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0화 (10/200)
  • ◈10화

    “라테가 뭐, 뭐라구요?”

    정혁은 여행자 무리 사이에서 밥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그와 함께 모닥불에 앉아 식사를 하던 일행들이 정혁의 반응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의 옆에 있던 젊은 남자가 진정하라며 다시 정혁을 자리에 앉혔다.

    “친구가 보내 준 소식이에요. 꽤 됐죠? 라테가 사라지고 불의 정령들이 다른 정령들과의 세력 싸움에서 밀려난 지. 그런데 갑자기 강철 망치 대장간에서 튀어나왔다고 하지 뭡니까.”

    정혁은 손에 쥐고 있던 밥그릇을 탁자에 내려놓고 입에 넣었던 음식들을 얼른 씹어 삼켰다.

    라테는 정혁이 ‘한’이었을 때 쓰러트렸던 화염의 정령왕이다.

    통칭 염제라고 불리며 모습을 바꿀 수 있어서 사람들 사이에 인간의 모습으로 섞여 있기도 했기 때문에 만나기도, 해치우기도 까다로운 놈이었다.

    ‘한’이었던 시절 그가 굳이 사냥할 필요까진 없었던 염제 ‘라테’를 잡았던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평소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물의 정령왕과의 약속과 더불어 자신에게 항상 무기와 방어구를 대 주던 강철 망치의 비약적인 성장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라테의 심장은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고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조 패더럴은 라테의 심장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큰 규모로 강철 망치를 키워 낼 수 있다고 다짐했었고 심장을 받자마자 강철 망치는 카탈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가는 대장간 조합으로 성장했다.

    이는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스런 이야기였다.

    불의 정령왕은 죽지 않는다.

    불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동력인 심장이 봉인에서 풀린다면 라테는 다시 눈을 뜰 것이다.

    물의 정령왕에 의해서 심장을 봉인하는 각인석을 받게 된 한은 그것을 소형화시켜 조에게 주었다.

    조는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위치에 숨기겠다고 했고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반드시 도와 달라고 거듭 부탁했었다.

    그런데 라테가 깨어났다니.

    강철 망치 본점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주변의 땅도 화마에 휩싸였을 것이다.

    중립 지역이었던 엔토리아의 절반은 이미 라테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떻게 깨어나게 된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혁은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달빛이 비추는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하긴, ‘한’은 이미 사라졌으니 문제가 생겼다 한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만약에 문제가 생길 듯한 조짐이 보였다면 일차적으로 에드가가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라테가 깨어나는 순간부터는 그들로는 역부족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 자식은 죽었을까?”

    정혁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랄까, 마음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3년간 그곳에서 있었던 몸의 주인이 느끼는 먹먹함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혁에게 있었던 여러 가지 계획 중에는 다시 강철 망치로 돌아가는 선택지도 있었다.

    강철 망치의 조 패더럴, 그의 실력만큼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전투력이 거의 바닥인 정혁에게 랭킹 1위를 싸움으로 쟁취한다는 것은 당장에 자신의 능력을 봤을 땐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무엇일까? 맹독염화 속성의 무기를 만들어 냈을 때 깨달았다.

    이건 무조건 돈이 된다.

    현실이랑 다를 바 없는 오아시스의 세계에서 권력을 휘어잡기 위해서는 재력 역시 중요했기 때문에 대장간을 크게 키우고 많은 세력들을 규합하고 그들의 약점을 잡아 이간질하고 자멸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과정을 위해서 대장 기술의 모든 것을 다시 배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한’의 메인 무기였던 ‘악몽의 비수’를 만들어 낸 사람이 조 패더럴이었으니까.

    정혁이 강철 망치를 떠난 지 한 달이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혼자가 익숙했기 때문에 외롭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나약한 육체 탓에 항상 조심해야 했다.

    거리낄 것 없이 돌진했던 과거의 자신에 비하면 한참 비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에게 다음은 없었기에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호적인 무리가 있다면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그들의 무기를 종종 수리해 주기도 하면서 어느 지점까지 동행했다.

