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정혁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긴 하루였지만 소득이 없는 하루는 아니었다.
언제 돌아왔는지 하늬안과 왈로가 무리에 섞여 잠들어 있었고 왈로는 그의 검과 방패를 다소곳이 옆에 두고 있었다.
‘다시 봐도 참 잘 만들었다 싶다.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정혁은 입맛을 한 번 다시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하루를 복기해 본다.
에드가의 광기로 시작해서 제논의 기사단과 만나고 키메라를 죽였다가 전설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무력화 시킨 것까지.
과거 ‘한’이었을 때엔 이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일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펼쳐졌지만 모두 자력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잘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혁은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바늘구멍을 뚫어 내는 격으로 겨우 성장해 가고 있기 때문에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욕이나 뱉어야 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정혁은 몸을 일으켰다.
드웨이크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지만 호흡으로 보아 천천히 회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에 뜬 두 개의 달에서 비추는 달빛이 땅을 포근하게 적시고 있었다.
조금 가까이서 그의 말이 보였다.
정혁은 진심으로 반가워서 말에게 다가가 고삐를 당겼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말은 정혁의 손길에 순응해 그를 따랐다.
“짐을 다 잃어버리는 줄 알았네, 어휴.”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말이 없으면 힘든 여정이다.
오아시스에는 많은 탈 것들이 있지만 역시 사람에게 제일 온순한 탈것은 말만 한 것이 없다.
튼튼하고 충성스럽다.
그는 동굴 근처에 말을 묶어 놓고 근처에 기대앉았다.
다시 한숨 청하려는 그의 곁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혁이 눈을 뜨자 하늬안이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받은 적색의 머리카락이 오묘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마냥 밉상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 미친.’
할 수만 있었다면 정혁은 자신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밉상이야. 저건 그냥 밉상.’
“고맙다고 해 두죠.”
“해 두죠?”
정혁은 하늬안의 말을 곧바로 되받아치며 코웃음을 쳤다.
뒤로 월광이 비추고 있어서 하늬안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술이 씰룩거리는 걸로 봐서는 온갖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큰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며 정혁의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미안해요. 여러모로…. 제가 많은 실례를 범했습니다.”
“어휴, 저 같은 쪼렙에게 그러실 필요 없으십니다요.”
“…진짜 자꾸 그러실 겁니까?”
하늬안이 그를 흘겨보았다.
성격상 누구에게 사과하는 것이 서투른 하늬안에겐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
하지만 분명 사과를 해야 했다.
왈로가 거듭 그녀에게 부탁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는 팀장과 팀원들을 살린 것도 정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강철 망치에 있었을 때는 허름한 저렙 플레이어일 뿐이었다.
아직 오아시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풋내기.
더불어 싸가지까지 없는 사람.
그러나 지금은 분명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가까이하고 싶지만 쉽게 손을 뻗지는 못하겠는 그런 사람 말이다.
정혁은 그녀를 그만 골려 주기로 했다.
이래저래 피차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순간에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났으니까.
게다가 이미 ‘한’일 때 충분히 그녀를 괴롭혔었다.
정혁의 몸으로 그녀를 만났을 땐 더 괴롭히지 못해 아쉬웠지만 대충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요. 사과를 하셨으니 받긴 하겠습니다.”
정혁의 말에 하늬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혁은 그녀를 흘깃 보곤 다시 머리를 기대 누웠다.
자리를 뜨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늬안이 다시 동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미 피로도는 충분히 회복되었지만 자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은 주변에 우호적인 자들이 있으니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
이런 야지에서의 평화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경우가 아니기에 지금을 즐겨야 했다.
***
부산스러운 아침이다.
정혁이 눈을 떴을 때는 세 명의 팀원이 짐을 꾸려 왈로에게 어떤 지시를 받고 동굴을 떠나고 있었다.
정혁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켰다.
왈로가 일어난 그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다가왔다.
그리곤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정혁 님!”
‘워우, 어우, 야. 이게 무슨….’
“왜, 왜 이러세요…!”
정혁이 손사래를 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재빨리 그곳에서 이탈했다.
동굴로 돌아왔다.
다행히 드웨이크가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는 동굴 벽에 기대 있었고 따뜻한 모닥불의 온기에 지친 심신을 치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드웨이크 역시 정혁의 등장에 반가운 미소를 지었으나 왈로 만큼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제논의 기사단 마스터를 대신해… 감사를 표합니다.”
드웨이크는 아직 힘겨운 듯 입을 뗐다.
정혁은 그에게 빙글 웃으면서 인사를 꾸벅 했다.
그리곤 밖에서 잠들어 아침 이슬을 맞았던 몸을 녹이기 위해 모닥불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왈로 역시 다시 안으로 들어와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정리하고는 드웨이크 곁에 앉았다.
“참 묘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드웨이크의 말에 정혁은 작게 미소 지었다.
정혁도 그 말에 동감이었다.
“하지만 굳이 궁금해하진 않겠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언젠간 다 이해가 되겠죠.”
왈로는 드웨이크에게 달여진 차를 건넸다.
그리곤 정혁에게도 동일하게 차를 건네주었다.
따뜻함이 몸 전체를 감싸는 것 같았다.
“글쎄요, 저도 아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 보니 애초에 물어보셔 봤자 대답을 해 드릴 수가 없네요.”
그의 말에 드웨이크는 찻잔에 입김을 불다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옆구리가 아픈지 손을 옆구리에 대면서도 말이다.
