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3화 (13/200)
  • ◈13화

    ‘멀쩡하게 생긴 녀석이 성질은 거의 필드에 지랄 맞은 몬스터급이네.’

    정혁은 묶여 있음에도 발악하고 있는 아엘프 꼬맹이를 바라보면서 혀를 찼다.

    묶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하늬안의 손이 두 번이나 물리고 나서 이러다 뭘 알아내기 전에 그녀가 녀석을 반으로 갈라 죽이려 들 것 같았기에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녀석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온몸으로 최선을 다해 정혁과 하늬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늬안과 정혁은 묶인 아엘프를 데리고 뒷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행여 다른 엘프들에게 보이기라도 한다면 공격을 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아엘프긴 해도 엘프는 엘프기에.

    그 고귀하신 양반들 눈에는 인간에게 끌려가는 아엘프가 자신들의 긍지를 해치는 모습이라고 여겨질 것이리라.

    아엘프 꼬맹이를 들쳐 멘 것은 하늬안이었다.

    정혁이 남자답게 들어 보려 했지만 개뿔.

    또 한 번 흑역사를 썼다.

    스스로도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왈로의 무기는 번쩍번쩍 들었는데 말이다.

    정혁은 다시 한번 이 빌어먹을 직업을 한탄했고 하늬안은 속으로 수십 번 앞서가는 정혁의 뒤통수를 때리는 상상을 했다.

    “야, 이거 은근히 기분이 별로야. 노예 거래상 같고.”

    하늬안이 망토를 덮어 놓은 아엘프 꼬맹이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말했다.

    “방법이 없잖아.”

    “…넌 진짜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

    “늬예 늬예 대단하신 검사님 납셨네여어.”

    정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하늬안을 흘겨보고는 조금 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작은 공터를 발견했다.

    주변은 창문 없는 건물들로 막혀 있었고 가운데 작은 분수가 있었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벤치들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입구가 하나였기에 심문(?)하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하늬안은 벤치에 아엘프를 내려놓았다.

    정혁은 그녀에게 입구를 가리키면서 그곳에서 망이나 보라는 눈짓을 했다.

    하늬안은 깔끔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여 주고는 콧방귀를 뀌며 입구로 향했다.

    ‘하여튼 성깔 진짜.’

    정혁은 망토를 벗기고 겁에 질린,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렬한 저항의 눈빛을 지닌 아엘프를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였다.

    엘프 중에 영원히 죽지 않는 엘프는 한 부족밖에 없다.

    나머지는 노화되고 죽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엘프들이 인간보다 두 배 이상 긴 수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는 아엘프도 동일한데 그렇다면 정혁보다 키가 작고 조금 앳돼 보이는 녀석이긴 해도 나이는 어느 정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들을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들면 안 되긴 하지만 말이 통했으면 싶은 게 정혁의 마음이었다.

    “자, 입에 물린 재갈을 풀 거야. 먼저 말하지만 큰 소리는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물지 마.”

    정혁이 마지막을 강조하면서 재갈을 풀었다.

    아엘프 꼬맹이는 재갈이 풀리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말을 안 할 기세네?”

    하늬안이 아엘프를 보면서 말했다.

    정혁은 두 손가락을 들어 하늬안의 눈을 가리키고 바로 옆의 공터 입구를 가리켰다.

    “…….”

    그녀는 뭐라 구시렁거리며 몸을 돌려 다시 골목길을 경계했다.

    “꼬맹아, 이름이 뭐냐.”

    정혁의 말에 아엘프 꼬맹이는 더욱 굳게 입을 다물었다.

    정혁은 꼬맹이 앞에 털썩 주저앉아 녀석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물론, 말 안 하고 싶겠지. 아엘프들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니까. 많은 아엘프들이 인간을 증오해. 왜냐? 자신이 그냥 엘프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겠어. 엘프로서 무시 받지 않고 동족으로 보호받는 삶을 살아갔을 테니 말이야.”

    정혁은 호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아엘프의 두 팔과 다리를 묶은 끈을 잘라 내었다.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저 여자 굉장히 무섭다.”

