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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11화 (11/200)
  • ◈11화

    정혁은 숨을 죽였다.

    몸을 웅크린 그는 곁눈질로 방금 전까지 일행이 있었던 곳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하늬안을 바라보았다.

    하늬안 역시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로서도 이렇게 우악스러운 살기는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주변까지 기세가 등등하다.

    피비린내를 풍기면서도 적의를 잔뜩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살기가 다른 기운과 완전히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늬안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서 자취를 숨겼다.

    은신에 가까운 수준까지 스스로를 감춘 그녀는 이내 눈앞에 펼쳐진 깜짝 놀랄 광경 앞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크…?”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과 반대편에는 눈은 붉게 충혈되고 입가에 피가 잔뜩 묻은 남자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 앞으로 그들보다 조금 왜소하지만 위압감만큼은 전혀 뒤처지지 않는 남자가 장검을 차고 나섰다.

    진정되지 않는 짐승들과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도 마치 사제와 같은 복장의 남자가 뒷짐을 지고 나왔다.

    일행이 있었던 자리는 피투성이의 살해 현장으로 변해 있었다.

    누가 봐도 살해당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사체 모습은 끔찍했다.

    여기 저기 먹히고 뜯겨 있다.

    하늬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만약에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필시, 죽는다.

    오아시스에 더 이상 접속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고통에 휩싸여 죽을 것이다.

    “호오, 그대는….”

    사제의 복장을 한 남자가 뒷짐을 풀어 앞으로 공손이 손을 모으더니 예의를 갖추고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의 인사를 그저 꼿꼿하게 서서 받은 검은 정장의 남자가 손을 들어 검지를 몇 번 구부리자 뒤에 남자가 그의 앞에 의자를 꺼내 펼쳤다.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장검의 검집 끝이 피 웅덩이에 닿았다.

    “여전히 젠틀하지 못하네.”

    남자는 검은 구두 끝을 탁탁 털었다.

    피 붙은 흙뭉치들이 떨어져 나갔다.

    사제 복장을 한 남자는 두 팔을 벌려 어깨를 으쓱 한 뒤에 말했다.

    “뭐, 아크 님의 방식대로….”

    검은 정장의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놈의 악마, 악마.”

    그의 말에 사제복의 남자는 조금 언짢아진 것 같았다.

    그의 뒤에서 짐승의 모습으로 으르렁거리고 있던 남자들이 마치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고함을 외쳐 댔다.

    사제복의 남자는 검은 정장의 남자를 바라보며 강하게 오른손을 아래로 휘둘렀고 그의 바로 뒤에 있던 짐승과 같은 남자가 갑자기 목을 부여잡더니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사지가 천천히 꺾이며 네모난 모습으로 접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디, 감히.”

    사제복의 남자는 검은 정장의 남자에게 눈 한 번 떼지 않은 채 작게 중얼거리고는 꺼림직한 소리가 끝나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용서하시지요. 아시다시피 저들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지라.”

    검은 정장의 남자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곤 박수를 몇 번 치면서 사제복의 남자를 조롱하듯 치켜 보았다.

    “재밌네, 하하, 재밌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늬안은 느끼고 있었다.

    기세의 대립은 여전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검은 정장 무리와 사제복 남자의 무리 사이로 수없이 많은 적대적 마나가 부딪치고 있었다.

    “피차 바쁜 일이 많을 테니, 서로 얼굴 마주할 사이도 아니고. 여기는 아크의 영토로부터도 한참 아래인데 그저 인간들 사냥하러 온건 아니겠지? 무슨 용무가 있어서 사제나 되는 양반이 여기 있을까?”

    검은 정장의 남자는 꼬았던 다리를 바꾸며 물었다.

    사제는 앞에 손을 모으고서 싱긋 웃었다.

    “그저 밤이 좋았을 뿐입니다.”

    “허허.”

    검은 정장의 남자는 원치 않는 대답이 나왔다는 듯이 그저 웃어 보였다.

    하늬안은 점점 강대해지는 기세 때문에 피부에 저릿한 근육통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 요즘 내가 컨디션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 더 나를 자극하지 않길 바라?”

    날카로워진 그의 말투에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모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곤 그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정답을 이미 알면서 묻는군요. 하긴, 그게 당신네의 방법이었지요.”

    “그래, 그렇지.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도 알 테고. 그치?”

    검은 정장의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뒤에 있던 남자들이 그의 의자를 순식간에 회수했다.

