐다.

    “나는 아엘프야.”

    “나도 알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너는 아엘프지만 엘프야. 엄연히 우리와 함께 생활했던 엘프라구!”

    “함께?”

    아린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함께라는 말을 써도 되는 거야?”

    아린의 물음에 에드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너희들과 함께가 아니었어, 에드리아. 그건 네 착각이지. 그렇다고 나는 저 남자와 같은 인간도 아니야. 나는 그저 아엘프일 뿐.”

    에드리아는 그동안 아린이 당했던 수많은 모욕들을 떠올렸다.

    그것이 정당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다 크게 되면 아린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었다.

    “나는 내 길을 떠날 거야. 이제는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으려고. 저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해.”

    “아린, 하지만!”

    에드리아가 아린의 팔을 붙잡았다.

    아린은 조용히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에드리아. 나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어. 은행나무 엘프들에게 내가 품은 감정은 무엇일 것 같아?”

    불타오르는 은행밤을 바라보며 아린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억울함, 증오를 넘은 경멸 그리고.”

    그리곤 큰 숨을 쉬며 마지막 단어를 뱉는다.

    “……연민.”

    은행밤을 휘감는 불길이 더욱 맹렬하게 타오른다.

    사람들 혹은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들이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정혁은 이를 눈치채고 아린에게 다시 다가왔다.

    “에드리아, 기억해야 해. 은행나무 엘프 종족 전체의 위기야. 우리는 우리의 틀을 깨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반드시, 반드시 멸족하고 말거야.”

    정혁의 손이 다시 아린의 팔에 닿았을 때 에드리아는 종전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내 연민이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야. 우린, 아니 너희는.”

    너희라고 말하는 순간 에드리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희는 반드시 멸족하고 말거야.”

    정혁은 다시 그를 잡고 뛰기 시작했다.

    에드리아는 멀어지는 아린과 인간을 보면서 또한 서서히 숨이 꺼지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의 생기를 느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옅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

    “멍청한 녀석.”

    정혁이 아린과 달리며 말했다.

    “우리는 이제 어떡하죠?”

    아린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되물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남쪽으로 남하해서 분쟁 지역을 빠져나가자. 그래도 일단은 자유 연맹 장악 지역을 통해 이탈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아까 그 흑마법사는 왜 저를 쫓는 걸까요?”

    쉴 틈 없이 아린이 물었다.

    정혁은 아까 자신이 내린 결론을 아린에게 전했다.

    “내 목적과 같은 거지.”

    “은행나무 군락지?”

    정혁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에서 이미 그들은 모든 출입구를 막아 놓았었다.

    만약 여관 내부로 들어가려면 분명 어딘가를 부쉈거나 혹은 마법을 이용했을 텐데 두 가지 방법 모두 하늬안이나 정혁이 낌새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 없이 내부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이미 그 녀석이 여관 안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어제 특별히 미행은 없었다.

    분명 깔끔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알고 있는 것일까? 정혁의 본질적인 목적까지 들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아시스라는 칭호 때문에 따라온 것도 아니다.

    그들의 눈에 정혁은 볼품없는 플레이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린에게 목적을 두고 있다.

    은행나무 엘프의 본질이라고 여겨지는 은행나무 군락지.

    모든 병력이 이곳 분쟁 지역으로 향할 때 아크는 빈집을 노릴 것이고 이를 깨달은 본진이나 까마귀 편대가 다시 왕국으로 복귀하기 전에 은행나무 군락지의 정확한 위치를 먼저 공격해 무너트리려는 심산이다.

    결국 분쟁 지역의 싸움은 자유 연맹과 은행나무 엘프 본진 사이의 소모적인 싸움이 될 것이고 아크는 적당한 전투력 분배를 통해 효율적인 성과를 달성하려 들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

    아크 제국이 엘라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은 분명 80% 이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 군락지를 무너트리는 것은 은행나무 엘프 왕국을 갉아먹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정신이 무너진 존재에게 육체는 하등 쓸모가 없다.

    정혁이 과거에 참 잘 써먹던 전술이기에 효과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달리고 달렸다.

    비어 있는 마구간을 찾아 주인 없는 말에 올라탄 정혁은 조금 더 수월하게 남쪽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백색 망토를 입은 자치 관리 대원들과 자유 연맹 소속 플레이어들이 뒤섞여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는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옅어지지 않았다.

    정혁은 처음으로 피 냄새가 역겹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렇게도 좋아하고 찾아다니던 이 냄새가 이렇게나 역하게 느껴지다니 놀라웠다.

    “하늬안은 괜찮을까요?”

    “괜찮겠지. 그렇게 멍청…하긴 한데 뭐 그래도 싸움은 잘해.”

    확신은 있다.

    하늬안이 분명 다시 그들에게 모습을 보여 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혁은 고삐를 틀어쥐고 더 빠르게 도돈치아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하늬안은 재빨리 흑마법사의 기척을 쫓았다.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얼음 마법사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흑마법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멈춰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공중에서 격돌 중인 두 마법사의 전투엔 빈틈이 없었다.

    얼음계 마법을 사용하는 저 마법사는 단일 타깃의 공격이 아니라 광범위한 공격을 이어 가고 있었고 흑마법사는 거기에 대응하며 지속적으로 얼음계 마법사에게 저주와 고통 계열의 암흑 스킬들을 박아 넣고 있었다.