    필드의 짐승들이나 인간에게 적대적인 종족들은 대개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도 받았다.

    지금 함께 있는 자들도 염원의 숲을 지나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행상꾼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용병들이었다.

    일전에 만났던 제논의 기사단 레이드 팀원들에 비하면 전투력은 낮았지만 염원의 숲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없어 이들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정혁의 여정은 카탈의 중심부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중립 지역 엔토리아에서 시작해 지금은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 도돈치아로 향하고 있었다.

    도돈치아는 분쟁 지역으로 북쪽의 제국인 아크와 남쪽의 연합 자유 연맹,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치를 떠는 은행나무 엘프 왕국 간의 크고 작은 다툼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정혁은 품에서 젠트라의 초대장을 꺼냈다.

    낡은 토큰 모양의 초대장은 여전히 아무 응답이 없지만 느낌상 은행나무 엘프들 쪽과 어떤 연관이 있어 보였다.

    그곳에서 어떻게든 다음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얼마를 걸었는지 뒤로 돌았을 때 저 멀리에 모닥불의 따뜻한 불빛이 아른거렸고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한’이었을 때의 삶과 지금의 삶

    자신에게 걸린 시스템적인 제약으로 인해 혼자의 세계에서 살아갔던 과거의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으며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 된 이상 태도부터 시작해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조 패더럴의 안위가 걱정되는 마음도 낯설 뿐이다.

    대장 기술을 누구에게 배워야 할지 고민이 되어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야, 아니, 언제까지 그렇게 따라다닐 거야.”

    정혁이 한숨을 크게 쉬면서 허공에 대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는 고요만이 가득했다.

    풀벌레의 소리, 커다란 나무에서 바람에 맞춰 떨어지는 몇 몇의 나뭇잎 소리.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일주일 넘게 너도 참 고생이다.”

    ***

    하늬안은 물을 마시다 말고 입을 꽉 다문 채 속으로 기침을 뱉었다.

    정혁의 외침 때문에 그녀는 민망함과 무안함의 소용돌이 속에 순간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니, 알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모른 척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싸가지가 바가지다 진짜.’

    하늬안은 속으로 한껏 욕지거리를 뱉었다.

    드웨이크는 정혁의 안위를 걱정했다.

    부가 직업도 아니고 본직업이 대장장이인 저렙 플레이어가 필드를 돌아다니면 필시 많은 문제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를 지킬 누군가가 필요했다.

    왈로는 동료들이 올 때까지 드웨이크를 지켜 줘야 했고 당장 정혁에게 붙일 만한 사람은 하늬안밖에 없었다.

    하늬안이 격렬하게 저항해 보았지만 드웨이크는 단호했다.

    하늬안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무기를 쥐고 일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 걷기는 결코 싫었기 때문에 시간을 좀 두고 그를 쫒기로 했다.

    그녀는 일단 중립 지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철 망치에 다시 들러서 내구도가 바닥을 보이고 있는 무기를 다시 수리받고 드웨이크에게 반항하는 마음을 담아 일주일간 푹 쉰 뒤 정혁의 흔적을 찾아 중립 지역 엔토리아를 떠났다.

    폭발하는 화염을 발견한 것은 엔토리아를 떠나고 몇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뜨거운 바람이 순식간에 하늬안을 통과해 지나치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불길이 하늘을 잡아먹을 듯이 치솟고 있었다.

    하늬안은 재빨리 몸을 돌려 엔토리아 쪽으로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선 엔토리아 근처 산 정상에서 불길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엔토리아의 마을 지구를 볼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강한 분노로 마구 고함을 내지르고 있는 불의 정령왕 라테가 있었다.

    하늬안은 라테를 처음 보았다.

    압도적인 크기와 위용, 한참 멀리 있었지만 전해지는 맹렬한 화기.

