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6화 (6/200)
  • ◈6화

    상황이 좋지 않다.

    제논의 기사단 팀원들 중 이미 몇은 적의 손에 의해서 사라졌을 것이고 남은 인원들도 지친 상태다.

    무엇보다 가지고 있는 장비의 상태가 각기 최악에 준하고 있다.

    대형 레이드를 계획하고 준비하며 다양한 방면에서 만반의 준비를 끝냈지만, 항상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막타를 빼앗긴 순간부터 이들의 멘탈은 이미 산산조각 났다.

    암울한 상황에서 정혁의 한마디는 정적으로 이어졌다.

    드웨이크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정혁을 바라보았다.

    5분을 벌어 준다고 한들 낮은 레벨에 괴랄한 직업을 가진 저 플레이어를 믿을 수 있을까? 설령 믿는다 해도 무엇이 변할까.

    “왈로? 무기를 주실 수 있나요?”

    왈로가 정혁을 돌아보았다.

    왈로의 무기는 이미 넝마나 다름없었다.

    본디 영롱한 보랏빛의 거대 스피어는 두동강 나 손잡이 부분만 겨우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방패의 반 이상은 제멋대로 금이 가서 몇 합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 정혁 님. 아직 결정난 건….”

    “대안이 있나요?”

    정혁이 드웨이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러나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드웨이크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보았다.

    야인 시절 홀로 세계의 악명 높은 자들과 몬스터들을 사냥을 하며 다녔을 때도, 4차와 5차 대전쟁에 참여했을 때도, 고립되거나 고통이 짙어진다 하더라도 항상 활로를 찾았던 그였다.

    도적떼의 공격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고 그에 대한 대비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생각보다 원활하지 못했던 키메라와의 고전 그리고 예상 자체를 할 수 없었던 정혁이라는 플레이어의 등장 때문에 이미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상황 속에서 미리 구비한 대비책이 전혀 소용이 없을 뿐이었다.

    드웨이크는 결국 그의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저 남자에겐 지금 이 어두운 상황 속에서 패배나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엿보였고 지금 팀원들에겐 보이지 않는 승리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변에 모인 남은 팀원들은 8명.

    접근하는 적은 최소 20명.

    더 고민할 시간이 없다.

    5분.

    5분을 버텨 보자.

    저 아리송한 남자를 믿어 보는 거다.

    “다들 잘 들어라. 힘들고 지쳤지만 우리는 사력을 다해 5분을 번다.”

    “팀장님! 저 새끼를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럼 그렇지.

    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정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하늬안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왈로의 스피어와 방패를 건네받아 들었다.

    굉장한 무게였고 허리가 휘청였다.

    다행히 상당히 부서져 있어서 무게가 덜 나갔고 레벨 업을 통해 어느 정도 완력이 상승했던 터라 어떻게든 들 수는 있었다.

    왈로는 뒤춤에서 짧은 한손 검을 꺼냈다.

    “우리는 모두 당신에게 희망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왈로의 말에 정혁은 억지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에겐 분명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까부터 아래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액티브 스킬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급 재료 획득으로 인한 대장장이 고유 스킬이 발동됩니다. 제작에 착수하시겠습니까? YN]

    ‘저 ‘제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쥐고 있는 것은 최상급도 아닌 전설급 재료. 그리고 나는 대장장이. 무기나 방어구만 있다면 이 전설급 재료를 통해서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말도 안 되는 이 직업과 칭호를 믿어 보는 것이다. 오아이스의 대장장이니까.’

    ‘제작 착수.’

    정혁의 선택과 함께 다시 황금빛 마나가 양손에서 은은하게 흩어져 나오더니 그것들이 모여 이공간으로 향하는 포탈로 변했다.

    정혁은 포탈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주변을 살핀 뒤 왈로의 무기를 들고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도적 떼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정혁의 대장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오직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만 제공되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마치 문을 열고 들어온 듯 그는 작은 대장간에 있었다.

    몇 가지 간단한 제련 도구들과 대장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 대장간.

    익숙하지 않은 고열과 쇳물의 냄새가 대장간 본연의 느낌을 살려 주고 있었다.

    강철 망치만큼의 거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혼자서 작업하기에 어려움은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조건이 충족되거나 일정 숙련도 이상이 되면 언제든 당신의 대장간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숙련도에 따라서 대장간의 지속 시간 및 내부 구성, 제련 가능한 장비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현재 당신의 숙련도는 15입니다. 간단한 제련과 강화가 가능합니다.]

