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화 (9/200)
  • ◈9화

    드웨이크는 추측해 보았다.

    방금 황금빛 마나의 흐름 속에서 해체되었다가 다시 조합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시간의 귀속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그의 중얼거림에 정혁은 드웨이크를 바라보았다.

    비슷한 생각이리라.

    그의 능력은 특별한 조건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항상 황금빛 활성화 효과가 따라왔다.

    황금빛은 보통의 마나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오아시스에서 황금빛 마나는 시간의 조율자와 관계가 깊다.

    정혁이 개방하고 닫는 이공간 속 대장간도 평범한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 더 알아봐야 하지만 특별한 설명이 따라오지 않는 한 항상 이렇게 현장에서 부딪치는 수밖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꽤 먼 옛날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달고 있었던 특별한 마법사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잠깐이었지만 곁에 있는 것만으로 확연히 그의 남다른 강함을 느낄 수 있었죠. 오아시스 뒤에 어떤 칭호가 붙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 세계의 이름이 붙은 칭호는 처음 봤기에 그 부분만큼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드웨이크의 말에 정혁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한’이었을 때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칭호다.

    “더불어 그들끼리의 집단이 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자들의 집단이 있단 말입니까?”

    드웨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이 알아봐야 할 것이 하나 생겼다.

    “당시 주변의 모든 자들을 압도했던 그 마법사의 존재감을 되새겨 보면 당신의 이런 능력들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걸까요?”

    드웨이크의 말에 정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는 선택을 받은 것일까? 저주를 받은 것일까?

    “어찌되었건 미리 알려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해서 유리하게 이어 가려고 하는 거겠죠?”

    정곡을 찔렸다.

    왈로의 무기에서 수정을 다시 귀속 시킬 수 있다는 활성화 창을 보면서 정혁의 마음속에는 제논의 기사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혁은 드웨이크에게 ‘긴급 전음 채널의 개설 허가권’을 요구했다.

    물론 아크 제국의 타깃이 되었기에 얼마만큼 그들의 세력이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과의 ‘긴급 전음 채널’을 공유한다면 위험한 순간에 도움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정혁의 직업으론 앞으로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긴급 전음 채널의 개설 허가권을 드리지요. 왈로의 무기를 유지 보수해 주시기만 한다면 제논의 기사단은 항상 당신의 편에 있을 겁니다.”

    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작은 양피지가 형성되었다가 사라졌다.

    이제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제논의 기사단 마스터와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알겠지만 당신네는 위험한 상황이에요. 아크 제국에서 제논 자체를 사냥감으로 삼은 것 같으니.”

    정혁이 한마디 건네자 드웨이크가 다시 한번 쿡쿡거리며 웃었다.

    “별걸 다 걱정합니다. 기억하세요, 당신 고작 25레벨짜리 플레이어입니다.”

    ‘오지랖. 어휴. 실수했네.’

    드웨이크는 입맛만 다시는 정혁을 보면서 조금씩 아려 오는 상처를 손으로 눌렀다.

    200레벨이 넘으면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 레벨이 표시가 되지 않는다.

    성장이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부터는 개인의 역량이 곧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을 나타낸다.

    오아시스가 오픈한 이래 꽤 긴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저렙 플레이어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거니와 저렙 플레이어 입장에선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고작 25레벨의 플레이어가 감히 제논이라는 왕국을 걱정하고 있다.

    마치 모든 정세를 다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아이러니다.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

    “뭐, 걱정한다기보다는 제논의 기사단이 보다 더 오래 제게 보험이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정혁은 애써 말을 돌려 놓고 자리를 털어 일어났다.

    이제는 이들과 헤어질 때다.

    이들 덕분에 스스로의 능력도 알게 됐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물론 목숨의 위협도 있었지만 나쁘지 않은 보상이 따랐다고 믿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왈로가 정혁에게 물었지만 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전처럼 말 위에 앉아 말이 가는 대로 걷다 보면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을 만나거나 어떤 사건들을 마주하겠지. 조급해 봐야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무기에 문제가 생기면 저를 찾기를 바라요. 부디 제논이 더욱 강대해지를 소원합니다.”

