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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14화 (14/200)
  • ◈14화

    하늬안은 근처 잡화점에서 아린의 전신을 가릴 만한 망토를 사 왔다.

    그리고 아린에게 덮어 두었던 자신의 망토를 다시 챙겨 넣었다.

    아린과 그들은 통성명을 했고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들이 묵고 있었던 여관에서 이어 가기로 했다.

    모자를 쓰고 망토로 전신을 여민 아린을 데리고서 정혁과 하늬안은 여관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고 있었고 거리는 한산했다.

    몇몇 따가운 눈총들이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분쟁 지역에서 흔히 있는 경계의 시선이었다.

    아린에게는 은행나무 엘프들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관 주인장에게도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저 한 명분의 돈을 더 냈을 뿐이었다.

    방에 도착하자 정혁은 아린을 침대에 앉혔다.

    하늬안은 저녁 식사를 주문하러 방을 떠났고 아린은 망토를 벗었다.

    낯선 환경을 경계하는 듯 여기 저기 둘러보던 아린은 의자를 끌고 와서 앉은 정혁을 바라보았다.

    “대장장이가 은행나무 군락지에서 얻을 것이 있나요?”

    아린의 말에 정혁은 입맛을 쩝 다셨다.

    “뭐, 여러 가지로.”

    “제가 아엘프이긴 하지만 은행나무 군락지를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시죠?”

    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미친 짓을 할 생각은 없어.”

    은행나무 군락지대는 은행나무 엘프들의 영토이기도 했지만 엘라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행여나 그곳을 망가트리기라도 하면 엘라의 분노와 더불어 은행나무 엘프들의 총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한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턱도 없다.

    엘라의 뿌리가 닿기만 해도 온몸이 바스라질 것이다.

    “걱정은 접어 두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해 봐.”

    정혁의 물음에 아린은 되레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옛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잠시의 정적을 정혁은 침착히 기다려 주었다.

    그 사이 하늬안이 음식을 들고 올라왔고 아린은 물을 받아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곤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행나무 군락지대는….”

    아린이 아주 어렸을 때, 그만이 기억하고 있는 향기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어머니의 냄새였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다급히 아린을 데리고 그들이 살던 마을을 뛰쳐나왔다.

    그녀와 아린은 그 길로 정처 없이 은행나무 엘프들을 찾아 카탈 대륙을 횡단했다.

    거친 여정이었다.

    돈도 힘도 없던 젊은 여성과 어린 아엘프는 노예상들이 입맛 다시는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엘프 왕국은 카탈 대륙의 동쪽 해안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고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으면서도 어머니는 아린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영토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마주한 것은 엘프들의 경멸이었다.

    아린의 어머니는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영토 초입에 세워진 전진 기지에서 조롱 섞인 화살에 아린을 보호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목숨을 잃어 가는 순간 초록색 영롱한 빛을 발하는 크리스탈 목걸이를 아린의 손에 쥐어 주었고 어떠한 말도 없이 눈물이 가득 맺힌 공허한 눈으로 아린을 바라보며 세상을 떠났다.

    아린은 은행나무 엘프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얼굴에 침을 맞고 조롱당하면서 그는 왕국의 중심부로 옮겨졌다.

    기수의 말고삐에 길게 묶인 줄에 의지하여 질질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도성에는 어머니의 목걸이와 같은 목걸이를 걸고 있는 왕궁 수비대의 남자 엘프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벗겨진 채로 왕궁 중앙 복도에 내던져진 어린 아린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긴 여정의 피로도,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도, 주변의 조롱과 모욕도 눈앞에 당도한 죽음에 견줄 수 없었다.

    무섭고 고통스러웠다.

    죽고 싶지 않았다.

    아린은 그 남자 엘프를 보았다.

    그러나 남자 엘프는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은행나무 엘프의 왕.

    그는 아린에게 신성한 은행나무 군락지대에서의 재판을 지시했다.

    더렵혀진 은행나무 엘프의 피를 신성한 땅에서 회복시키고 아린이라는 불결한 존재를 지워 버리기 위해서였다.