    “뭐 어떻게 해야 하지…?”

    정혁은 왈로의 무기를 제련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 옆에 붉은 수정을 나란히 두었다.

    팔짱을 끼고 망가진 무기와 수정을 번갈아 보지만 답이 나오진 않았다.

    고민하며 옆에 놓인 제련 망치를 쥐는 순간 활성창이 눈앞에 등장했다.

    [이웃의 수호자 왈로의 무기입니다.]

    - 수리하시겠습니까?

    - 강화하시겠습니까?

    - 재구성하시겠습니까?

    수리나 강화는 알겠는데 재구성은 뭐지? 정혁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큰 숨을 들이 쉬고는 제련 망치를 굳게 잡으며 말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재구성해 보자. 왈로의 무기, 재구성!”

    [당신은 왈로의 무기를 재구성하기를 원합니다. 재료는 붉은 수정입니다. 승낙하십니까? YN]

    마지막 확인과 함께 정혁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재구성 방법을 그대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쇳물과 제련 망치의 날카로운 타격음 속에서 왈로의 무기와 방패는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

    정혁이 이공간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팀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드웨이크는 정혁이 사라지자마자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저 정도 레벨에 이공간을 드나들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정혁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 역시 무시하기 힘들었다.

    입장을 바꿔 정혁이 자신이었다 해도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드웨이크에게도, 팀원에게도 그에게 걸었던 변수 외에는 이곳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 새끼를 믿는 게 아니었다니까요!”

    멸과 절을 휘두르며 하늬안이 소리쳤다.

    팀장은 침묵했다.

    왈로는 한 손 검으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고 있었고 나머지 팀원들도 각자의 무기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도적떼는 후방에서 꾸준히 서포트를 받으며 다양한 대형으로 그들을 압박했다.

    한 번 한 번을 견뎌 내기 어려웠다.

    벌써 두 명의 팀원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도적 떼의 움직임은 꽤나 조직적이었다.

    마치 그들이 레이드를 준비했던 것처럼 동일하게 제논의 기사단을 고의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훈련된 사냥꾼들 같았다.

    “왈로! 이들이 누군지 알 수 있겠나?”

    “전혀요!”

    왈로가 우측에서 밀고 들어오는 푸른 검광을 가까스로 쳐 내며 팀장에게 대답했다.

    그 순간 드웨이크의 아래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도적을 하늬안이 밀쳐 내며 한마디 거들었다.

    “완벽히 모든 것을 숨겼어요! 우리도 지쳐서 판단력이 흐려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정보를 알 수 없는 자들은 처음이에요!”

    드웨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쓰러진 팀원 중에 정보력이 강한 지원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여섯 명의 마지막 레이드 팀원들도 전부 근접 공격에만 특출할 뿐 당장에 이런 치고 빠지는 공격을 방어할 만한 기재가 뚜렷이 있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굳혔다.

    ‘이것은 분명 제논의 기사단을 향한 명백한 도전이다. 어리숙한 도적떼도 아니거니와 조직적이고 공격적이며 무엇보다 목적이 뚜렷하다. 그들은 분명 이곳에서 우리 모두를 무너트릴 것이다. 어디가 뒷줄일까. 어디서 먼저 사주했을까.’

    정신은 복잡하고 그보다 더 소란스러운 공격들이 사방에서 집중된다.

    하늬안은 우측 어깨를 움켜쥐고 쓰러졌다가 멸을 들어 올려 공격을 튕겨 냈다.

    이제는 육중한 두 검 중에 하나밖에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5분이 이렇게 길었던가….”

    드웨이크는 탄식하며 정혁이 사라진 공간을 쳐다보았다.

    찰나의 틈에 드웨이크의 왼쪽 어깨를 날카로운 투창이 관통했다.

    단단해 보였던 판금 갑옷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붉은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균형을 잃으며 그는 쓰러졌고 왈로가 그에게 달려오다가 구속 마법에 붙잡혔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각종 구속 마법들 속에서 남은 6명의 팀원은 모두 굴복당했다.

    하늬안은 무기를 빼앗겼고 고래고래 상욕을 내뱉다가 둔기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왈로는 끝까지 이를 물고 무릎을 꿇지 않으려 버텼으나 드웨이크의 목에 닿은 검날에 어쩔 수 없이 무너져야 했다.

