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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7화 (7/200)
  • ◈7화

    마치 프로그래밍이라도 된 것처럼 정혁의 신체는 왈로의 무기를 재구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자의에 의한 행동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몸을 뒤에서 관찰하는 것 같은 괴이한 느낌이었다.

    하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장간에 있었던 것은 정혁이 아니다.

    이 이상한 캐릭터가 그 안에 있었을 뿐 대장 기술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

    그는 타고난 싸움꾼에 암살을 즐기는 플레이어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시도해 본 재구성은 역시 일전에 경험했던 붉은 수정 채광 때처럼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완벽하게 방패와 한 손 검이 완성되고 있었다.

    염려되는 것은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멍청하긴 했네. 5분으로 가능할 리가 없잖아.’

    몸이 알아서 움직이니 정혁은 그저 생각만 하기로 했다.

    애초에 가능한 거래는 아니었지만 그 녀석들도 급박하긴 했던 모양이다.

    드웨이크라는 양반도 산전수전 다 겪어 본 것 같더니 침착함을 잃어 이런 이상한 놈한테 사활을 걸고 말았다.

    ‘내가 멍청한 게 아니라 제논의 기사단 놈들이 멍청한 거지 뭐. 그런데 내가 굳이 가야 되나? 그 사지로?’

    정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시간은 한참 흘러갔다.

    바깥은 이미 정리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레이드 팀의 전력은 거의 바닥이었고 해 봐야 비명이나 꽥꽥 지르는 시끄러운 여자 한 명 말고는 제대로 싸울 사람도 없다.

    잠깐이었지만 적들이 남은 레이드 팀원들을 효율적으로 압도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거 봐, 이거…!’

    정혁의 눈동자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붉은 수정의 능력이 온전히 담긴 완벽한 무기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기본적으로 왈로가 가지고 있던 무기의 구성 재료들이 나쁘지 않았다.

    고가의 광석들로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제련한 세트 효과를 가진 무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오아시스의 대장장이가 재구성해 탄생한 이 무기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무려 맹독염화라니. 진짜 희귀한 속성인데, 대박이네 진짜.”

    맹독염화.

    보통의 독과는 다르게 화염 속성을 띈 독을 말한다.

    검날에서 맹독이 연기처럼 발생하는데 이 검날이 무엇인가에 부딪쳐 작은 불꽃이 튀기만 해도 주변에 뿌려진 연기에 불이 붙어 폭발한다.

    폭발과 동시에 화염과 연기 속에도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 흩어지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연기를 흡입한 적의 몸 안에서 화염 폭발을 유발시킬 수 있다.

    사용자의 숙달 정도에 따라서 더욱 잔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속성이 맹독염화 속성이다.

    또한! 엄청나게 비싸다.

    순간 정혁의 눈이 금화로 바뀌었다가 돌아왔다.

    맹독염화의 속성 자체가 말도 안 되게 강하기 때문에 세계에 많이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이렇게 무기로 제련된 물건들은 더욱 드물다.

    제련 성공 확률 역시 극히 낮다.

    정혁은 망할 강철 망치의 빌어먹을 줘 패도록도 아마 경험해 보지 못 했을 거라 생각했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절망 속에 있었는데 랭킹 1위가 될 수 있는 길이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았다.

    ‘결국 돈이 최고 아닌가? 돈으로 다 사 버릴 거야. 힘이든 땅이든! 돈으로!’

    정혁은 피식 웃으면서 완성된 귀요미를 쓰다듬었다.

    후끈후끈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이웃의 수호자 왈로의 장비가 완성되었습니다.]

    “…뭐?”

    [이웃의 수호자 왈로의 장비가 완성되었습니다. 계약 시간이 60초 남았습니다. 대장간을 나가시겠습니까?]

    잠깐, 잠깐만.

    소유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야? 아니 그리고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가야 된다니?

    정혁이 다시 한번 그의 크고 아름다운 무기에 손을 댔다.

    [소유자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대장장이의 계약에 의해 요구자의 소유로 귀속됩니다.]

    “죽 쒀서 개 주라는 거냐?”

    정혁이 고함을 지르며 제련 망치를 집어 던졌다.