    울퉁불퉁한 나무판자 수레에 온몸이 묶인 채 아린은 자신을 향해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고 있는 주술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은행나무 군락지대로 향했다.

    그곳은 아름다웠지만 죽음의 향기가 가득했다.

    그들은 재판이 행해지는 곳을 ‘안토안’이라고 불렀다.

    엘프어로 ‘어머니께 돌아가는 마지막 장소’라는 뜻이라고 후에 에드리아에게 들었던 것 같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이빨을 딱딱거릴 정도로 몸을 떨고 있던 아린에게 최후의 선고가 내려지려던 순간에 몇몇의 고위 엘프들이 그곳을 찾아왔고 한동안 바닥에 고꾸라져 있던 아린에게 거적때기와 같은 옷가지가 던져졌다.

    “너는 분쟁지역으로 간다.”

    그것이 은행나무 군락지대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무엇보다 담담히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는 아린을 보면서 마음 한쪽이 아렸다.

    한이었을 때 다 죽여 버렸어야 했다.

    이 정도로 꽉 막힌 일족들이었단 말인가? 일찍이 가장 반인간적이고 고지식한 집단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상상도 못할 정도의 외골수들일 줄은 정혁도 몰랐다.

    “넌,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들과 함께 있었던 거야?”

    하늬안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아린에게 말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아린은 조용히 대답했다.

    정혁은 한숨을 쉬면서 아린에게 뜨거움이 살짝 가신 귤 차를 건넸다.

    아린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작은 얼굴에 은행나무 엘프에 비하면 밝은 피부톤(은행나무 엘프는 나이트 엘프의 직계로 나이트 엘프 만큼 어두운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엘프의 트레이트 마크인 뾰족한 귀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귀.

    검은색 눈동자에 오뚝한 코, 오밀조밀한 입술.

    사실 피부톤과 엘프와 닮은 생김새가 아니면 인간인지 아엘프인지 쉽게 구별이 가진 않지만 아엘프들에게서만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이 있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그런 느낌말이다.

    “죽음이라는 선택지도 있었죠. 누군들 신경이나 쓰겠어요, 제 죽음에 대해서.”

    아린의 말에 하늬안도, 정혁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느껴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죽음은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빌어먹고 시궁창을 뒹구는 한이 있어도 살고는 싶었어요.”

    아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혁은 묵묵히 아린을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은행나무 군락지에 가는 길을 어떻게 안내해 준다는 거야?”

    빠악.

    하늬안의 주먹이 정혁의 뒤통수에 직격했다.

    소량의 HP가 닳았다.

    정혁은 머리를 부여잡고 단전에서부터 고함을 끌어올렸다.

    “으그아아아아악!”

    “야 이 인간미 없는 자식아! 군락지가 그렇게 중요하냐? 요 꼬맹이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딴 질문이 나와?!”

    하늬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정혁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끙끙거렸다.

    아린은 그들을 보다가 눈물을 훔치고 피식 웃었다.

    “걱정 마세요. 여러분을 그곳으로 안내할 수 있습니다.”

    하늬안은 혀를 차면서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내 언젠간 꼭 이 모든 수모를 돌려주고 말리라.언젠가는 진짜 꼭.’

    정혁은 이를 뿌득 뿌득 갈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안토안에서 제 옷가지들이 불태워질 때 어머니께 받았던 목걸이도 함께 태워졌었어요. 하지만 크리스탈은 불길에도 타지 않았죠. 신기하게도 크리스탈이 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눈을 감고 집중하면 마치 심장박동처럼 크리스탈의 고동이 느껴져요. 고동을 따라가면 분명 군락지대가 나올 거예요.”

    “…효율적인 나침반이 되겠군.”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던 정혁이 살기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가렸다.

    하늬안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정혁을 꿰뚫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정혁은 다시 아린을 쳐다보았다.

    “아시다시피 군락지대는 왕국 깊숙한 곳에 있어요. 필연적으로 은행나무 엘프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죠 은행나무 엘프의 군대는 강력해요. 엘프 부족은 꽤 많지만 그중에 왕국을 이루고 있는 엘프는 세 부족밖에 없잖아요? 세 부족 중에 하나가 은행나무 엘프들이니 결속력과 힘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북쪽 경계에서 끊임없이 남하하는 아크 제국과 전투를 이어 가다 보니 병기 생산이나 전투력 증강에 많은 힘을 투자하고 있는 실정이라 더욱 강해지고 있어요.”