    “제논의 기사단….”

    도적 떼를 이끄는 리더 격의 인물이 드웨이크에게 다가왔다.

    도적 떼는 모두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가죽 복장을 입은 그들은 어떤 특징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이름조차 불명확했다.

    어떤 마법을 통해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가려 놓은 것 같았다.

    “5차 대전쟁 이후 카탈 최남단의 신흥 왕국 제논에 소속된 풋내기 기사단 따위가….”

    드웨이크는 그의 앞에 선 인물을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목에는 살기 어린 검날이 금방이라도 베어 버릴 듯 겨눠져 있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제논의 기사단을 무너트리려는 세력의 작은 실마리라도 잡아 보려고 노력했다.

    수수께끼의 인물은 드웨이크의 목을 겨누던 자에게 손짓을 해 거두고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말을 이었다.

    “요즘 짖어도 너무 크게 짖는 것 같더군.”

    순간 그의 품에서 날카로운 단도가 뽑혀져 나와 드웨이크의 옆구리를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드웨이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팀원들의 고함과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고 드웨이크는 입술을 깨물으며 뒤늦게 밀려드는 고통을 억지로 삼켰다.

    “분수를 알아야지.”

    수수께끼의 인물은 고꾸라진 드웨이크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다가 일어서 발로 내려 밟았다.

    옆구리에 박혀 있는 단검이 더 깊게 박혀 들어왔다.

    깨문 입술 사이로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폐를 다쳤는지 숨이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세상에 경고가 될 것이다. 뒷골목에서 왕 노릇이나 하던 하룻강아지가 범의 세계에 발이라도 들이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짓누르는 힘이 강해질수록 드웨이크의 얼굴이 점점 땅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오아시스에는 총 두 개의 대륙이 존재한다.

    대륙 사이에는 미지의 세계인 중앙해가 있고 각 대륙 간의 왕래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각자 대륙 안에서 다양한 국가들을 건설하고 영역 다툼을 벌이곤 한다.

    오아시스의 자유도는 제한이 없어서 모든 선택과 운영을 플레이어들에게 맡긴다.

    다만 오아시스 내부의 모든 세계와 종족들 역시 엄청난 자유도를 부여받아 뛰어난 AI 시스템을 통해 마치 실재하는 존재들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들 역시 각 구역에서 그들만의 영토와 왕국을 건설하고 살아간다.

    왕국은 왕권을 세우고 플레이어들과 각 종족들을 연합하거나 혹은 특정 우세 길드와 상호 계약을 통해 왕국을 지킨다.

    제논의 기사단 길드는 5차 대전쟁 이후로 세력을 불려 간 길드였지만 긴 오아시스의 역사 속에서는 이제 막 흙더미 속에서 올라오는 떡잎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과 계약을 맺은 왕국 제논도 마찬가지였다.

    왕국 제논은 세계 지도를 기준으로 우측에 자리한 대륙인 카탈의 제일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땅의 질 자체가 척박해 왕국이 세워지기에는 어려운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왕국 제논은 기사단의 레이드 활동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을 통해 조금씩 북상하려는 의지를 다져 가고 있었다.

    그래 봐야 카탈에서 가장 작은 왕국에 속했고 여러 왕국과 제국의 패권 싸움에 아직은 끼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드웨이크는 길드의 자랑인 레이드 팀의 팀장으로서 이런 세계정세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다른 세력들에게 견제를 받을 줄은 몰랐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당당히 그들을 공격했다고 해도 제논에서 어떻게 나올지 혹은 마스터가 어떤 대응을 할지는 미지수다.

    어떻게 보면 그저 조용한 희생으로 누군가에게만 기억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의 만약까지 배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듯 상대는 이렇게나 치밀하게 접근해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고 완벽하게 그들의 경고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모를 것이다.

    정혁이라는 변수를 말이다.

    공간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붉은 기운이 뒤틀린 공간 속에서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 나오고 왈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공간을 바라본다.

    도적 떼 역시 뒤틀린 공간에서 멀어져 그곳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왈로!”

    기합이 잔뜩 들어간 정혁의 목소리였다.

    “야, 야야! 빨리 받아! 아우 씨!”

    그저 무기가 무거워 죽겠다는 정혁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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