    “역시 이 빌어먹을 직업이 그럴 리가 없지! 아주 그냥 철저하게 일꾼이구만! 쓸데없는 일꾼이야!”

    정혁이 하늘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계약 시간이 30초 남았습니다. 공간이 무너집니다.]

    주변에 활성화되었던 대장간의 각종 구성품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바깥 상황이 천천히 보였는데 충분히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에는 마치 이제야 도적 떼에게 사로잡힌 듯한 기사단 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상황을 보니 정혁이 대장간에 들어온 지 5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드웨이크의 어깨에는 관통상이 있었고 복부로 피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복면의 남자가 막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무조건 나가야 되는 건가? 지금? 저기를?”

    정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희귀한 무기를 완벽히 만들어 냈다고 한들 왈로는 묶여 있고 다른 사람들은 이 무기를 쓸 수조차 없다.

    완성하고 보니 무게도 상당해져서 정혁이 스스로 이걸 들고 싸울 수도 없었다.

    만든 본인이기 때문에 활용을 할 수는 있지만… 그때 그의 머리로 비상한 아이디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맹독염화의 속성을 이용해 보는 거다.

    정혁은 ‘한’이었을 때의 본능적인 전투 감각을 다시 살려 보기로 했다.

    대장간이었던 공간이 완전히 무너지고 현실의 경계를 지나 모든 것이 선명해질 때 그는 있는 힘껏 왈로를 불렀다.

    “왈로!”

    왈로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정혁이 이공간을 완전히 벗어났다.

    “야, 야야! 빨리 받아! 아우 씨!”

    그는 외침과 함께 한 손 검과 방패를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왈로 앞으로 던졌다.

    한 손 검은 왈로 쪽으로 잘 던져졌지만 방패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정혁의 앞에 떨어졌다.

    나오고 보니 빠르게 상황 판단이 되기 시작했다.

    정혁은 어렴풋이 검은 복면의 도적 떼 집단에게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식별해 냈다.

    이들에게서는 미묘하지만 안티아구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냄새가 났다.

    안티아구아는 고기를 저며 말릴 때 섞는 첨가제를 제조하기 위해 활용되는 식물이다.

    사실 안티아구아는 돼지고기나 소고기 같은 일반적인 고기로 육포를 만들어 보관하는 데에 필요하지는 않다.

    안티아구아 냄새가 난다는 건 이 더러운 집단의 배후에 카탈의 아크 제국이 서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죽음과 고통의 악마 아크를 섬기는 광신도 집단.

    공포 정치로 대륙 카탈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강대한 제국인데, 그들은 다른 종족의 살이나 더러는 인간의 살도 건조해서 육포로 만들어 먹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신생 왕국 제논을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짓밟겠다는 그들의 강력한 의지 표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검은 복면의 인물들은 이공간에서 튀어나온 정혁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러나 정혁에겐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그는 번쩍 몸을 일으켜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야, 야야!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내가 인마! 너네 그 악마인가 뭔가 하는 놈이랑 어제도 연락했던 사이야, 이 자식아!”

    이미 뒤로 두 손을 붙잡힌 상태였지만 필사적으로 몸을 비트는 정혁과 그의 발언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아진 도적 떼의 우두머리.

    그리고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 보려는 팀원들과 드웨이크.

    왈로는 딱 보기에도 뭔가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무기에 대한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혁은 속으로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조금 더 빨리 이곳 전체에 맹독염화가 퍼지기를 기다렸다.

    “고작 레벨 25짜리 대장장이가 이공간에서 나오다니.”

    우두머리는 순식간에 드웨이크의 옆구리에 꽂혀 있던 단검을 뽑아 정혁에게 겨누었다.

    “게다가 그런 불경스러운 소리를 입에 담아?”

    ‘그럼 그렇지. 광신도들이란. 그저, 자기가 믿는 존재의 이름을 거들먹거리기만 해도 이성이고 자시고 다 내팽개친다니까.’

    정혁의 코끝으로 화염 섞인 맹독의 비릿한 냄새가 퍼졌다.

    맹독염화의 효과는 소유자가 적으로 인정하는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정혁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계획대로 자신의 발 앞에 떨어졌던 방패를 걷어차 검날과 부딪치게 만들었다.