    남자는 장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더 많은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글쎄요. 아크 님께서 바라는 일은 아닌지라….”

    사제복의 남자는 두 손을 살짝 들었다.

    남자의 손에 검은색 마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후회할 텐데 괜찮겠어? 우리한테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일제히 장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사제복의 남자 뒤로 서 있던 짐승 같은 남자들의 모습 역시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다.

    뼛조각들이 피부를 뚫고 튀어나왔고 더불어 아래에 널브러진 시체들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다.

    “고통… 고문… 너무나 환영하는 바입니다.”

    사제복의 남자는 희열에 찬 눈빛으로 검은 마나를 더욱 끌어모았다.

    하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기세에 눌려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곳을 빠져나와 정혁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정혁은 이미 기절해 있었다.

    하늬안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들쳐 엎고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내 거대한 충돌이 염원의 숲을 뒤흔들었다.

    ***

    정혁이 눈을 뜬 곳은 여관방 안이었다.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오한이 찾아오더니 숨이 가빠졌고 정신이 흐릿해진 뒤에는 기억이 없다.

    이 정도면 상당한 인물들이 근처에서 대립했다는 건데 하늬안이 없었으면 아마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젠장, 빚을 졌네. 그것도 제일 갚기 싫은 사람에게 말이야.’

    몸을 일으켰다.

    뭐랄까.

    기절을 했지만 그간 야지에서 잤던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푹 쉰 격이라 몸이 한결 개운했다.

    더욱이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드웨이크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자신에게 붙였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앞으로의 여정에 불협화음은 피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젠트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났다.

    인정하긴 싫지만 하늬안은 나쁘지 않은 검사다.

    적어도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플레이어다.

    그의 기억으로는 괴롭힐 맛이 나는 플레이어였으니 말이다.

    “도돈치아인가?”

    침대 옆으로 나 있는 창문 밖을 보니 여러 건물들 옥상에 도돈치아 분쟁 지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백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분쟁 지역답게 그곳에서 살아가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집이나 상점에 백색 깃발을 달아 놓는다.

    주민들은 전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표시이기도 하고 대상이 백색 깃발이 걸린 건물 안으로 도망치면 자연스럽게 승자와 패자가 결정나는 그들만의 암묵적인 법칙의 표식이기도 하다.

    거리의 행인들은 자신의 소속을 밝히는 증명서를 허리에 묶어 드러내고 다닌다.

    아크, 연맹 혹은 엘프.

    이렇게 도돈치아에서 대표적인 세 세력 외에 나머지 종족들은 보통 검은 엑스가 그려진 증명서를 차고 있다.

    그렇기에 분쟁은 보통 앞서 말했던 세 세력 간에 자주 발생한다.

    정혁은 한참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가 관건이다.

    믿을 만한 은행나무 엘프를 만나야 한다.

    물론 이 도돈치아에 은행나무 엘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엘프에도 여러 갈래가 있고 생김새도 다르기 때문에 크게 착각할 일은 없지만 만약의 만약도 배제해야 한다.

    행여 신뢰할 수 없는 자에게 이 초대장을 보였을 때엔 도돈치아뿐만 아니라 오아시스 전체에서 가장 큰 현상금이 그의 목에 걸릴 것이 분명했다.

    ‘하긴, 당장에 뺏길걸?’

    그렇다면 누구를 만나야 할까.

    정혁은 곰곰이 생각해 보곤 답을 내렸다.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 은행나무 엘라에게 인도해 줄 수 있는 자를 만나야 한다.

    엘라는 말 그대로 은행나무다.

    인격을 가진 나무는 많지 않으나 세계에 소수 존재한다.

    그들은 세계와 대화하고 세계를 대변한다고 전해져 왔다.

    오직 자신과 관계있는 엘프들에게만 가끔씩 자신을 드러내는데 정혁이 한이었을 때 어떤 이유에 의해서 은행나무 엘프들을 거의 몰살 시킬 뻔했었고 이 사건이 엘라의 화를 돋우었다.

    엘라는 상상을 초월한 공격을 가해 왔고 한은 두려움 없이 엘라와 경합을 나누었다.

    어려운 상대이긴 했지만 한은 충분히 엘라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만 년이나 된 은행나무를 없애고 싶진 않았기에 한은 은행나무 엘프들의 영역을 더 이상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자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엘라를 깨울 수 있는 나무 종 ‘우드 벨’을 얻게 되었다.