    정혁의 말을 들었지만 하늬안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뭐, 또 한편으로는 엘프가 미웠을 수도 있지. 차라리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노예이거나 천대받는 쓰레기거나 둘 중 하난데. 너는 어느 쪽이야?”

    정혁의 말에 아엘프 꼬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꼬마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다문 입술을 꽉 깨문 모양이었다.

    “그래도 너는 지조가 있는 걸 보니 그나마 엘프 물이 좀 묻긴 한 것 같네. 걔들이 잘해 주디? 아니겠지. 고귀한 척, 고결한 척, 정의로운 척, 자연을 위하는 척 다 하는 위선자들. 자신의 동족들과 부족만 끔찍하게 아끼면서 해가 되는 존재들에게는 가차없는 거짓된 선동자들이야 다.”

    정혁의 말엔 가시가 가득했다.

    “자, 그럼 생각해 보자. 우리 객관적으로 말이야.”

    정혁이 꼬맹이의 무릎을 작게 탁탁 쳤다.

    “너는 인간도, 엘프도 아니야. 그래서 아엘프라 부르지. 그럼 아엘프 중에는 출세한 인물이 없냐? 사실 그것도 아니야. 너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는 엘프 왕국의 부관이 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제국의 대장군이 되기도 했어. 그들이 무엇을 했냐? 자신의 편을 빨리 골랐고 아엘프의 장점을 더 익숙하게 다뤘을 뿐이라고 봐.”

    꼬맹이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넘어오고 있군.’

    “모두가 비난하지만 사실 아엘프는 대단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 엘프에 가까운 몸에 인간의 감성을 지니고 있지. 자연, 자연, 자연 그놈의 자연을 신봉하는 꽉 막힌 엘프 대가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리 분별에 강하고 이성적이면서도 더불어 감성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이거야. 게다가 수명은 우리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보면 너는 축복 받은 존재 아닐까?”

    정혁이 아엘프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작게 쿡쿡 찔렀다.

    아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앉은 낯선 인간에게 그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엘프밤의 에드리아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자주 듣던 그 말을.

    그 단어를.

    “…축복….”

    아린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축복. 세상은 본능적으로 성장하면 두려울 만한 존재들에게 일정한 프레임을 씌워 그들을 억압하려 해. 보통은 웃대가리들의 간악한 정치싸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두 종족의 장점을 이어받은 너희 아엘프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조롱과 비난일 뿐 틀에서 벗어나면 너는 강한 오아시스의 일원이자 새로운 종족인거야.”

    낯간지러운 말을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정혁은 당장 이 녀석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마음을 얻어야 했다.

    정혁은 아엘프의 삶을 잘 안다.

    과거 한이었을 때 그와 친분이 있었던 아엘프의 성장 과정과 세상이 그를 대했던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순간 꼬맹이가 작게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인간들은 항상 목적을 가지고 있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고.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겠지.”

    아린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어찌되었건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 있다.

    결국 이 남자는 그에게 원하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감성 팔이에 속고 믿었던 자에게 뒤통수 맞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다만 남자의 말을 통해서 위축되어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고 이젠 에드리아의 자긍심에 고취된 표정 같은 것은 지워 버리기로 다짐했다.

    “…그래, 물론이지.”

    정혁은 고민했다.

    엘프보단 아엘프 쪽이 일단 쉬운 대상이긴 하다.

    인간에게 우호적인 은행나무 엘프를 만나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또한 견디기 힘든 냄새 때문에 우리 쪽에서 우호적으로 다가가 보려고 해도 표정 관리부터가 쉽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녀석이 과연 은행나무 엘프 왕국에 들어가 본적이 있을까? 또한 신성시 하는 은행나무 군락지대에 접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은행나무 군락지대에 볼일이 있어.”

    아린은 남자의 말에 조금 당황한 듯 눈동자를 돌렸다.

    ‘은행나무 군락지대라고?’

    “역시, 가보지 않았으려나?”

