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5화 (5/200)
  • ◈5화

    키메라가 쓰러지고 주변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꼴이 굉장히 우스워졌다.

    본디 ‘막타’라는 것은 전 세계 모든 게임 속 금기의 행동이다.

    정혁이 ‘한’이었을 때야 자신이 곧 법이었기 때문에 타인의 고생, 고생 생고생을 지켜보다가 막타로 재미를 많이 봤지만 지금의 정혁은 그럴 만한 깡도 힘도 없다.

    게다가 이건 제논의 기사단 소유의 레이드였다.

    ‘레이드 몬스터를 레벨 5짜리 플레이어가 막타로 빼앗았다.’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어쩌면 이제 정혁이 그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막타의 효과는 놀라웠다.

    모든 경험치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고 키메라 처치를 통해 얻어지는 모든 보상의 소유권도 정혁에게 돌아왔다.

    특히 그가 손에 얻는 ‘붉은 원석’의 가치가 상당해 보였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정혁’ : 레벨 25]

    순식간에 20레벨이 올랐다.

    물론 스탯에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체력은 레벨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래도 몬스터 한 마리에 20레벨이라니 경이로운 수치였다.

    그럼 뭐하나, 상황은 이미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을.

    하늬안이 스탯 창을 쳐다보고 있는 정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싸가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우어어어! 또 체력 깎일라.

    사정없이 달려드는 하늬안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정혁이 주변을 둘러보자 크고 작은 전투의 흔적을 안고서 정혁을 향해, 정확히는 허탈하게 빼앗긴 레이드 몬스터 근처로 모여든 제논의 기사단 레이드 팀원들이 보였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모두의 눈빛에서 정혁을 향한 증오가 묻어 나왔다.

    “하늬안 그만.”

    정혁을 향해 재차 달려들려던 하늬안을 중재하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긴장 속에 굳어 버린 분위기를 갈랐다.

    “팀장, 그치만!”

    “하늬안."

    그의 말에 하늬안이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팀장이라고 불리던 사내였다.

    투구를 벗은 그의 얼굴은 구릿빛 피부에 짧은 머리, 그리고 왼쪽 눈에서 볼을 거쳐 입 근처까지 긴 상처가 나 있어 인상적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꽤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보낸 것 같았다.

    “고생들 했다. 일단 우리는 이곳에서 철수한다. 근처에 세 곳을 임시 거처로 선정하고 방어진을 펼쳐라. 냄새를 맡은 몇몇의 도적 떼들이 있을 수 있다. 나와 왈로가 이곳에 남는다.”

    “팀장님! 저도 남겠습니다! 이자와 저는 안면이 있는 사이입니다!”

    냉철한 팀장의 판단에 하늬안이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가증스러운 녀석.

    “지금 네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팀장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가득했다.

    정혁이 피식 웃었다.

    하늬안은 그의 웃음을 눈치채고 얼굴이 붉어졌다.

    ***

    레이드 팀원들은 즉각 세 개 조로 흩어졌다.

    전음 채널을 새로 개설하고 각기 임시 거처를 표시해 공유한 뒤 자리에서 이탈했다.

    하늬안은 끝내 정혁과 한바탕 눈싸움을 거친 뒤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왈로는 능숙하게 주변을 경계했다.

    비록 그의 무기는 그립밖에 남지 않았지만 투지는 여전해 보였다.

    “정혁… 님이라고 불러야겠지요.”

    사내가 방패와 무기를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정혁은 그의 동태를 살피면서 허튼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은 그였다.

    도의적으로 따져 봐도 그랬고 현실적으로도 그랬다.

    애초에 먹튀를 할 수조차 없는 실력 차이다.

    “네.”

    그는 간결하게 대답하고서 바닥에 떨어진 여러 아이템들을 바라보았다.

    “인사나 나눌까요. 제논의 기사단 공식 레이드 팀장 드웨이크입니다.”

    사내가 장갑을 벗어 손을 건넸다.

    정혁은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악수만으로도 사내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황이 애매하게 됐습니다.”

    악수를 마치고 드웨이크는 다른 손의 장갑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모든 소유권은 정혁 님께 넘어갔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저희의 입장도 난처하니….”

    ‘그래, 알아. 나도 난처해 뒤지겠어.’

    정혁은 입을 다물었다.

    최대한 상대의 패를 먼저 봐야 했다.

    물론 그들이 순식간에 정혁을 제압하거나 혹은 죽임으로써 모든 소유권을 이양받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제논의 기사단’의 평판에 먹칠을 하는 일이거니와 보통 기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이들의 마음엔 애초에 있지도 않은 옵션일 게 뻔했다.

    “다른 아이템들은 전부 획득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경험치 때문에 이 고생을 한 것도 아니구요. 저희 팀에서 구하려고 했던 물건은 바로 그겁니다.”

    사내는 정혁의 손에 쥐고 있는 붉은 수정을 가리켰다.

    [붉은 수정 - ???]

    - 확률적으로 획득 가능한 전설급 제련석

    - 대장장이의 숙련도에 따라 수정의 능력이 분별됩니다.

    -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에게는 100% 획득 가능합니다.]

    - [‘정혁’에게만 귀속됩니다.]

    ‘점입가경이구만.’