    지금 ‘우드 벨’은 없지만 엘라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고 뭐, 어떻게든 방법이 있지 않겠나 싶은 마음이다.

    ‘만 년이나 된 은행나무 엘라라면 젠트라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초대장도 나무를 매끈하게 세공한 동전 모양이니까 엘라가 봤을 때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을 수 있어.’

    고민에 싸여 있을 때쯤 하늬안이 노크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정혁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들고 있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보고 가져오라고 손짓을 했다.

    하늬안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치더니 그의 앞에 조금은 과격하게 내려놓았다.

    정혁은 샌드위치를 들어 입에 넣었다.

    우유는 따뜻했다.

    그가 음식에 심취해 있는 동안 하늬안이 그의 앞에 검정 엑스가 그려진 증명서를 던져줬다.

    “알지? 차고 다녀야 되는 거.”

    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늬안은 다리를 꼬고 침대 곁의 나무 벤치 의자에 앉아서 정혁이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 난 듯 입을 열었다.

    “들었어? 강철 망치가 불타 없어졌대.”

    “응, 라테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알아.”

    ‘그러고 보면 참, 자연스럽게 반말이네 저거.’

    조금 언짢아진 정혁이었지만 애초에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별로였기에 딱히 표현을 하진 않았다.

    “카탈 대륙에서 강철 망치 자체가 지워지고 있어.”

    ‘응? 이건 처음 듣는 소린데?’

    정혁이 그제서야 하늬안을 바라보았다.

    하늬안은 뭔가 걱정이 섞인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지워 지고 있다는 게 무슨 소리야.”

    “들은 대로야. 어떤 세력에 의해서 카탈 대륙 전체의 모든 강철 망치 대장간들이 공격당하고 몰살당하고 있다는 거지.”

    “그럴 리가. 강철 망치 조합은 다른 길드나 제국, 왕국, 연맹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텐데?”

    하늬안은 정혁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들어서 천장을 쿡쿡 가리켰다.

    “그보다 더 위가 움직이고 있거나.”

    그리곤 다시 손가락 방향을 아래로 내려 찔렀다.

    “더 아래가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곤 작은 나무 의자를 찾아 그것을 침대 가까이로 당겨서 앉은 뒤 정혁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 있잖아.”

    정혁은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조금은 부담스러우면서도 향긋하게 퍼지는 라벤더 향에 약간의 기분 좋음을 느꼈다.

    ‘잠깐만, 좋아졌다고? 으엑.’

    적색 머리칼과는 반대되는 파란 눈동자가 의심 가득히 정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 위인지 아래인지가 누구를 찾고 있는 것 같거든.”

    그녀는 한참 정혁을 노려보듯 보다가 고개를 쑥 빼고는 중얼거렸다.

    “그게 너일 확률은 적은 것 같은데… 뭔가 찜찜하단 말이야.”

    ‘이게… 또 시작이네.’

    ‘글쎄, 사실은 잘 모르겠다.’

    하늬안은 계속 먹으라는 듯 손짓을 했고 정혁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그는 과거 수도 없이 많은 자들과 경합을 벌이고 항상 승리했었지만 그 많은 종족들과 사람들 속에서도 ‘오아시스’라는 타이틀을 가진 자들을 만나 본적 없었다.

    한이 오아시스 랭킹 1위였던 것은 세계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싸워 보진 않았어도 당연히 자신보다 강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긴 했지만 ‘오아시스’라는 칭호가 붙은 사람이 더 있었다면, 또 그렇게 강했다면 왜 한은 만나 보지 못했을까?

    “야, 하늬안.”

    “왜?”

    정혁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아니, 포효의 검사 양반? 저는 어떻게 보이시나요?”

    “허접데기 대장장이요.”

    “아씨, 장난치지 말고 진짜로.”

    하늬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대장장이 정혁.”

    ‘응? 그게 끝이야?’

    “뭐라고?”

    “넌 따로 붙은 말이 없어. 그래서 더 쓸데없어 보이긴 한다만. 아니, 무슨 생각으로 첫 직업을 대장장이를 선택한 거야? 나는 진짜 이해가 안 간다니까….”

    하늬안이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정혁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왜지? 왜 저 여자에겐 내 칭호가 완전히 보이지 않지?’

    정혁은 의문을 가지고 시스템을 호출해 상태 창을 펼쳤다.

    그 사이 몇 가지의 추가 사항이 그의 칭호 아래에 생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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