    저 아래의 마을 지구에 수도 없이 많은 플레이어들과 주민들은 아마도 유명을 달리했으리라.

    강철 망치 본점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에드가는 어떻게 됐을까? 걱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다가갈 수도 없었다.

    조 패더럴도 그도 아마 살아 있으리라 짐작하는 수밖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늬안은 은연 중에 눈치채고 있었다.

    에드가가 장갑을 벗었을 때 발견했던 상처투성이의 손을 통해서 그가 단순히 상인이 아니라 실력 있는 싸움꾼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충분히 도망쳤을 거야.’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하늬안은 몸을 돌렸다.

    다른 강철 망치 대장간에서 그들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정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늬안이 레이드 팀에 소속된 것도 추적에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정혁을 발견하는 데 십분 활용됐다.

    정혁은 다른 일행들 무리에 섞여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자식,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구만.’

    하늬안은 멀리서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가뜩이나 불편한 사이인데 같이 이동해 봤자 좋은 말이 오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그가 난관에 빠져 실컷 두드려 맞고 있을 때 ‘짠’ 하고 자신이 나타나 구해 줌으로써 일전의 오만 방자했던 정혁의 모습을 완벽히 무너트리고 싶었다.

    그래 봐야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지금, 또 한 방 먹은 것은 그녀였다.

    무려 알아챈 지 일주일이 됐는데도 티도 안내고 모른 척 하다니.

    이건 역으로 하늬안이 당한 격이다.

    몰래 쫒느라 나름 이런 저런 고생을 했던 것도 그녀였다.

    ‘속으로 얼마나 키득거렸을 거야, 저 악랄한 자식이.’

    하늬안이 이를 갈았다.

    그녀는 물 자루를 다시 품에 넣고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려 걸어가는 정혁의 뒤통수를 향해 외쳤다.

    “야, 이 자식아!”

    그럼 그렇지.

    정혁은 피식 웃으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날카로운 대도가 정혁의 얼굴 측면을 스치듯 지나쳤다.

    정혁은 난데없이 시작된 위협에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아우, 너는 진짜, 한결같이 재수탱이야!”

    하늬안이 단박에 달려와 정혁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얼마나 세게 흔드는지 머리와 몸이 분리될 것만 같았다.

    “어, 억, 으억, 자,잠까, 악, 으악”

    하늬안은 곧 흔드는 걸 그만두고 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소량의 HP가 닳았다.

    동시에 오랜만에 정혁의 자존심에도 금이 갔다.

    ‘제기랄, 이 비루한 몸뚱이가 또….’

    그녀는 팔짱을 끼고 정혁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욕이다, 욕하고 있다.

    당장에 일어나서 한 방 갈기고 싶지만 그의 물 주먹은 아마 그녀의 성질만 돋우고 말 것이다.

    정혁은 몸을 일으켜 먼지가 묻은 자신의 옷을 툭툭 털어 내고 하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비웃듯이 웃어 보이곤 뒷짐을 지고서 일행들을 향해 걸어갔다.

    하늬안은 이빨을 꽉 깨물고 주먹을 쥔 채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드웨이크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얼굴에 수십 번 펀치를 먹여 줬다가 크게 심호흡하고서 어느새 멀어진 정혁의 뒤를 쫓아 걸었다.

    고개를 숙이고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기에 나름대로 양손 무기 검사들 중에서 천천히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자신이 이런 저렙 플레이어 뒤나 닦아 주는 신세가 됐는지 복기하고 있던 하늬안은 갑자기 멈춘 정혁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의 등 뒤에 부딪쳤다.

    일행들이 있던 곳의 기운이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정혁은 하늬안과 함께 근처 돌 사이로 숨어들었다.

    피 냄새.

    주변에 천천히 퍼지고 있는 것은 비릿한 피 냄새였다.

    하늬안은 정신을 차리고 정혁에게 이곳에 있으라는 신호를 보낸 뒤 모닥불 근처로 조금씩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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