    정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늬안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늬안은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뭐, 모른다면 할 수 없지. …그래도 꼬맹아. 내가 한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틀에 억압 받지 마라. 돌아보면 참 비참한 거다, 그거.”

    ‘말해 놓고 보니 웃기네. 고작 25레벨짜리 플레이어가 이 세계에서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혼자 피식 웃고는 몸을 돌린 정혁의 옷깃을 녀석이 붙들었다.

    “어떻게 가는지는 알고 있어.”

    ‘응?’

    “내가 버려진 곳이 그곳이니까…….”

    ‘…이거, 끝까지 비참한 자식이네.’

    ***

    분쟁 지역 도돈치아에 밤이 찾아왔다.

    주점 은행밤의 지하실 입구를 가려 놓았던 철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리고 검은 자루를 등에 짊어진 열 명 정도의 두건 쓴 엘프들이 빠른 걸음으로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원을 그려 섰고 은행밤에서 걸어 나온 늙은 엘프가 그들에게 동시에 주문을 걸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곁에선 동료의 모습이 역겨웠는지 몇몇의 일행이 헛구역질을 해 댔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서로 주먹을 맞대 의지를 다진 뒤 각자의 방향으로 사라졌다.

    에드리아는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문 옆에서 몰래 지켜보았다.

    늙은 엘프가 다시 은행밤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에드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드리아는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곤 문 밖으로 나서 어둠이 가라앉은 한적한 골목길을 좌우로 번갈아 보았다.

    아린이 돌아오지 않았다.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요즘 들어 부쩍 말라 가고 눈동자의 생기가 없어지는 그를 바라보면서 남몰래 안타까움을 안고 있던 에드리아였다.

    어째서 고결한 엘프가 저급한 인간 따위와 사랑을 나눈 것일까.

    자연의 위대함과 세상의 거룩함을 깨닫지 못하고 마법을 훔쳐 쓰기나 하는 더러운 일족의 어디가 좋았던 것일까.

    자연의 어머니께서는 왜 이 불결한 사랑을 허락하셨을까.

    그래서 왜 저런 안타까운 혼혈을 탄생하게 만드셨을까.

    에드리아는 땅에 손을 대고 수십 번 기도해 보았지만 어머니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연민에 대꾸하는 은행나무 엘프들도 없었다.

    분쟁 지역에 투입된 엘프들은 오직 적들에 대한 증오와 영토에 대한 야욕밖에 없었다.

    에드리아는 문을 닫고 은행밤 밖에 쭈그려 앉았다.

    근처의 가로등 안에서 화염불이들이 밤기운을 느끼고 타올랐다.

    덕분에 따뜻한 불길이 조명이 되어 어둠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린이 자긍심을 가지기를 바랐다.

    인간도 엘프도 아닌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엘프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엘프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녀도 아린도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가 강한 엘프의 일원이 되리라 믿고 있다.

    지금의 시련을 이겨 내고 말이다.

    “축복받은 아이야. 날이 춥다. 들어가자.”

    은행밤의 문이 살짝 열리고 아름다운 엘프 여성이 얼굴을 보이며 에드리아를 불렀다.

    “조금만 여기 있다가 들어갈게요, 어머니.”

    “그 녀석을 기다리는 거니?”

    물음에 에드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언제 죽어도 모를 녀석이란다.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에드리아는 옅은 눈웃음을 지었고 엘프 여성은 은행밤의 문을 닫았다.

    이상하게도 문 닫히는 소리와 그 사이를 통해 빠져나오는 바람이 한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에드리아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엘프어로 바닥에 ‘아린’이라는 단어를 적어 보았다.

    아린은 엘프어로 ‘달빛이 서린 태양’이라는 뜻이다.

    달빛이 서린 태양이라니.

    이름부터가 모순투성이인 그의 인생은 지금도 이렇게나 모순투성이다.

    에드리아는 아린의 이름에 손을 대고 가슴에 다른 손을 가져다 댄 채 자연의 어머니에게 기도했다.

    차가운 밤에도 어딘가의 아린은 엘프의 긍지를 가슴에 심고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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