    작은 불꽃과 함께 주변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굉음은 상당했지만 정혁과 더불어 팀원들은 모두 멀쩡했다.

    붙잡혔던 손이 풀리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정혁은 만족하는 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하- 하- 하- 핫- 완벽해, 와안벽해.”

    “정혁 님! 묶인 끈을 어서!”

    본인의 능력에 심취한 정혁에게 왈로가 다급히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이미 그는 자아도취에 빠졌기 때문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왈로는 몸을 한 바퀴 굴려 그의 검 옆에 다가간 다음 한 번에 묶인 끈을 끊어 내고 무기를 쥐었다.

    폭발의 화염과 더불어 독까지 스며든 도적 떼 전체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왈로는 대번에 자신이 어마어마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맹독염화!”

    왈로는 바닥에 누워서 아직도 박수를 치고 있는 정혁을 향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 줘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은 팀원들을 구해 내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모두의 결박을 풀고 하늬안에게 검을 쥐어 준 뒤 나머지 팀원들에게 드웨이크를 부탁했다.

    “정혁 님! 같이 후퇴하시죠. 기회는 지금 뿐입니다!”

    “왈로! 어때? 죽이죠? 죽이지 아주 그냥? 말해 봐요!”

    “아, 그건 나중에! 나중에 하시고!”

    ‘야, 얌마! 그게 제일 중요하지 인마! 그걸 왜 나중에 말해!’

    정혁이 속으로 고함을 내지르는데도 불구하고 하늬안과 왈로를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이 그와 드웨이크를 붙잡고 포위를 벗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검은 복면의 도적 떼가 붙을 수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맹독염화의 타격이 큰 듯했다.

    하기야 그들이 맹독염화에 당하는 상황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곳에 모인 모두에게 같은 디버프가 적용 되었을 테니 말이다.

    처음에야 조금 견딜 수 있다고 해도 독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장기적으로 노출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게다가 폭발하는 독이라면 견딜 수 있는 시간 역시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결국은 후퇴하게 될 거야.”

    한 팀원의 어깨에 낭창하게 들쳐 메져서 순식간에 그곳을 이탈하고 있는 정혁은 그곳에 남은 왈로와 하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보인다. 하늬안, 저 여자의 당황스러운 표정. 아하하하하 통쾌해라. 아하하하하 어떠냐, 이 녀석아! 나야, 승부사 한이라고! 한!’

    폭발은 몇 번 이어졌다.

    노련한 기사인 왈로는 금세 무기의 활용법을 익힌 듯했다.

    시험 상대라고 하기엔 그리 만만한 적들이 아니지만 맹독염화 속성이 부여된 무기 앞에 도적 떼의 연계 공격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맹독염화 자체가 광범위 공격이기에 근접 전투에 특화된 이들에게는 쥐약일 테니.

    재빠른 움직임 덕분에 어느 작은 동굴에 몸을 숨긴 그들은 정혁을 내려놓은 후 드웨이크의 상태를 살피기에 바빴다.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좌측 옆구리의 자상과 어깨의 관통상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팀원들이 회복과 관련된 아이템들을 꺼내 먹이고 발랐지만 효과가 없어 보였다.

    “아크의 도적들이면 쉬운 독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회복약으로는 택도 없어요.”

    정혁의 말에 팀원들 중 하나가 몸을 돌려 물었다.

    “아크…라면 북부의 아크 제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정혁은 작은 유리병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유리병에 드웨이크 씨의 피를 받아 주세요. 그리고 주변에서 월광초와 유랑이끼를 구해 주십시오. 두 개를 잘게 갈아서 끓여 먹이면 해독이 되기 시작할겁니다.”

    정혁의 말에 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본인이 원해서였지만 참 많은 적들에게 다양하게 당해 봤던 정혁에게 이 정도의 해독 조합법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드웨이크의 피는 정혁이 챙겨 넣었다.

    그들만이 사용하는 독성분이 피에 섞여 있을 것이기 때문에 후일에 분명히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드웨이크에게 해독약을 먹이는 것을 보면서 정혁은 슬슬 자신의 피로도가 한계에 달함을 깨닫고 동굴 벽에 기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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