    얼음 마법사가 무리를 하면서도 광범위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흑마법사의 재창조에 의해서 생겨날 수 있는 소환수를 이용한 공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이 그녀가 가세해야만 한다.

    광범위 스킬에서 단일 스킬로 변화하여 폭발적인 데미지를 입히고 싶다면 말이다.

    하늬안은 고유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단전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려 공중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격동의 포효]

    - 대상에게 적중하면 혼란 효과를 부여합니다.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먹혀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두 마법사에게 하늬안의 존재를 알릴 수는 있었다.

    빡빡이 흑마법사가 싱글거리며 하늬안에게 손을 뻗자 주변의 시체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얼음 마법사가 주문을 외워 일대의 모든 시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흑마법사가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하늬안이 바로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이에 반응하듯 흑마법사가 그녀와 동시에 떠올랐지만 즉시 생성된 얼음 발판을 밟으며 하늬안이 더 높이 비상했다.

    “재수 없는 자식아아!”

    그녀가 대도 멸과 절을 매섭게 휘둘렀다.

    그녀의 고함에 ‘격동의 포효’가 담겨 흑마법사의 움직임이 잠시 둔해졌다.

    하늬안이 눈빛을 번쩍이며 그대로 그의 몸을 갈라 버렸다.

    그러나 ‘카캉’ 하는 소리와 함께 본인이 되레 튕겨졌다.

    흑마법사의 몸에서 검은 손아귀가 뻗어 나와 그녀의 검을 막아 버린 것이다.

    하늬안의 추락의 충격을 얼음 마법사가 감쇠해 주는 동시에 마법사 뒤에 응집시켜 왔던 얼음 창을 날리려 했지만 이내 두 사람의 몸에 검은 손아귀가 뻗어 와 잡혀 버렸다.

    “어어… 아엘프 꼬맹이가 없어져었자나아?”

    흑마법사는 빙글거리면서 하늬안에게 날아왔다.

    입까지 틀어 막힌 그녀가 몸부림쳤지만 전신에 감긴 검은 손아귀의 악력에는 자비가 없었다.

    얼음 마법사가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기 무섭게 빡빡이 흑마법사는 그의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상쇄시켰다.

    “어어, 이 여자가 죽으며언 어떡하려구우~”

    그가 손가락을 흔들더니 검지로 얼음 마법사의 이마를 가리켰다.

    순식간에 검은 빛줄기가 뻗어 나가 그의 이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흡수되었다.

    그러더니 얼음 마법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고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풍선이 터지 듯 터져 버렸다.

    쏟아지는 피의 비에 하늬안은 넋이 나가 버렸다.

    “시끄러운 녀석이이 사라졌네에에?”

    하늬안이 질겁했다.

    ‘이렇게 강하다고? 이렇게?’

    “딜러어어어언!!”

    아래에서 폭발적인 고함과 함께 아스칼이 뛰어 올랐다.

    그의 주먹이 정확히 흑마법사의 얼굴을 강타했지만 아까의 검은 손아귀가 얼굴을 막아 주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하늬안을 붙잡고 있던 손아귀는 없어졌다.

    “어어 건방진 남자 아냐아, 너는 아지익 죽으면 안 되는데에…….”

    흑마법사가 빙글 웃으면서 중얼거리고는 시선을 돌려 도돈치아 북쪽을 바라보았다.

    “이거, 혼나겠는거얼…….”

    빈틈을 놓치지 않고 아스칼이 공중을 차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흑마법사는 그의 공격을 무심하게 피해 버리곤 하늬안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곧 봐아?”

    하늬안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사라져 가는 얼음 발판 아래로 뛰어 내렸다.

    흑마법사는 순식간에 공중에 생성된 암흑구멍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고 아스칼은 욕지거리를 뱉으면서 하늬안의 곁으로 착지했다.

    아스칼이 거칠게 하늬안에게 다가와 그녀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겨우! 그 정도였냐!”

    하늬안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자신의 검 한 자루를 집어던졌다.

    날아간 검이 벽에 박혔다.

    착각했다.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멍청한 외모에 홀려서 녀석이 이 정도로 강한 놈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오아시스는 200레벨 이후로 상대의 전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칭호를 통해서나 세계의 명성을 통해서 강함의 척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맞닥트려 싸워 보면 제대로 확인 할 수 있겠지만 적의를 가진 전투에 양보는 없다.

    그녀의 판단으로 충분히 얼음 마법사와 자신의 연계라면 흑마법사쯤은 타파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대머리 흑마법사는 생각보다 강했고 둘의 연계는 허술했다.

    아니, 오히려 하늬안이 훨씬 부족했다.

    “우물 안 개구리 놈들. 제논 쓰레기들!”

    아스칼이 고함을 치며 건물 벽을 내리쳤다.

    건물 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늬안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려다가도 지금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꺼져, 쓰레기야.”

    아스칼이 부서질 듯 이를 깨물며 하늬안에게 경고했다.

    지금은 물러설 때다.

    자신의 나약함과 실수로 동료가 죽은 그에게 위로 또한 사치다.

    아스칼은 알고 있다.

    그가 아무리 분노 조절이 힘들다 해도 자신의 분노 표출 대상이 누구인지를 말이다.

    지금 북쪽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저 아크 새끼들과 아까 그 흑마법사까지 모조리 쓸어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아스칼은 북쪽으로 향하고 하늬안은 검을 고쳐 쥐고 남쪽으로 향하며 그들의 불편한 만남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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