“당신다운 말입니다.”
드웨이크는 다시 큰 숨을 들이 쉬고 말을 이었다.
“동료들을 제논에 돌려보냈습니다. 40여 명이 함께 출발했지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우리들 포함해서 여섯 명뿐이군요. 죽는다고 해서 다시 못 볼 동료들은 아니지만 패널티는 분명 존재하니까요.”
죽음의 패널티.
플레이어들은 본연의 HP 즉, 체력을 전부 소진하게 되면 죽음 상태에 접어든다.
모든 것이 현실과 동일하게 설정된 오아시스 안에서의 죽음은 실질적인 고통과 공포를 동반한다.
죽음을 경험한 플레이어들이 다시 접속할 수 있는 데에는 현실의 시간으로 반년이 걸린다.
오아시스의 시간으로 1년이 지나고 나서야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접속이 가능하다고 해도 일차적으로 접속 전 AI를 통해 정신 감정을 받게 되어 있다.
더러는 죽음을 통해서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가지고도 중독 증세를 이기지 못해 접속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변태적인 성향으로 죽음을 간접 경험하기 위해 접속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AI 감정을 통과하고 다시 접속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왕국 혹은 길드가 없어졌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나 아이템 등이 낡아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순식간에 변화하는 오아시스 세계의 균형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그렇기에 오아시스에서의 죽음은 많은 의미에서 무겁고도 사실적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동료의 공백은 집단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훌륭했어요. 모든 부분에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랬었지만.’
끓어오르는 자기애를 정혁은 억지로 집어 삼켰다.
“위로까지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의 말을 끝으로 잠시의 정적이 찾아왔다.
하늬안은 어디 갔는지 동굴로 돌아오지 않았고 왈로가 몸을 일으켜 동굴 입구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라도 하는 걸까.
참, 빈틈없이 열정적인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데….
“어… 드웨이크 님. 그리고 왈로 님?”
정혁은 인벤토리에서 키메라에게 얻은 각종 아이템들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개인 소유 시간이 모두 해제되어 정상적인 거래가 가능했다.
낮은 등급에서 꽤나 높은 등급까지 다양한 부류의 아이템들이 나열됐고 왈로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며 하나씩 주워 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정혁의 말에 그들이 다시 집중했다.
“왈로 님의 무기 세트를 보면 아마 제작자가 명시되어 있을 겁니다. 대장간에서 특정 대장장이가 제작한 무기라면 당연한 부분이지요.”
왈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아시스의 대장장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무기에 적용된 재료인 맹독염화 속성의 붉은 수정의 귀속 권한이 제게 있기 때문에 제가 원하면 제 손으로 왈로님의 무기를 다시 원상 복구시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이를테면 이렇게 말입니다.”
[이웃의 수호자 왈로의 무기에서 대장장이의 귀속을 해제하시겠습니까? YN]
‘해제해.’
정혁은 자신의 아래에 활성화된 붉은 상태 창을 통해 간단히 명령을 수행했다.
그와 동시에 왈로가 동굴 벽에 기대 놓았던 무기에서 황금빛 빛이 발현되더니 붉은 수정이 정혁의 손에서 천천히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왈로의 무기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왈로의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어억!”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왈로는 털썩 무릎을 꿇고는 허름해진 자신의 무기와 정혁의 손에 쥐어진 붉은 수정을 번갈아 보면서 울상을 지었다.
드웨이크는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이건 보통의 장비 해체 수준에서 벗어났다.
물론 몇몇의 원소술사나 연금술사를 통해서 혹은, 극히 드문 케이스이긴 하지만 해체를 주로 하는 대장장이를 통해서 장비 해체 후 재료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원래 본연의 재료들을 얻어 낼 수 없을뿐더러 그것이 최초 귀속자의 명령에 의해 한순간에 뚝딱 실행되지도 않는다.
이 과정은 분명 정상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붉은 수정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상태를 확정하시겠습니까? YN]
‘아니.’
다시 한번 정혁의 명령에 붉은 수정과 왈로의 무기는 황금빛 물결 속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일련의 과정은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거리에 제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보셨다시피 제가 원하면 언제든 왈로의 무기는 본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왈로는 다시 멋들어지게 붉은 기운을 뽐내는 자신의 방패와 검을 향해 달려가 방패는 등에 한 손 검은 허리에 결속했다.
“그렇다면 사실 모든 권한이 정혁 님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무려 왈로의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아? 아니, 그 정도까지 깊이 있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데…?’
정혁은 잠시 당황했다.
사실 보여 주고 싶긴 했다.
테스트 겸 해서 말이다.
자신이라고 알았겠는가? 뻔뻔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서 있었지만 왈로만큼 정혁 본인도 놀랐다.
대장간에서의 작업 없이 일종의 ‘마나’에 의해서 해체되고 다시 구성되는 것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하기야 드웨이크의 말대로 왈로가 전투 중에 정혁이 귀속을 해제해 버린다면 말 그대로 목숨을 버리게 되는 상황에 처할 것이 뻔했다.
‘그래, 결론적으로 모든 키는 내가 쥐고 있는 거지.’
“그럴 리는 없습니다. …아직까지는요.”
정혁의 말에 드웨이크도 왈로도 침묵했다.
관계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참고만 해 주세요. 협박은 아닙니다. 보험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보험이라…. 꽤나 위협적인 보험이군요.”
드웨이크가 조용히 혼잣말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