    왈로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하늬안이 돌아왔을 때 동굴에는 드웨이크와 왈로밖에 없었다.

    “특별한 건 없었지?”

    “위험한 징조는 없었어요. 주변에 신경 써야 할 몬스터도 없고 흔적도 없네요. 제논으로 향한 팀원들은 연락 왔어요?”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했어. 전음 채널이 불안해서 도청당할 수도 있으니까.”

    하늬안은 왈로의 무기에 눈을 돌렸다.

    그리곤 다시 동굴을 둘러보았다.

    그가 떠났다.

    “그 사람은 갔나 보네요?”

    “응. 어디로 가는지 말은 없었지만 분명 다시 만날 거야.”

    하늬안은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곤 드웨이크에게 다가갔다.

    “팀장. 몸은 어때요.”

    하늬안의 말에 드웨이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여전히 산송장이면서 무슨 소리야.”

    “하늬안.”

    드웨이크는 몸을 돌리려는 그녀를 멈춰 세웠다.

    “왜요?”

    “부탁이 있는데.”

    “부탁?”

    “정혁님을 따라가 줘.”

    하늬안은 갑자기 전신에 돋아 오르는 소름에 몸서리를 치고는 비명에 가까운 물음을 뱉었다.

    “예에??!”

    ***

    화염 속에 대장간이 불타오르고 있다.

    카탈의 중립 지역 엔토리아에 위치한 유명 대장간인 강철망치 본점이 집채만 한 화염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대화로의 불꽃은 더 큰 불길에 휩싸여 춤추듯 타올랐다.

    조 패더럴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정체 모를 자들에게 끌려 나와 대장간의 불길 앞에 심판받듯이 섰다.

    대장간이 지역 외곽에 있었음에도 워낙 거대한 화염 때문에 주변엔 구경꾼들이 넘쳐 났다.

    조 패더럴의 악명이 널리 퍼져서일까, 그들 중에 누구도 그를 도우려는 자가 없었다.

    에드가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주변에서 함께 망치질을 하던 동료들도 없었다.

    “어이, 싸가지.”

    조 패더럴의 앞에 작은 의자가 놓이곤 그 의자에 어떤 의문의 남성이 앉아 그를 불렀다.

    조는 부은 눈으로 힘겹게 그를 바라보았다.

    작게 기침을 하자 입에서 붉은 핏덩이가 흘러 내렸다.

    “어디 갔는지 알려 주면 될 거 아냐.”

    의문의 남성은 장검을 꺼내 조의 턱 끝에 대고 살짝 올렸다.

    얼마나 날카롭게 갈려 있는지 턱에 대어 올리기만 했는데도 닿은 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허헛, 이 새끼가….”

    조는 헛웃음을 치면서 힘겹게 침을 삼켰다.

    남자가 장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고 고개를 살짝 흔들자 그의 곁에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조의 복부에 가차 없이 발길질을 했다.

    그가 타오르는 불길 가까이까지 밀려났다.

    남자 곁에 있던 검은 정장들은 다시 조를 일으켜 남자 곁에 꿇어 앉혔다.

    “조. 내가 어려운 부탁했어?”

    “…쿨럭…. 그럼, 그럼 그럼. 아주 어려운 부, 부탁이지.”

    조 패더럴의 기세는 줄지 않은 것 같았다.

    조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일생을 함께한 대장간이 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자식 잘 지내고 있을까.

    망나니 같은 자식을 내보내고 일주일 만에 강철 망치의 분점들이 하나둘 공격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당한 일이었다.

    대장간은 여러 길드 혹은 국가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관계가 하나둘씩 파기된 것은 물론이고 이젠 공격까지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있던 와중에 대장간을 공격하고 있는 자들이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특별한 칭호를 가진 플레이어를 말이다.

    조는 단박에 떠올렸다.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은 정혁이다.

    이상했다.

    정혁이 강철망치에 있었던 시간은 무려 3년이다.

    그동안에 이런 일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때도 정혁의 칭호는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였다.

    그가 알던 정혁은 그저 순수하고 정직한 청년이었다.