    정혁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드웨이크 역시 정혁의 제스처를 보고 뭔가를 고개를 숙였다.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들 사이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 일단 들어보세요.”

    정적을 깬 건 정혁이었다.

    “본의 아니게 이 수정을 제가 획득하게 됐지만 그쪽도 알다시피 제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마침 제 특수 능력이 발동되었으니 말이에요. 그 덕분에 원치 않게 ‘막타’를 가져가긴 했다만 그러지 않았다면 제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요. 당신에게는 제가 있었습니다.”

    곁에서 경계를 하고 있던 왈로가 한마디 거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경계를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귀는 이쪽을 향해 열어 둔 모양이었다.

    “제가 한 대 때려도 박살 났을 것 같은 방어구를 두른 당신을 믿으라구요?”

    정혁이 코웃음 쳤다.

    드웨이크는 정혁의 태도를 통해서 그가 수정을 건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동시에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아시스가 처음이신 분 맞나요?”

    사내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질문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온 그의 물음에 정혁은 당황했다.

    스산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났다.

    키메라의 사체는 천천히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갔고 아래에 떨어진 여러 아이템들만 남아 반짝이고 있었다.

    “뭐, 그런 질문을 합니까.”

    정혁은 간략히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오아시스는 한 명의 사람이 하나의 캐릭터만 생성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강력한 보안 시스템에 의해서 두 개 이상의 캐릭터 생성은 완벽하게 제한되고 있었고 타인의 캐릭터를 컨트롤하는 것도 DNA 인식 프로그램으로 인해 절대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오아시스의 시스템상 드웨이크의 앞에 있는 25레벨의 플레이어는 이 세계가 처음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다고 해도 들은 이야기와 실제 경험은 천지 차이다.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있다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당연히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람이든 몬스터든 말이다.

    그러나 이 플레이어는 혼잡한 상황에서 오히려 냉철한 결정을 내렸다.

    레벨 5라면, 적어도 정상적인 플레이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드웨이크로서는 켕기는 부분이 분명 있었지만 어찌 됐건 키는 정혁이 쥐고 있다.

    “도의적으로 당연히 당신들에게 모든 전리품을 넘겨주는 것이 맞습니다. 뭐 사실 당신들이 무력으로 나온다 해도 저는 할 말이 없구요. 시간이 지나 소유권 잠금이 풀리고 나면 모든 전리품을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수정은 줄 수가 없습니다.”

    드웨이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무, 물론 주고 싶습니다만 제, 제게 귀속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상의 반응이 나오기 전에 정혁은 재빨리 말을 뱉었다.

    “귀속이 되었다구요?”

    정혁은 다급히 수정을 바닥에 던졌다.

    수정은 영롱한 붉은 빛을 띠며 주변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드웨이크가 그것을 쥐려 했지만 그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실체 없는 물건처럼 일렁일 뿐이었다.

    남의 물건이라고 해도 일반적인 아이템들은 쥐어진다.

    그러나 소유권 때문에 본인의 인벤토리에 넣어지진 않는다.

    이렇게 쥐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은 소유권 이상의 등급인 귀속 단계로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더 곤란해졌네요.”

    드웨이크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으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정혁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붉은 수정을 손에 쥐었다.

    키메라의 머리에서 거대하게 빛을 발하던 녀석이 이제는 주먹만 한 크기로 작아졌다.

    순간 드웨이크가 눈을 번쩍 떴고 동시에 왈로와 눈을 마주쳤다.

    긴급 전음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3개 그룹으로 흩어져 경계를 하고 있던 팀원 중 한 그룹이 공격을 받는 듯했다.

    드웨이크는 재빨리 다른 그룹을 그곳으로 보내고 하늬안이 속해 있던 그룹을 그들이 있는 곳으로 복귀시켰다.

    전음 채널은 오픈한 순간부터 소속된 이들이 생각을 그대로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다.

    정혁 역시 수상한 기세를 느끼고 수정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뒤쪽에서 달려오는 몇몇의 플레이어들을 바라보았다.

    하늬안과 그 외의 기사단 레이드 팀원들이었다.

    다시 그녀를 마주한다는 것이 소스라치게 싫었지만 하늬안은 정혁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팀장의 곁에 섰다.

    “상황은?”

    “전음 채널이 점점 닫히고 있습니다!”

    전음 채널이 닫힌다는 것은 수신을 받을 사람이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들은 이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군.”

    드웨이크가 정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 집단에게 습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형 레이드 이후엔 이렇게 지친 플레이어들을 급습하는 도적 떼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제논의 기사단이다.

    아직 작은 규모의 왕국에 속한 길드이지만 레이드 팀의 플레이 평판은 나름대로 세계권인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길거리에서 발에 차이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

    물론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수가 될 수 있다.

    죽음 이후에 플레이어가 받는 패널티도 분명히 있거니와 실제와 다름없는 끔찍한 고통은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

    공포는 그대로 존재한다.

    남아 있는 팀원들을 위해서 도망이 훨씬 나은 선택지이지만 그간의 노력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남자를 데리고 회피 고속 이동을 진행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마지막 전음이 끊어집니다. 대략 20여 명 되어 보여요!”

    하늬안이 소리쳤다.

    “팀장!”

    왈로가 사방을 주시하며 다급히 재촉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그 순간 정혁이 외쳤다.

    “5분만 나를 지켜 줘요. 가능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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