    ‘이 녀석, 꽤 능통하잖아?’

    정혁은 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아린의 걱정 속에 다 있었다.

    한이 세계의 정점이었을 때에는 오아시스에 큰 전쟁이 있진 않았다.

    오직 한을 잡거나 죽이기 위한 결의가 가득했을 뿐.

    그러나 한이 사라진 3년간 세계는 대전쟁을 겪고 정세는 급변했다.

    반 토막 상태였던 은행나무 엘프 세력도 많이 강해져 있었다.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은밀하게 은행나무 군락지대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내가 말했잖아. 하필 은행나무 엘프들이야. 변장 마법도 소용이 없어. 그 특유의 냄새까지 똑같이 따라하는 건 불가능해. 그뿐만 아니라 그쪽에도 변장 마법을 파쇄하는 감시 장치들이 있을 테고. 은행나무 엘프의 까마귀 편대는 카탈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잖아. 공중 접근도 완벽히 막힐 거야.”

    하늬안이 몇 가지 의미 없는 불평을 던져 댔다.

    하지만 정혁도 당장에 해답이 떠오르진 않았다.

    아린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위치를 지도에서 명확히 찍어 줄 수 없어서 우회로를 짜 볼 수 없을 뿐더러 그저 길을 따라 추적하는 수준이라 직접 변수를 경험하며 대응해야 한다.

    또한 아린이라는 보호해야 할 객체가 는 것도 하나의 문제점이다.

    그렇다면 하늬안을 믿을 수 있느냐.

    ‘글쎄.두 명까지 커버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정혁은 하늬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요….”

    “만약에?”

    정혁이 눈을 반짝이면서 아린을 바라보았다.

    “분쟁 지역에서 은행나무 엘프들의 작전이 성공하게 된다면 어쩌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어요.”

    “계획?”

    하늬안이 아린에게 몇 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정혁은 불편한 표정으로 떨어지라는 듯 손짓했지만 하늬안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지금쯤 분쟁 지역의 아크 제국 관할 구역 곳곳에 폭탄이 설치되고 있을 거예요. 자유 연맹과 은행나무 엘프가 최근 기세가 등등해져 가는 아크 제국에 맞서기 위해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거든요. 자유 연맹에서는 연합 작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폭발물에는 자유 연맹의 마크가 새겨져 있어요. 내일 폭발이 일어나면 아크 제국은 분명 자유 연맹을 공격할 겁니다.”

    “…어부지리!”

    정혁이 손뼉을 작게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공격이 성공되고 나면 분쟁 지역에서 은행나무 엘프들은 특임조들을 제외하고 후퇴할 겁니다. 갑자기 발을 빼면 그들이 분명 의심할 테니까요. 서로 간의 소모전이 지속되는 사이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은행나무 엘프들의 본진 병력이 순식간에 분쟁 지역으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만약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미 북쪽에 파견된 병력들과 분쟁 지역에 추가되는 병력들로 인해서 왕국의 영토 방어는 다소 취약해지겠죠?”

    “야, 너 엄청 똑똑하다.”

    하늬안이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혁은 오히려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하는 하늬안의 멍청함을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혹이 난 뒤통수가 아직도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입을 다물었다.

    “현재로서는 나쁘지 않는 방법이네. 폭발 시간은?”

    “아마도 내일 오전 9시요.”

    “아크 제국은 빠르게 움직일 거야. 항상 속전속결을 모토로 전쟁을 벌이는 자들이니까. 자유 연맹은 처음에 주춤하겠지만 금방 대열을 정비하고 전투에 참여하겠지. 이틀에서 사흘이면 소모전 속에 바닥이 드러날 거고 은행나무 엘프들의 본대가 그때쯤 도착하지 않을까?”

    정혁의 말에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쾌하겠다, 너는.”

    하늬안이 아린에게 묻자 아린은 씁쓸한 미소를 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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