    실력만큼은 미미했지만 조는 그런 그가 멘탈만이라도 강해지기를 원했기에 늘 한결같이 강하게 밀어붙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아침에 그가 변했다.

    괴이한 느낌에 조는 그를 테스트해 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정혁은 다음날부터 대장간에서 보이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더 붙잡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도 그간 쌓인 정 때문인지 가끔은 떠난 정혁이 궁금하긴 했었다.

    이들은 왜 3년간 조용하다가 이제 와서 그를 찾고 있을까? 정혁의 모습이 갑자기 변한 것도 이들의 이런 행동들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걸까? 모든 협력 관계의 세력들이 일순간 관계를 끊어 버린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한이 떠나고 가뜩이나 하락세를 이어 갔는데 이제는 몰락의 길까지 걷고 있었다.

    조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강철망치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네놈의 신념은 알겠다만 신념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거야?”

    의문의 남자는 조롱하듯이 싱글거리며 말했고 조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화염 냄새가 아득히 퍼졌다.

    익숙한 냄새이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슬프게 느껴졌다.

    조는 알고 있다.

    죽을 것이다.

    날을 시퍼렇게 갈고 찾아온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구태여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념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단다, 꼬맹아.”

    조의 말에 의문의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짙은 갈색 눈썹이 일그러졌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던 그는 재킷의 가운데 단추를 풀었다.

    빨간 색 배경에 검은 말 모양의 자수가 새겨진 넥타이가 좌우로 조그맣게 흔들렸다.

    “꼬맹이라니, 조. 말이 심한걸?”

    순간 조의 어깻죽지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더불어 차가운 기세가 스치더니 붉은 피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오른팔부터 어깨까지 깔끔하게 잘려나간 조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에 찬 비명을 참아 냈다.

    그는 상처 부위를 부여잡고 충혈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 네놈들의 속셈은 내가 이, 익히 잘 알지. 이 개, 개새끼들아.”

    남자는 장검을 몇 번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붉은 색 손수건을 꺼내 검을 닦았다.

    검은 정상의 남자들.

    오아시스의 뒷세계를 정복하고 오아시스의 모든 세력들을 쥐고 흔든다는 그들.

    세계에 계속해서 전쟁의 불길을 일으키는 그들.

    조는 5차 대전쟁 이후 폐허가 되어 버린 난민촌에서 정혁을 처음 만났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쓰레기처럼 잠들어 있던 그를 기억한다.

    “진짜 마지막이야. 팔 하나쯤은 우리 쪽에 있는 유능한 회복계 마법사를 통해서 금방 치유시켜 줄 수 있어. 대장간은 우리 쪽 재력으로 충분히 복구시켜 줄 수 있고. 야야, 말 한마디면 되는 거 아냐.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로 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남자는 쓰러진 조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치면서 말했다.

    조는 그를 바라보다가 뭔가가 떠오른 것처럼 빙긋 웃었다.

    “꼬맹아, ‘한’이라고 알, 알고 있냐?”

    남자는 조의 머리를 휘어잡고는 그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그 씹어 먹을 자식은 내가 잘 알지….”

    조는 혀를 굴려 금이빨의 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빨이 쉽게 뽑혀 나왔다.

    “하, 한이 내게 준 선물이 있지.”

    남자가 조의 머리를 흔들면서 물었다.

    “그 새끼가 뭘 줬는데?”

    조는 금이빨을 그에게 보여주면서 싱긋 웃었다.

    그리곤 이빨을 깨물어 박살냈다.

    애초에 이빨이 아니었던 듯 쉽게 깨진 이빨과 함께 대장간의 불길이 더욱 거세게 치솟았다.

    마치 하늘에라도 닿을 듯이 폭발적으로 치솟은 불길은 소용돌이치며 확장되었다.

    조는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강철 망치는 오늘부로 폐업이다, 꼬맹이 새끼야.”

    남자는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고 금세 그가 있던 곳까지 화염이 닿았다.

    조는 화염에 휩싸였다.

    화염은 점점 형체가 되더니 과거에 사라졌던 불의 정령왕 라테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주변의 구경꾼들과 검은 정장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자식.”

    의문의 남자는 화염 속에 그을려 가는 조에게 침을 뱉고는 정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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